• ▲ 독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14일 연극 '리처드 3세' 공연을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연합뉴스
    ▲ 독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14일 연극 '리처드 3세' 공연을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연합뉴스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을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인간들 하나하나의 깊은 내면과 스스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해 저는 이렇게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작품을 선택한 겁니다."

    독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50)가 2년 만에 '리처드 3세'를 가지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2005년 '인형의 집-노라', 2010년 '햄릿'에 이어 2016년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을 국내 무대에 올린 바 있다. 

    오스터마이어는 14일 오전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에 다시 와서 '리처드 3세'를 선보이게 돼 영광이다. 저의 작품에 많은 호응과 지지를 보내줘서 배우들도 한국 공연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며 내한 소감을 말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무대에 가장 자주 오르는 연극 '리처드 3세'(1452~1485)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 이야기이다.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리차드 3세는 곱추라는 신체적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비범한 두뇌와 뛰어난 말솜씨를 가졌다. 그는 어린 두 조카를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하나 그에 맞서 일어난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훗날 헨리 7세)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최후를 맞는다.

    오스터마이어는 리처드 3세에 대해 "단지 광인에 불과했다면 그는 말이나 존재감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보기에 그는 사이코패스라기 보다는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무대 위에서는 광기도 작용한다"며 운을 뗐다.

    그는 "리처드는 권력을 쟁취하는 관계에서 우정 등의 가치는 믿지 않고 스스로만 믿을 수 있다는 냉소적인 면을 보인다. 계층적인 사회적 속박이나 배신당할 수 있는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만 의지하려는 우울한 정서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리처드 3세를 굳이 사악한 악인, 독재자로 치부하기 보다는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광대, 엔터테이너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관객은 리처드 3세에게 매혹당하며 자신에게도 그와 비슷한 사악함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 독일 베를린 글로브 극장.ⓒLG아트센터
    ▲ 독일 베를린 글로브 극장.ⓒLG아트센터
    2015년 2월 베를린에서 초연된 '리처드 3세'는 그해 여름 아비뇽 페스티벌과 2016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극찬을 받았다. 오스터마이어는 반원형의 무대를 세우고 이를 꽃가루와 흙먼지가 흩날리는 무채색의 황량함으로 채워 그 위에서 펼쳐지는 핏빛 살육과 검은 모략의 현장을 부각시켰다.

    "베를린에서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맞춤형 극장에서 공연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원형극장이었던 글로브 극장을 본 뜬 무대로, 반원형의 객석을 마련해 관객들에게 무대 위 액션의 일부가 되는 경험과 친밀감을 선사했다. 이번 LG아트센터 공연도 극장 규모에 맞춰 한국 관객에게 동일한 경험과 느낌을 줄 것으로 믿는다."

    "한국 번역본은 자막이 극장의 어디에 위치해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관객들이 연극을 바라봤을 때 시야의 중간 지점에 배치해 한국어 자막을 눈으로 보는 동시에 독일어 대사, 무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액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했다."

    '리처드 3세'의 번역과 각색은 독일 출신의 극작가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크가 맡았다. 마이엔부르크는 영어의 운문을 산문적인 독일어 대사로 바꾸면서도 원작 텍스트의 의미와 이야기의 핵심을 유지했고, 오스터마이어는 이를 바탕으로 과감한 연출을 시도했다.

    오스터마이어는 "번역이라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항상 셰익스피어 연극을 올릴 때 새로운 번역본을 준비한다. 언어라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극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새 언어를 사용해서 새 버전을 준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셰익스피어의 영어식 운문을 독일어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물들의 심리를 잘 파고들 수 있도록 산문을 사용하기로 했다. 현대적인 번역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독일어는 영어보다 음절이 더 많고 빠르게 진행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운문을 사용한다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 ▲ 연극 '리처드 3세' 공연 장면.ⓒLG아트센터
    ▲ 연극 '리처드 3세' 공연 장면.ⓒLG아트센터
    극중 에드워드 세자와 요크 왕자는 퍼펫 인형으로 대체했다. 이에 대해 "아역 대신 인형을 사용한 이유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한 느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 권력의 힘으로 결국 희생될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스터마이어는 베를린 에른스트 부쉬 예술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베를린 도이체스 테아터에 속한 소극장 바라케의 예술감독으로 발탁됐다. 1999년 9월에는 31세의 나이에 현대 실험 연극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의 예술감독직에 올랐다.

    19년째 샤우뷔네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오스터마이어는 "그 동안 다른 곳에서 많은 영입 제안이 있었지만 샤우뷔네를 고집하는 것은 모국어 때문이다. 언어는 연극에서 저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또 이곳에선 제 컴퍼니를 가질 수 있다. 고정된 배우들과의 지속적인 작업이 언어만큼 중요하다"고 전했다.

    "우리는 단지 해야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말할 뿐이다. 젊은 관객을 유치하겠다고 특정한 의도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작업하지는 않았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젊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리처드 3세'는 흉측한 신체적 외형만큼이나 어두운 영혼을 가진 절대악의 화신이자 천재적인 모사꾼으로 그려진다. '리처드 3세' 역의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는 1999년부터 샤우뷔네 앙상블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오스터마이어의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오스터마이어는 "아이딩어와 '햄릿'을 하고 나서 또 다른 세익스피어 작품을 다루는 것이 논리적으로 다가왔다. 리처드를 연기하는 아이딩어는 다른 언어로도 관객과 소통하고 유혹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배우"라며 높이 평가했다.

    연극 '리처드 3세'는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오스터마이어는 한국 공연을 마친 후 프랑스 파리로 가서 극단 코메디프랑세스(Comedie-Francaise)와의 협업으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제작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