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최초의 '독립기구' 획정위 존재감 무색… 필요성 원점서 재검토해야
  • ▲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위원회(자료사진).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위원회(자료사진).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당리당략으로 점철된 정쟁이 '독립기구'인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더욱 적나라한 양상으로 판을 치고 있다. 흡사 정치권이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획정위원들에게 정쟁의 아웃소싱을 한 듯한 모습이다.

    선거구획정위가 위원들 간의 날카로운 대치 끝에 산회함에 따라 새로운 선거구 획정안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26일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것은 무산됐다. 게다가 획정위 내부의 이견이 언제 해소될지 분명치 않고, 설령 획정안이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획정안에 불만을 품은 여야 정치인들이 안행위 등에서 뒤집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어 29일 본회의 처리도 불투명한 양상이다.

    ◆정의화 당부에도 언제쯤 위헌 상황 종식될지

    지난 23일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지역구 253석+비례대표 47석'에 합의한 이후, 정의화 국회의장은 선거구획정위에 25일 정오까지 이에 따른 선거구 획정안을 넘겨줄 것을 주문했다. 이튿날인 26일 안행위와 본회의를 차례로 열어 공직선거법을 처리함으로써 위헌 상황을 종식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의장의 이러한 당부도 헛되이 획정위는 25일 밤샘회의에도 결론을 내지 못한 데 이어 26일에도 연이어 전체회의를 열었으나 획정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산회했다. 선거구획정위 관계자는 "오전에 회의를 속개했으나 계속되는 회의 진행으로 획정위원들의 피로가 누적돼 정상적인 회의 진행이 어려웠다"며 "향후 효율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27일 오후 2시에 다시 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획정위, 여야 정쟁의 연장전… 핸드폰 수거도 별무신통

    이에 따라 선거구획정안 논의는 속절없이 주말로 넘어가게 됐다. 국회의장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고, 지역구 253석·비례대표 47석이라는 가이드라인까지 다 마련됐는데도 독립기구인 획정위가 획정에 실패한 이유가 뭘까.

    정치권 관계자는 "말만 독립기구이지 (획정위의) 구성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뤄져 있다"며 "국회가 정쟁을 획정위 교수들에게 아웃소싱한 셈"이라고 일갈했다.

    총 9명 정원의 획정위는 여야 추천위원 각 4명에 중앙선관위의 1인으로 구성된다. 외견상으로 보면 여야가 균형을 이룬데다 중선관위의 1인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의결정족수에 독소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획정위에서 의결을 하려면 3분의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관위의 1인이 보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당 추천위원 중 1인이 야당안에 찬성하거나, 야당 추천위원 중 1인이 여당안에 찬성해야 의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선거구획정위 관계자의 귀띔이다.

    명색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여야 추천위원들이 각각 사실상 '간사' 역할을 하는 위원까지 두고 자신을 추천해 준 정당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정쟁의 연장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외풍이 계속되자, 지난해 10월에는 회의에 앞서 획정위원들의 휴대전화를 일괄 수거하는 등 흡사 초등학교에서나 있을 법한 촌극까지 벌어졌지만, 날카로운 대치 구도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의석 수 확정되자 되레 전선 늘어나

    '지역구 253석+비례대표 47석'의 여야 합의가 이뤄진 뒤, 여야 추천위원 간의 단일 전선(戰線)이 되레 다양화·복층화됨에 따라 단일한 선거구획정안 마련은 더욱 절망적인 양상이 됐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수도권의 분구(分區) 지역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여야 간의 팽팽한 대치 구도가 벌어지고 있지만, 2석이 줄어드는 경북과 1석이 줄어드는 전남에서는 여야 추천 획정위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차가 발생하고 있다"며 "전국 253개 지역구의 의석을 둘러싼 이견을 하나도 남김없이 해소하는 과정이 지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북, 안동·예천 통합 절실하지만 훼방 놓는 교수 있어

