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쓴' 孫世一의 '李承晩과 金九'
집권당 원내 대표 출신이, 월간조선에 12년간 연재, 원고지 2만 장 분량 넘어.
裵振榮(월간조선)
“목숨을 걸고 원고를 썼지요, 아플 틈도 없었어요.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오늘도 아프거나 교통사고 같은 일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했어요. 지금 기분? 홀가분하다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짐 하나 내려놓은 것 같아요.”
지난 12년간 《月刊朝鮮》에 <孫世一의 비교평전-李承晩과 金九> 연재를 마친 손세일(孫世一·78) 선생의 소회입니다. 12년간 《월간조선》은 늘 같은 기사, 즉 <손세일의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로 끝을 맺었습니다. 《월간조선》 2001년 8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2013년 7월호(6월 17일 발매)에서 끝났는데, 만 12년 동안 총 연재횟수는 110회입니다. 여기에 1·2·3부가 끝날 때마다 에필로그를 합하면 113회를 연재한 것이지요. 200자 원고지로 2만여 장 분량입니다.
기간이나 원고량보다 더 거대한 것은 이 비교 평전(評傳)이 다루고 있는 인물이 한국 민족주의의 양대 巨人인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라는 점입니다.
◇“현실 정치 경험이 두 사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
손세일 선생은 1970년에도 같은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단권(單卷)으로 나온 이 책은 1969년 《신동아》에 4회에 걸쳐 연재했던 내용을 엮은 것이었습니다. 1970년판 <이승만과 김구>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잔을 들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손 선생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며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첫 번째 《이승만과 김구》를 썼을 때, 그의 나이는 만 35세였습니다. 당시 그는 《사상계》편집장과 동아일보 《신동아》 부장(편집장)을 지낸 후였습니다. 그 후 1980년 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 의장, 동(同) 원내총무 등을 지냈습니다.
정치를 그만둔 후 손 선생은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탈(脫)냉전 이후 1969~1970년에는 접할 수 없는 자료들도 많이 나왔어요. 오래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정치를 접으면서, 역사를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집필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는 “실제 정치를 해 본 경험이 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습니다. “실제 정치를 하고 나서 보니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젊은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어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돈과 조직 아닌가요? 그런 점들을 알게 되고, 크고 작은 정치투쟁을 경험해 본 것이 두 사람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일일이 교정보고 사진크기까지 신경써… “우리 문법 정확하게 구사하려 노력”
손세일 선생이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후, 처음 찾아간 곳은 ‘친정’인 《신동아》였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는 그가 내세운 까다로운 조건을 듣고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원고량이 많아도 그대로 실어줄 것 ▶교정 이외에는 문장을 고치지 말 것 ▶일반적인 잡지 편집 형식과는 달리 각주(脚注) 등을 달아줄 것 등 편집권을 침해(?)하는 요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趙甲濟 당시《월간조선》 편집장은 손세일 선생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무척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12년 동안 연재를 하는 동안 그는 매일 일산에 있는 집을 나서면서 “사고나 병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승만과 김구> 연재 초기, 《월간조선》의 한 달은 손세일 선생께서 원고를 갖고 오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편집·미술팀이 그가 쓴 원고 파일과 자료 사진을 책의 본문 형태로 편집하고 나면, 손 선생은 교정지를 집으로 가져가서 꼼꼼하게 손을 본 다음 다시 가져와 최종 교열을 직접 했습니다. 잡지 ‘思想界’의 편집장을 지낸 대선배가 월간조선 사무실 한구석의 조그만 책상에 앉아 정성껏 교열을 보는 모습은 월간조선 전체에 無言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손 선생은 “알게 모르게 침투한 미국식, 일본식 문법을 배제하고 우리 문법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토박이말을 많이 사용하려 특히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위해 오랜 친구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의 조언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관련 사진을 직접 구해 보내주었고 게재되는 사진의 크기까지 세심하게 챙겼습니다.
12년 동안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섭렵했을까요? 이에 대해 손 선생은 “총 몇 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이 주제와 관련해 필요한 자료는 빼놓지 않고 보려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석·박사 학위 논문, 미국·일본의 관련 논문, 舊소련 문서 등을 두루 섭렵했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을 마포 도화동에 마련한 것도 국회도서관 등을 이용하기 편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도산안창호기념관, 독립기념관 등에 소장된 자료들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나온 각종 자료와 연구성과들을 읽는 데 3분의 2, 글을 쓰는 데 3분의 1 정도의 시간이 들어갔다. 잠을 자면서도 원고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통해 애국심 얘기하고 싶었다”
올 6월17일 발매된 《월간조선》 7월호로 막을 내린 <이승만과 김구>는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얘기,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많이 담았습니다.
김구가 치하포 나루에서 살해한 것은 간첩활동을 하던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일본 상인이었으며, 이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배상을 해주어야 했다든지, 1948년 김구의 북행(北行)에는 거물간첩 성시백의 공작이 작용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입니다.
