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대통령의 월남전 관련 사과를 규탄한다! 
     
    월남전은 휴전협정을 위반한 월맹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되었고 파병된 한국군은 이런 전쟁범죄로 5000명이 죽었다. 양민 학살은 주장일 뿐 한국의 공식적 조사로 확인된 바 없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비슷한 사과를 한 적이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왜 또 사과를 하나?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베트남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한국과 베트남이 모범적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베트남 주석궁에서 가진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이같이 밝히며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협력 증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파병과 민간인 학살 문제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언론은 풀이하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베트남 호찌민 시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에 보낸 영상 축전을 통해서도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꽝 주석은 이어진 비공개 회담에서 문 대통령의 과거사에 대한 유감표명에 대해 “베트남전 과거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며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양국간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며 상생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더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過恭非禮와 賊反荷杖이 겹쳤다. 월남전은 휴전협정을 위반한 월맹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되었고 파병된 한국군은 이런 전쟁범죄로 5000명이 죽었다. 양민 학살은 주장일 뿐 한국의 공식적 조사로 확인된 바 없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비슷한 사과를 한 적이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왜 또 사과를 하나? 

     이는 국군통수권자로서 국군의 자랑스런 해외 파병을 욕되게 하는 역사 自害행위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자유를 지키려고 월남전에 파병되어 國益을 증진시켰다. 월남의 공산화는 사이공의 티우 행정부와 미국이 책임질 일이지 박정희 정부와 국군이 잘못한 일이 없다. 월남 정부도 한국 정부에; 한번도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월남 공산화는 정의로운 일, 이를 저지하려 하였던 미국, 한국, 호주 등 자유진영의 노력은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사상을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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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글

     월남 주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蔡命新(채명신) 장군이 87세를 一期로 별세하였다. 월남전에 참여한 한국군은 연 30만 명이었다. 이들은 지금 60~80代이다. 채명신 장군과 함께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세대이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2001년 8월2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방한중이던 월남의 찬 둑 루옹 대통령에게 '불행한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여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사실상 사과를 한 셈이다. 그 직후 만났던 채명신 장군이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金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정통 역사관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도 맞지 않았다.
      
       첫째, 대한민국이 국군을 월남전에 보낸 것은 월남의 자유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우리의 체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빼내 월남에 보내려고 했다. 이것을 간파한 朴正熙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견제하기 위하여 전투 사단 파견을 결심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월남파병을 계기로 하여 많은 實益(실익)을 챙겼다. 월남특수란 것이 일어났다. 월남에 많은 한국 회사가 진출하여 돈을 벌었고 미국 존슨 정부는 한국에 많은 원조를 주었다. 한국의 공업화에 큰 기여를 한 KIST, 즉 한국 과학기술원은 월남전 파병에 대한 존슨의 선물이었다. 월남전에 진출한 장병들과 노무자들이 벌어들인 돈과 배운 건설 기술이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다. 월남전선에서 한진, 현대 같은 회사들이 성장했다. 특히 건설회사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터득하여 70년대에 중동으로 뛸 수 있었다.
      
       셋째, 월남전에 대한민국이 파병한 것은 정의로운 일이었다. 미군은 6.25전쟁 때 5만 명의 젊은이를 희생시켜가면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 미국이 파병을 부탁하는 데 혈맹인 한국이 의리를 지킨 것이다. 이 일 덕분에 韓美 동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월남전쟁의 도발자는 17도선 이북의 공산 월맹이었다. 그들은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정규사단을 17도선 남쪽으로 내려보내 공산혁명을 노린 게릴라 전을 주도했으며 월남의 베트콩 부대를 부렸다. 명백한 남침이었다. 이 침범행위에 대해서 자유세계가 군대를 보낸 것이다. 호주, 필리핀 등도 파병하였다. 1975년 월남 전역이 공산화되면서 미군 편에 섰던 한국은 勝戰國(승전국)이 되지는 못했으나 결코 사과할 나쁜 일을 한 적은 없다.
      
       넷째, 한국군은 국제법을 위반한 월남 공산군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 바로 우리가 피해자인 것이다. 그들은 전쟁규칙을 위반하여 군인 복장을 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행세하면서 우리 국군을 괴롭혔다. 약 5000명이 전선에서 죽었고 1만 명 이상이 다쳤다.
      
       나는 당시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상의 관점에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일방적 사과를 반대하고 규탄하는 바이다. 김대중 개인이 사과하는 것도 문제인데 하물며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보위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를 무효시하는 사과를 국민과 국군의 동의 없이 했다는 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그의 사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이 사과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월남참전은 자랑해야 할 일이었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일부 언론과 좌파에서 검증도 되지 않은 학살설을 들고 나와 월남파병을 죄악시하는 주장을 폈으나 다수 국민과 국군의 생각은 월남파병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런 역사관을 바꾸려면 많은 논의와 토론을 거쳐야 하고 아주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숙희 장관이 월남파병에 대해서 용병 운운 했다가 군 장교들의 반발로 사직했던 적이 있다. 이번 김 대통령의 발언이 가진 무게는 김 장관과 비교할 바 아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다. 공산 국가의 원수한테 그 공산 국가의 불법적인 침략행위-혁명기도를 막으려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한 셈인데, 그렇다면 공산화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월남의 공산통일이 월남 사람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불행을 가져다 주었는지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공산화 후 발생한 보트 피플의 비극은 공산통일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경제를 낙후시켰음을 증명한다. 뒤늦게 월남정부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받아들여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공산통일은 善(선)이고 이를 막으려고 했던 자유세계의 反共(반공) 행동은 사과할 만한 惡(악0이란 느낌을 줄 가능성도 있다.
      
       셋째, 김 대통령의 사과는 1960년대 - 1970년대를 살았던 세대로부터 추억을 빼앗아가는 행동이다. 젊은이들이 월남에 가서 고생하고 있으니 국내에 있는 우리도 더 열심히 일하자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전선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늘 긴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긴장을 국가 건설에 잘 활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는 '용사는 말없이 바다를 건넜다. 자유보다 더 귀한 것, 있으면 말하라'는 軍歌(군가) 가사처럼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지켜줄 만큼 컸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된 시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월남전 세대의 자부심과 추억을 앗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으려면 새로운 물을 길어와야 한다. 우선 월남참전 단체와 제대 군인들이 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시키는 방향으로 의견과 행동을 모아야 할 것이다. 월남전 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이하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전기) 중 관련 부분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 분의 지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으로 격리시킨 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졌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 보면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다. 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에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부터의 각종 외화가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혁명 때는 5사단장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박정희 지지에 나섰던 사람이다.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 소장 아래서 참모로 일하였고 육사 5기 생도로서는 박정희 중대장으로부터 배웠다. 채 장군은 한국전 때 유격부대를 지휘, 敵陣(적진)에 침투, 많은 공을 세웠다. 월남전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轉役(전역) 후 좌파정권 시절 애국운동에도 앞장섰다. 평생을 對共戰線(대공전선)에서 보낸 분이다. 冥福(명복)을 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