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회 우남李承晩애국상, 孫世一 선생과 高永宙 변호사

    손세일: 建國대통령에 대한 방대한 자료 발굴, 정리.
    고영주: 통진당 해산 운동의 법리적 뒷받침.

    대한민국 사랑회(회장 김길자)는 2014년도 제7회 우남이승만애국상 수상자로
    孫世一(전 국회의원)씨와 高永宙 씨(변호사)를 선정, 13일 발표했다.
    시상식은 14일 오후 2시 프레스 센터 20층에서 제66회 건국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사랑회는 건국절 제정 발기인대회도 함께 연다.
    그동안 건국절제정 서명운동을 벌여온 김길자 회장은 이날 강영훈 이홍구 정원식 현승종등 전 총리와 각계 인사들, 해외동포를 포함한 9천여명이 참여한다고 밝혔다.

     
  • 孫世一 수상자(사진)는 政界를 은퇴한 이후 만 12년 동안 월간조선에
     '이승만과 김구-한국 민주주의의 두 유형'을 연재, 정치傳記 분야의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건국 대통령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발굴, 정리한 공로가 인정되었다.
     高永宙 변호사는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애국활동을 법률적으로 지원하고, 특히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 운동에서 법리를 세우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이 인정되었다. 
  
  *손세일 약력: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 일본 도쿄 대학교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하였다.
<사상계><신동아> 편집장과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인권과 민주주의>(1980) 등의 저서와 번역서 <트루먼 회고록>(1968)이 있다. 
  
  *공적 요약: 12년 동안 113회에 걸쳐 月刊朝鮮에 <孫世一의 비교평전-李承晩과 金九>를 연재, 독립운동과 건국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간 사실관계를 집대성하였다. 한국에서 政治傳記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한국 현대사를 바로 보는 데 필수적인 자료를 발굴하였으며, 건전한 역사관을 심을 수 있는 기준을 만들었다. 
  
  *공적 개괄: 손세일 선생은 정계를 은퇴한 이후 2001년 8월호 월간조선부터 ‘李承晩과 金九’ 연재를 시작해 2013년 7월호에서 끝냈다. 만 12년 동안 총 연재횟수는 110회, 여기에 1·2·3부가 끝날 때마다의 에필로그를 합하면 113회를 연재하였다. 200자 원고지로 2만여 장 분량이다. 피추천인은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이란 副題를 달았는데, 李承晩, 金九 두 사람의 행적을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상세하고 치밀하게 재구성하였다. 자연스럽게 건국 대통령 李承晩에 대한 記述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국내외의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하면서 脚注(각주)를 붙여 학술적 가치를 드높였다. 피추천인은 한국이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은 두 사람의 公的 활동인 독립투쟁과 건국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면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두 민족 지도자는, 출신은 달랐지만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신념화하여,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공산주의 세력에 빼앗기지 않았다. 피추천인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독립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국이 가능하였다는 점을 방대한 서술을 통하여 증명한다. 특히 李承晩이 미국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 공산주의를 1920년대부터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결별선언을 통하여 반공노선을 건국노선과 접목시키는 과정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였다. 두 사람의 動線을 거의 日, 月 단위로 따라간 ‘李承晩과 金九’는 방대한 양과 정확한 기술이 겸비된 한국 현대사 및 정치학 분야의 기념비적 성과이다. 정치인이 은퇴한 이후 70대의 10년을 한 작품을 위하여 全力投球한 예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   *'목숨을 걸고 쓴' 孫世一의 '李承晩과 金九'
       
      집권당 원내 대표 출신이, 월간조선에 12년간 연재, 원고지 2만 장 분량 넘어. 
        
      裵振榮(월간조선) 
        
      “목숨을 걸고 원고를 썼지요, 아플 틈도 없었어요.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오늘도 아프거나 교통사고 같은 일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했어요. 지금 기분? 홀가분하다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짐 하나 내려놓은 것 같아요.” 
        
      지난 12년간 《月刊朝鮮》에 <孫世一의 비교평전-李承晩과 金九> 연재를 마친 손세일(孫世一·78) 선생의 소회입니다. 12년간 《월간조선》은 늘 같은 기사, 즉 <손세일의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로 끝을 맺었습니다. 《월간조선》 2001년 8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2013년 7월호(6월 17일 발매)에서 끝났는데, 만 12년 동안 총 연재횟수는 110회입니다. 여기에 1·2·3부가 끝날 때마다 에필로그를 합하면 113회를 연재한 것이지요. 200자 원고지로 2만여 장 분량입니다. 
        
      기간이나 원고량보다 더 거대한 것은 이 비교 평전(評傳)이 다루고 있는 인물이 한국 민족주의의 양대 巨人인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라는 점입니다.
       