손세일 선생은 이승만의 ‘정치가’로서의 경륜과 판단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또 ‘현실정치인 김구’의 모습(권력의지, 정치적 판단착오 등)도 놓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일부 인사들은 “<이승만과 김구>가 이승만을 높이고 김구를 폄하하는 것 아니냐”고 불만스러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손 선생은 7월호에 실린 에필로그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에서 두 사람의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뜨거운 애국자였지만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건국을 앞두고 이승만은 ‘국가’를, 김구는 ‘민족’을 우선하는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큰 나라 국민들은 어느 정도 개인주의로 가도 된다. 하지만 약소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단합, 애국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승만과 김구를 통해 애국심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손 선생에게 두 사람의 단점을 묻자, “이승만은 포용력이 부족했던 게 아쉽고 김구는 유엔 결의에서 남북협상, 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12년 동안의 장기 연재가 끝난 후 손세일 선생이 허탈함 때문에 건강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부 있었습니다만, 손세일 선생은 여전히 활달하고 의욕 충만 상태였습니다. 그는 요즘에도 경기도 일산에 있는 자택에서 지하철로 마포구 도화동 성지빌딩에 있는 청계연구소 사무실로 아침 9시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를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지난 12년 동안 새로 나온 연구성과나 자료 등을 반영해 각주와 본문 등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각주들을 정리하는 데만 앞으로 3개월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가 책으로 나오면 당연히 젊은이들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이승만과 김구>를 갖고 강의라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팔십을 앞둔 손세일 선생은 아직 영원한 청년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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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永宙 변호사
약력: 경기고, 서울대 화공과 졸업, 대검찰청 감찰부장, 서울남부지청 검사장, 법무법인 KCL 대 표 변호사(현재), 방송문화진흥회 감사(현재), 자유민주연구학회 자문위원장, 국가정상화 추진위원회 위원장.
공적: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피소된 많은 애국인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 정부의 통진당 해산 청구를 가능하게 하였던 통진당 해산 청원 운동에 참여, 법리 제공, 전교조의 이념적 정체 폭로, 방송문화진흥회 감사로 MBC 정상화에 기여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헌신함으로써 우남 이승만 정신을 구현하였다.
*통진당 해산의 계기를 만든 3人의 애국자-徐貞甲, 高永宙, 徐錫九(2013년 작성)
趙甲濟
정부가 어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를 헌법재판소에 내게 된 계기는 9년 전인 2004년 6월 국민행동본부가 통진당의 前身(전신)인 민주노동당 해산을 법무부에 청원한 사건이다. 서정갑 본부장은 대구의 애국변호사 서석구 씨에게 부탁, 청원서를 썼다.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으므로 이 청원은 기각되었으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청원서를 내고 기자회견, 시위, 국민서명 운동을 벌였다. 민노당이 통진당으로 바뀌면 또 통진당을 걸어 청원서를 냈고, 드디어 지난 8월 정부가 이 청원에 답하는 형식으로 특별조사 팀을 구성, 훌륭한 法理(법리)를 갖추게 되었다. 법무부가 작성한 해산 청구의 논리는 공안검사 출신인 고영주 변호사(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가 국민행동본부의 청원서를 쓰면서 적시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헌법을 믿고, 종북좌익 반역 세력과 싸운 서정갑, 고영주, 서석구 세 사람의 애국자를 국민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반드시 보상해야 할 사람들이다.
*高永宙(고영주) 前검사장, 민노당 해산 청원 나선다(조갑제닷컴)
검사 시절 ‘공안통’으로 이름을 날렸던 高永宙(고영주) 변호사가 민주노동당 해산 청원에 나선다. 高변호사는 검사 시절 대부분 ‘공안 외길’을 걸었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제거 대상 검사 10걸’ 가운데 1명으로 지목돼 어려움을 겪다가 2006년 2월 서울남부지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高변호사는 검사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利敵性(이적성)을 밝혀내고, 대검 공안기획관이었던 1997년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利敵團體(이적단체)로 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高변호사가 이끄는 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와 대표적인 애국단체인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는 오는 26일 오후 2시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민노당 해산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갖고 청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한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와 ‘국민행동본부’는 미리 작성된 ‘해산 청원서’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목적 및 활동이 모두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므로, 헌법재판소에 위 정당에 대한 해산심판청구를 할 것을 청원한다”고 정부(법률상 대표자 법무부장관)에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민주노동당이 표방하고 있는 ‘민중민주주의’ 이념은 소위 ‘인민민주주의’나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의 變種(변종)으로서 국민 중 일부인 민중계급만의 주권을 주장, ‘국민 전체가 주인이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상의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개념이고, 이미 대법원 판례에 의하여 명백한 利敵(이적)이념으로 판명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노동당이 강령에서 표방하는 통일정책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과 같은 것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이 명령하는 자유민주통일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민노당은 新舊강령을 통하여 사회주의 지향, 북한식 연방제 통일, 민중민주주의,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 자본주의 반대 등을 주장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불법과 난동을 자행, 헌법 제8조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에 해당하므로 해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민주노동당 일반당원의 개별적 행위” 역시 해산의 사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즉 “민주노동당은 당직자들이 간첩 등 공안사건에 연루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나, 소속 당원들 범행과 관련해 對국민 또는 對정부 사과를 한 적이 없고, 또 해당 당원에 대하여 출당 등 조치를 취한 적이 없으며 간첩을 침투시켜 민노당을 장악하려 한 북한정권에 항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노동당은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서라면 벌써 해산되었어야 할 정당”이라고 강조한 뒤 “정부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지 10여년이 지나도록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청구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청원인(단체)이 본건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며 “정부 그리고 정부의 법률상 대표자인 법무부장관은 신속히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심판청구를 해줄 것을 청원한다”고 덧붙였다.
다음 달 2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는 ‘국민행동 2012’ 출범식이 열린다. 이날 역시 ‘왜 민노당은 해산되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고영주 변호사와, 조갑제(기자), 김성욱(기자)씨의 강연이 계획돼 있다. [ 2011-08-23, 23:35 ]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