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민주당 거치며 7선 고지 등정… 2007년 대선에선 MB 지지
  •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평생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외견상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엄히 꾸짖고 질타했던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20일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이기택 전 총재는 고려대 상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0년 이른바 고대 학생들의 4·18 규탄 시위를 주도하며 정계 입문의 초석을 놓았다.

    이후 1967년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71년 5·25 총선에서는 자신이 고등학교(부산상고)를 나온 부산의 동래 선거구에서 출마, 4선까지 내리 당선됐다. 신민당에서는 같은 부산을 정치적 근거지로 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계보로 분류됐다.

  •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4·19공로자회장, 4·19기념사업회장 등의 자격으로 서울 수유동 4·19 민주묘역에서 분향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4·19공로자회장, 4·19기념사업회장 등의 자격으로 서울 수유동 4·19 민주묘역에서 분향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김종인 참여한 국보위에 의해 정치활동 금지당해

    1980년 더민주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전문위원 자격으로 참여한 위헌적 입법 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해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이 공포되자,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이 금지된 567명의 명단 안에 들어 손발이 묶였다.

    '신민당 돌풍'이 몰아친 1985년 2·12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남구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 5선 고지에 오른 이기택 전 총재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이 YS의 통일민주당(민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평화민주당(평민당)으로 쪼개지자, 자신의 계보 수장인 YS를 따라 민주당에 몸담았으며 1988년 총선에서는 6선을 달성했다.

    하지만 1990년 YS가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와 함께 건국,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대통합을 의미하는 3당 합당을 결단하자, 이에 반발해 YS의 곁을 떠났다. 이 때 노무현·홍사덕·이철 전 의원 등이 그와 함께 했으며 이들은 이른바 '꼬마민주당'을 결성했다.

    주로 부산 출신으로 이뤄진 이들을 눈여겨 본 것은 3당 합당으로 인해 정치 지형에서 고립된 DJ였다. 동진(東進)을 노린 DJ의 러브콜에 이들은 통합을 결정, 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DJ마저 정계를 은퇴하자, 이기택 전 총재는 야권의 유일한 지도자가 됐으며 당대표로서 전국구로 출마, 마침내 7선 고지에 등정했다.

  •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1990년 이른바 꼬마민주당 멤버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는 모습. 함께 건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원혜영 의원이며, 뒷쪽으로 홍사덕 전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뉴시스 사진DB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1990년 이른바 꼬마민주당 멤버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는 모습. 함께 건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원혜영 의원이며, 뒷쪽으로 홍사덕 전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뉴시스 사진DB

    ◆7선 고지 올랐으나, 지역 기반 잃으며 내리막길

    이 무렵이 이기택 전 총재의 정치적 최전성기였으며, 그의 영문 이니셜을 딴 KT계가 존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95년 DJ가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하자 야권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심해졌으며 결국 DJ가 박지원 의원 등을 이끌고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차리자 지역 기반을 잃은 그의 민주당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1996년 총선에서 각각 영남·호남·충청에 기반을 둔 신한국당·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약진했으나,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이기택 전 총재 본인조차 부산 해운대·기장에서 낙선했다.

    초조해진 이기택 전 총재는 원내 재진입을 위해 이듬해 실시된 7·24 재·보궐선거에서 포항 북구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신한국당 이병석 후보도 아닌 무소속 박태준 후보에게 패배하며 정치적 치명상을 입었다.

    박태준 후보는 민자당 시절 YS의 대권 후보 행보를 견제하다가 YS가 대통령이 된 뒤 극심한 정치 탄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 보궐선거는 'YS로부터 팽(烹)당한 두 사람'의 대결로 관심을 끌었으나, 이 지역에 탄탄한 조직을 가지고 있던 허화평 전 의원이 박태준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것이 컸고 애초부터 마땅한 지역 연고가 없는 이기택 전 총재의 출마는 무리수였다는 분석도 있다.

    이후 정치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은 이기택 전 총재는 한때 이회창 전 총재와 같은 배를 타기도 하고,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김윤환 전 의원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해보기도 했으나 뚜렷한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정계 은퇴로 내몰렸다.

  •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 20일 타계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생전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노무현에 냉정한 평가 "조직·시스템에 부적합"

    이기택 전 총재는 한때 자신과 함께 '꼬마민주당'에 몸담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엄격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리켜 "꼬마민주당 시절부터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회의에서 동의를 얻지 못하면 휙 떠나는 등 불안정한 성격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조직이나 시스템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 내가 알았던 '노무현'보다 더 도가 지나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 사람에게서 보지 못했던 나머지 어두운 절반을 발견했다"고 비판했다.

    이 '나머지 어두운 절반'만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세력이 바로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를 정점으로 하는 친노패권주의 세력이다. 이 때문일까. 이기택 전 총재는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으며, 이후 2008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냈다.

    이기택 전 총재의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4일 오전이다. 장지는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