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계를 이끌어온 이윤택(66)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성추행 사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그의 온갖 성폭력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한국 공연예술계에 이런 추악한 사건이 언제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성폭력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한다.

    이윤택 연출가는 19일 오전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저에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 제 죄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며 머리 숙여 공개사과했다.

    그는 "극단 내에서 18년간 진행된, 생활에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의 일이었다"면서 "어떤 때는 나쁜 짓인지 모르고 죄를 저질렀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가지면서 제 더러운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고, 악순환이 반복됐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성폭행도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아 비난을 샀다. 이 연출가는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행은 아니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강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여기서 왈가왈부한다고 진위를 밝힐 수 있겠나. 법적 절차가 필요하며 사실과 진실이 밝혀진 뒤 그 결과에 따라 응당 처벌받겠다"고 했다.

    또한,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직접 안마콜을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아니다. 안마는 제가 시켰다. 안마에 대해서는 지금 제 잘못을 통감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남자든 여자든 같이 다 했다. 제 탓이다"고 해명했다.

  • 기자회견에서 1인 피켓 시위를 한 배우 홍예원은 "피해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공개사과 방식 자체가 2차 가해"라며 "(성폭행 의혹 부정은)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며 내용은 '술 먹었는데 음주운전 아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다.

    박상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는 "아직 그가 진심으로 뉘우친 것 같지 않다. 폭로한 후배들에게 위로와 경의를 표한다. 블랙리스트 이상으로 예술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김소희 대표는 이 연출가의 성폭력 파문에 책임을 지고 "오늘 연희단 거리패를 해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 대표는 "그동안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 일은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해 단원들과 논의 끝에 해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극단 해체 이후에도 이윤택 연출에 대한 법적 조치와는 별개로 극단에서도 자체 진상조사를 통해 조사 결과를 공개하겠다"며 "이 연출 명의의 30 스튜디오를 비롯해 부산 가마골 소극장 등 그와 연희단거리패 관련 건물은 모두 처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10여년 전 이 연출가에게 성추행 피해 경험을 폭로한 것을 시작으로 연희단거리패 옛 단원들의 '미투(#MeToo·나도 말한다)' 고백이 쏟아지고 있다.
  • ▲ 김보리(가명) 씨가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올린 글 일부 캡처.
    ▲ 김보리(가명) 씨가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올린 글 일부 캡처.
    김보리(가명) 씨는 지난 17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윤택한 패거리를 회상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19살이던 2001년과 20살이던 2002년 두 번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연희단거리패에 있을 때 황토방이라는 별채로 호출을 받아 수건으로 나체 닦기, 성기와 그 주변을 안마했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일어난 일과 목격한 일을 모른척 하고 지냈다"면서 "그의 성추행은 성폭행이 되었다"고 폭로했다.

    이어 18일 '윤택한 패거리를 회상하며 2'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올려 인간문화재인 하용부(63) 밀양연극촌 촌장 역시 성폭행 가해자라고 밝혔다. 하용부 촌장은 조부 고 하보경 선생으로부터 밀양 전통춤을 배워 밀양 전통놀이를 전승해오고 있다.

    상업극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희단거리패 전직 단원 A씨는 "피해자가 여자 선배를 믿고 상담을 하면 오히려 야단을 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이윤택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씨가 그곳에서 왕이었지만 왕 옆에는 다른 신하가 있다"며 극단 선배들의 방관을 지적했다. 

    이윤택 연출가에 대한 성폭력 폭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배우 겸 극단 나비꿈 대표인 이승비는 19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metoo 벌써 오래전 일이다. 묵인하고 있다는 게 죄스러워 지금 간단히 있었던 사실만 올린다"라며 과거 이 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렸다.

    이승비는 "당시 국립극장 극장장이던 그 분이 공연 중인데도 불구하고 낮 연습 도중 저보고 따로 남으라고 했다. 발성연습을 조금만 하자는 거였다"며 "대사를 치게 하면서 온몸을 만졌다. 너무 무섭고 수치스러움에 몸이 벌벌 떨렸다. 결국 제 사타구니로 손을 쑥 집어넣고 만지기 시작해 전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내고 도망쳐 나왔다"고 설명했다.

  • ▲ 김지현 배우 페이스북 캡처.
    ▲ 김지현 배우 페이스북 캡처.
    오후에는 2003~2010년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했던 김지현 배우도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분들이 증언해 주신 것처럼 황토방이란 곳에서 여자단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안마를 했었고 저도 함께였다. 그 수위는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혼자 안마를 할때 전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김지현은 "2005년 임신을 했다. 제일 친한 선배에게 말씀을 드렸고 조용히 낙태를 했다. 낙태 사실을 아신 선생님께선 제게 200만원인가를 건내시며 미안하단 말씀을 하셨다. 이후 얼마간은 절 건드리지 않으셨지만 그 사건이 점점 잊혀져갈때 쯤 선생님께서 또 다시 절 성폭행하시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 동안 이들의 뼈 아픈 고백은 '연극계 거장 이윤택, 연희단거리패'라는 내부의 절대 권력 힘 앞에 묻혔다. 연희단거리패는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고, 아픔을 아프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피해자는 끝없는 악몽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성범죄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아 수사기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대표적인 '암수범죄(暗數犯罪)'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3년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9~64세 성인의 1.5%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 중 1.1%만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나머지 피해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경찰에 요청하지 않았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윤택 연출가의 행위는 강제추행죄, 강간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죄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 상으로 공소시효가 지났고, 본인 스스로 강압적인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구체적인 범죄 성립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