    일례로 경상북도에서는 신(新)도청이 들어서는 안동시와 예천군을 하나로 선거구로 통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생활권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여론이고 정치권의 중론이지만 유독 한 명의 선거구획정위원이 주도적으로 이 안에 기를 쓰고 훼방을 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와중에 선거구획정위의 또다른 위원은 과거 대통령 직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에 몸담고 있을 때에는 신도청 이전을 이유로 안동시와 예천군의 행정단위 통합을 주장했다가, 이번 선거구 획정 과정에서는 안동과 예천의 선거구 통합을 반대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처신을 보여, 누구보다 소신에 따라야 할 교수가 정치인을 능가하는 당리당략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역 정가의 관계자는 "13개로 재편되는 경북의 선거구는 △포항·울릉 갑~을 △구미 갑~을 △김천 △경주 △경산 △안동·예천 △문경·상주 △영주·봉화·울진·영양 △군위·의성·청송·영덕 △영천·청도 △고령·성주·칠곡으로 재편하는 게 신도청 시대와 교통·문화 등 생활권을 고려한 합리적인 안"이라며 "학연(學緣) 따위의 터무니없는 이유로 경북의 선거구획정안이 엎어진다면 지역 주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남, 선거구 획정 시나리오만 난무

    새누리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경북이 선거구 획정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야권의 심장부 전남에서도 수많은 선거구획정안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라남도 선거구 획정안의 핵심은 영암군을 어디에 붙이느냐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당 황주홍 의원의 지역구인 영암·장흥·강진을 영암과 장흥·강진으로 나눠 각각 인구 미달인 무안·신안, 고흥·보성에 통합하는 방안이 최소 변화의 원칙이라는 이유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방안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어 전통적으로 생활권이 상이한 영암군과 무안군이 하나의 선거구로 묶인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영암을 해남·완도·진도에 붙이고 함평을 담양·영광·장성에서 떼어내 무안·신안에 합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여수 갑~을 △목포 △순천 △나주·화순 △무안·신안·함평 △담양·영광·장성·곡성 △광양·구례 △고흥·보성·장흥·강진 △해남·영암·완도·진도 획정안도 검토되고 있다.

    또, 4개 군(郡) 선거구를 최소화한다는 이유로 △여수 갑~을 △목포 △순천 △무안·신안·진도 △해남·강진·완도 △나주·영암·장흥 △고흥·보성·화순 △광양·곡성·구례 △담양·함평·영광·장성도 시나리오 중의 하나로 제시됐다. 이 경우 4개 군이 포함되는 광역 선거구를 도내에 하나로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전남 선거구를 생활권에 따라 전체적으로 재조정하면서 △여수 갑~을 △목포 △순천 △광양·구례 △무안·신안·함평 △해남·완도·진도 △고흥·보성·화순 △나주·영암·장흥·강진 △담양·영광·장성·곡성으로 재편하는 방안도 고려 대상이다.

    ◆헌정 사상 최초 '독립기구' 획정위에 피로감

    이처럼 수많은 안(案)만 난무한 채 정작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헌정 사상 최초로 선거구획정위를 국회 밖에 독립기구로 둔 것에 대한 회의적 여론마저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야가 각각 4명씩 추천하는 추천 비율이 문제이기 때문에 여야가 각 3인씩 추천하고 선관위 비중을 1명에서 3명으로 늘리자거나, 의결정족수를 3분의2에서 과반으로 낮추자는 등 다양한 개선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치화된 대학교수들로 선거구획정위를 구성하는 게 옳은지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중앙선관위가 애초에 제시했던 지역구 200석~비례대표 100석의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안부터가 비례대표를 줄여야 한다는 국민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다"며 "농어민들은 자기 군(郡)을 대표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뽑길 원하고 있는데,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온 대학교수들이 가지고 있는 마인드 자체가 한국적 정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탁상공론"이라고 중선관위와 획정위원, 양쪽을 향해 동시에 쓴소리를 했다.

    이 관계자는 "민의를 정확히 대변하려면 이번 기회에 지역구를 과감히 늘리고 비례대표를 과감히 줄였어야 했는데, 대학교수들은 지방 순회 공청회를 하면서도 현지 주민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밖에 듣지 않았다"며 "국민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물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민의를 정확히 대변해 선거구를 획정할 수 있겠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