      ◇“현실 정치 경험이 두 사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
        
      손세일 선생은 1970년에도 같은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단권(單卷)으로 나온 이 책은 1969년 《신동아》에 4회에 걸쳐 연재했던 내용을 엮은 것이었습니다. 1970년판 <이승만과 김구>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잔을 들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손 선생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며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첫 번째 《이승만과 김구》를 썼을 때, 그의 나이는 만 35세였습니다. 당시 그는 《사상계》편집장과 동아일보 《신동아》 부장(편집장)을 지낸 후였습니다. 그 후 1980년 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 의장, 동(同) 원내총무 등을 지냈습니다.
    정치를 그만둔 후 손 선생은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탈(脫)냉전 이후 1969~1970년에는 접할 수 없는 자료들도 많이 나왔어요. 오래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정치를 접으면서, 역사를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집필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는 “실제 정치를 해 본 경험이 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습니다. “실제 정치를 하고 나서 보니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젊은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어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돈과 조직 아닌가요? 그런 점들을 알게 되고, 크고 작은 정치투쟁을 경험해 본 것이 두 사람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일일이 교정보고 사진크기까지 신경써… “우리 문법 정확하게 구사하려 노력”
         
      손세일 선생이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후, 처음 찾아간 곳은 ‘친정’인 《신동아》였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는 그가 내세운 까다로운 조건을 듣고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원고량이 많아도 그대로 실어줄 것 ▶교정 이외에는 문장을 고치지 말 것 ▶일반적인 잡지 편집 형식과는 달리 각주(脚注) 등을 달아줄 것 등 편집권을 침해(?)하는 요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趙甲濟  당시《월간조선》 편집장은 손세일 선생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무척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12년 동안 연재를 하는 동안 그는 매일 일산에 있는 집을 나서면서 “사고나 병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승만과 김구> 연재 초기, 《월간조선》의 한 달은 손세일 선생께서 원고를 갖고 오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편집·미술팀이 그가 쓴 원고 파일과 자료 사진을 책의 본문 형태로 편집하고 나면, 손 선생은 교정지를 집으로 가져가서 꼼꼼하게 손을 본 다음 다시 가져와 최종 교열을 직접 했습니다. 잡지 ‘思想界’의 편집장을 지낸 대선배가 월간조선 사무실 한구석의 조그만 책상에 앉아 정성껏 교열을 보는 모습은 월간조선 전체에 無言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손 선생은 “알게 모르게 침투한 미국식, 일본식 문법을 배제하고 우리 문법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토박이말을 많이 사용하려 특히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위해 오랜 친구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의 조언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관련 사진을 직접 구해 보내주었고 게재되는 사진의 크기까지 세심하게 챙겼습니다.
        
      12년 동안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섭렵했을까요? 이에 대해 손 선생은 “총 몇 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이 주제와 관련해 필요한 자료는 빼놓지 않고 보려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석·박사 학위 논문, 미국·일본의 관련 논문, 舊소련 문서 등을 두루 섭렵했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을 마포 도화동에 마련한 것도 국회도서관 등을 이용하기 편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도산안창호기념관, 독립기념관 등에 소장된 자료들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나온 각종 자료와 연구성과들을 읽는 데 3분의 2, 글을 쓰는 데 3분의 1 정도의 시간이 들어갔다. 잠을 자면서도 원고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통해 애국심 얘기하고 싶었다”
        
      올 6월17일 발매된 《월간조선》 7월호로 막을 내린 <이승만과 김구>는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얘기,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많이 담았습니다. 
      
      김구가 치하포 나루에서 살해한 것은 간첩활동을 하던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일본 상인이었으며, 이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배상을 해주어야 했다든지, 1948년 김구의 북행(北行)에는 거물간첩 성시백의 공작이 작용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입니다. 
        
      손세일 선생은 이승만의 ‘정치가’로서의 경륜과 판단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또 ‘현실정치인 김구’의 모습(권력의지, 정치적 판단착오 등)도 놓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일부 인사들은 “<이승만과 김구>가 이승만을 높이고 김구를 폄하하는 것 아니냐”고 불만스러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손 선생은 7월호에 실린 에필로그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에서 두 사람의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뜨거운 애국자였지만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건국을 앞두고 이승만은 ‘국가’를, 김구는 ‘민족’을 우선하는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큰 나라 국민들은 어느 정도 개인주의로 가도 된다. 하지만 약소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단합, 애국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승만과 김구를 통해 애국심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손 선생에게 두 사람의 단점을 묻자, “이승만은 포용력이 부족했던 게 아쉽고 김구는 유엔 결의에서 남북협상, 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12년 동안의 장기 연재가 끝난 후 손세일 선생이 허탈함 때문에 건강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부 있었습니다만, 손세일 선생은 여전히 활달하고 의욕 충만 상태였습니다. 그는 요즘에도 경기도 일산에 있는 자택에서 지하철로 마포구 도화동 성지빌딩에 있는 청계연구소 사무실로 아침 9시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를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지난 12년 동안 새로 나온 연구성과나 자료 등을 반영해 각주와 본문 등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각주들을 정리하는 데만 앞으로 3개월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가 책으로 나오면 당연히 젊은이들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이승만과 김구>를 갖고 강의라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팔십을 앞둔 손세일 선생은 아직 영원한 청년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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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永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