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관리 지침 내려놓고 자기가 못지켜, 12년전 박근혜의 옅은 미소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웃고 있는 장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장면이 보도돼 여론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YTN TV화면 캡처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당시 웃고 있는 장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장면이 보도돼 여론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YTN TV화면 캡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2004년 3월12일, 당시 박근혜 의원은 표결이 진행되는 국회 본회의장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기록으로 남았고, 12년이 지나 오히려 자신이 탄핵을 당한 오늘날 또다시 회자된다.

    자신들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이 궐위되는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봐야 했던 대중들은 박 대통령의 표정에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 표정의 결과는 참담했다. 노무현 탄핵 역풍은 국론 분열의 단초가 됐고 촛불시위로 번지며 17대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2016년 12월9일, 여야는 모두 이같은 전례를 의식한 듯 박근혜 탄핵소추안 표결에 임하며 몸을 잔뜩 낮췄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마음이 무겁고 참담하다"고 했고, 유승민 의원조차 "가장 고통스러운 표결"이라 평가했다.

    국회에서는 '탄핵안 가결시 행동 요령'이라며 ▲인증사진을 올리지 말 것 ▲어떤 표정도 짓지 말 것 ▲SNS는 간결하게 ▲술 먹고 놀지 말 것 ▲대선주자와 같이 있지 말 것 등을 조언하는 글이 야당 안팎으로 퍼지기도 했다.

    우상호 원내대표도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에서 비슷한 취지로 소속 의원들에게 '표정관리'를 주문했다. 우 원내대표는 "본회의장에서 대화하지 말라. 자연스레 웃음기를 띠게 된다"면서 "가결돼도 환호성을 지르거나 박수 치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다.

    정작 말을 꺼낸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 민주당 원내대표단은 표결이 끝나자 여의도 인근 식당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수차례 건배사가 이어졌다. 탄핵 이야기가 나오면서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기자가 파악한 술자리는 2시간 정도였지만 이보다 일찍 시작됐고, 분명 더 늦게 끝날 상황이었다. '취재진이 따라 붙었다'는 식당 종업원의 귀띔이 없었다면 말이다. 술기운으로 인해 안면이 벌겋게 상기된 의원들은 그제야 부랴부랴 나오면서 머쓱했던지 "열심히 하자는 의미에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한 의원은 혹시나 기자가 뒤를 쫓지는 않을까 한동안 식당을 떠나지 않고 기자를 지켜보기도 했다.

  •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술자리를 마치고 나온 뒤 취재진과 마주친 모습이다. 그는 술 기운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취재진의 소속을 묻기도 했다. ⓒ뉴데일리 임재섭 기자
    ▲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술자리를 마치고 나온 뒤 취재진과 마주친 모습이다. 그는 술 기운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취재진의 소속을 묻기도 했다. ⓒ뉴데일리 임재섭 기자

    엄중해야 할 시국에 민주당이 술로서 기쁨을 표현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0년에는 임수경 전 의원이 광주 5.18 전야제 때 "386 당선자들이 모여 술 파티를 벌였다"고 폭로한 사건은 아직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우 원내대표가 이날 탄핵에 앞서 의원들을 다시 한번 단속한 것은 국민 손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려야만 국정운영이 정상화 될 만큼 현 상황이 엄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탄핵에 찬성했던 국민은 국정 동력을 상실한 박근혜 대통령 대신 국회가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길 바랐을 것이다.

    당장 황교안 총리를 인정할지 말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것이 정치권 분위기다. 향후 국정 방향을 심각하게 논의해도 부족할 판에 민주당 의원들의 이날 술자리는 그것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기사가 보도된 뒤, 우상호 원내대표 측에서 굉장히 불편한 기색으로 연락이 왔다. "식당에서 반주 조금 마신 것이 뭐가 문제냐"는 논리였다. 우상호 측은 특히 '술판', '술자리'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번에 2000년 '새천년 NHK' 사건이 떠올랐다. 접대부가 나오고, 위스키 정도는 마셔야 '술자리'라 할 수 있는게 아니냐는 인식에 아연실색했다.

    이날 '술자리'에는 7~8명의 인원이 함께 했고, 소주 9병 이상, 맥주 10명 이상이 들어갔다. 술병과 술잔이 흐트러진 모습은 분명 '폭탄주'를 만들어 마신 것으로 보였다.

  • 새천년 NHK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21 기사 캡쳐
    ▲ 새천년 NHK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21 기사 캡쳐

    IMF에 버금가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직무정지됐다. 누군가는 기쁨의 술잔을 들어올렸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안타까움의 술잔을 기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뻐하고 슬퍼하는 건 국민의 몫이다. 대통령이 직무정지된 그 시간에 야당 원내지도부가 폭탄주와 건배사를 연거푸 내지르고도 부끄럽지 않다는 국회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다. 

    새누리 김진태 의원은 촛불 정국에 사우나를 갔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진태 의원은 당일 지역구(춘천)에서 '연탄봉사'를 하고 몸을 씻으러 갔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이 엄중한 시국에 사우나를 가느냐'며 열을 올렸다.

    국민은 알고 있다. 국회가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것을.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야당이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을 '적장의 목을 베는 것' 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작지 않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국민과 정치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탄핵하는 악순환이 계속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