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오 벨리 96세로 사망…이탈리아의 ‘반공 테러조직’ 이끌었던 인물
  • ▲ 세계 주요 언론들은 지난 15일(현지시간) 리치오 젤리가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생전의 리치오 젤리. ⓒ유튜브 P2 관련 영상 캡쳐
    ▲ 세계 주요 언론들은 지난 15일(현지시간) 리치오 젤리가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생전의 리치오 젤리. ⓒ유튜브 P2 관련 영상 캡쳐

    세계 주요 언론들이 96세로 사망한 이탈리아의 한 정치인에 대한 소식을 ‘속보’로 내보냈다. 그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냉전 시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온갖 음모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은 이탈리아 정치가 ‘리치오 젤리(Licio Gelli)’가 지난 15일(현지시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리치오 젤리’는 1945년 ‘프로파간다 두에(Propaganda Due, 일명 P2)’라는 조직을 창설해 이끌었던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부하로 활동했으며 나치 SS대원이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나는 파시스트다. 그리고 파시스트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내뱉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리치오 젤리’가 이끌었던 ‘P2’는 프리메이슨 이탈리아 본부로 알려져 있다. 일부 매체는 “프리메이슨은 1717년 영국에서 생겼다”는 설명까지 곁들였지만, 프리메이슨은 전 세계 60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홈페이지까지 가진 공개조직이다. 하지만 ‘P2’는 사실 ‘극우 비밀결사’에 가까운 조직이었다는 설명이 정확하다.

    ‘P2’는 1948년 설립된 이후 1981년 ‘불법단체’로 지정돼 강제해산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지금까지도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P2’는 1978년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사망, 알도 모로 이탈리아 현직 총리 납치살해, 1982년 로베르토 칼비 암브로시아노 은행장 자살 등에 연루되었다는 의혹도 일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경찰과 검찰은 ‘P2’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P2’는 또한 바티칸이 소유한 은행에 마피아 자금을 끌어들이는데 개입했던 정황이 드러나 논란을 빚기도 했다.

  • ▲ 1978년 납치 살해당한 채 발견된 알도 모로 이탈리아 총리. 당시 이탈리아 경찰은 좌익테러조직 '붉은여단'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해외 커뮤니티 캡쳐
    ▲ 1978년 납치 살해당한 채 발견된 알도 모로 이탈리아 총리. 당시 이탈리아 경찰은 좌익테러조직 '붉은여단'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해외 커뮤니티 캡쳐

    그러다 1980년 85명이 사망하고 182명이 부상을 입은, ‘볼로냐 대학살’로 알려진 볼로냐 기차역 폭탄 테러 사건 때 경찰의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한 뒤 1981년 ‘불법단체’로 지정돼 ‘공식적’으로는 해체됐다.

    하지만 ‘P2’는 이후로도 꾸준히 활동,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로까지 조직을 넓힌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 1976년 쿠데타를 일으킨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해군사령관, 페론 정권 시절 사회복지부 장관이었던 호세 로페스 레가, 임시 대통령이었던 라울 라스티리 등이 모두 ‘P2’ 회원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P2’가 여전히 활동 중이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前총리를 비롯해 군 지휘부, 유명 언론인과 학자, 정치인, 대기업 오너 등 유명인과 권력가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 언론들은 ‘P2’가 오리엔탈 계열 프리메이슨 조직의 이탈리아 본부라고 말하지만, 해외 언론은 ‘P2’의 실제 정체를 냉전 시절 미국 정보기관이 주도해 만든 반공 테러조직 ‘글라디오’의 이탈리아 지부에 가깝다고 본다. ‘P2’가 프리메이슨 본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장이라는 분석이다.

    ‘글라디오’는 냉전 시절 유럽과 남미 지역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美CIA가 서방 국가 정보기관과 연합해 만든 비밀조직이다.

  • ▲ 美CIA가 NATO 회원국 정보기관과 함께 만든 반공조직 '글라디오'의 로고. ⓒ해외 음모론 커뮤니티 캡쳐
    ▲ 美CIA가 NATO 회원국 정보기관과 함께 만든 반공조직 '글라디오'의 로고. ⓒ해외 음모론 커뮤니티 캡쳐

    ‘Stay Behind(적진에 남는다)’는 모토를 가진 ‘글라디오’는 평시에는 공산주의 이념 확산을 막기 위한 대중 선전활동을, 전시에는 공산화된 적진에 남아 저항군을 조직하고 배후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던 ‘특수부대’로 알려져 있다.

    1948년 ‘글라디오’가 처음 탄생했을 때 ‘반공’을 지상목표로 삼으면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파시스트, 나치스트 등 부적절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P2’ 또한 공산주의에 적개심을 가진 루치오 젤리를 중심으로 반공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P2’의 반공 활동은 도를 넘어섰다.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현직 총리를 납치해 살해하고, 볼로냐 기차역에 폭탄 테러를 가한 뒤 좌익 테러조직 ‘붉은여단’의 소행으로 위장한 것이다.

    이밖에 바티칸과의 검은 자금 거래, 범인을 찾지 못한 여러 건의 암살 사건 등에도 ‘P2’가 개입돼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P2’는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났지만, 다른 나라의 ‘글라디오’는 스위스의 ‘P26’ 정도만이 알려졌다. 첩보 전문가들은 ‘글라디오’가 미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 전체, 다른 지역의 주요 동맹국, 일부 중립국까지 참여한 조직이라고 보고 있다.

    1990년대 EU 의회에서 ‘글라디오’의 일부 작전 내용이 폭로되고, 2008년 美국무부가 기밀해제된 문건을 통해 ‘글라디오’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다른 유럽국에도 이탈리아의 ‘P2’와 같은 조직들이 있음이 알려졌다.

    스위스의 P26, 오스트리아의 OWSGV, 스웨덴 AGAG, 룩셈부르크의 ‘스테이 비하인드’, 벨기에 ‘SDRA 8’이 ‘P2’와 같은 ‘글라디오 현지 지부’였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또한 ‘글라디오 지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지만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EU 의회는 ‘글라디오’에 대한 사실을 폭로한 뒤 회원국들에 관련 수사를 권고했지만, 각국 정부는 ‘글라디오 지부’에 대한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

    이번에 ‘P2’의 수장인 리치오 젤리가 사망하면서, 그나마 세상에 드러났던 ‘글라디오 이탈리아 지부’를 둘러싼 의혹과 진실 또한 저 세상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