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통일은 준비된 통일

    2014년의 남북한은 1964년의 동서독에도 어림없이 못 미친다.

    최성재      
     
    De inimico non loquaris sed cogites.
    (적에 대해 요행을 바라지 말고 냉정하게 계획하라.)

      1972년 남북한과 동서독은 각각 <남북공동성명>과 <기본조약>에 통일의 염원을 담는다.

    1990년 동독 주민 전체가 통일대박(글뤽스팔 Glücksfall)의 꿈을 이룬다.

    2014년 한국 대통령이 환골탈태한 미래형 도시,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통일대박의 3개 원칙을 밝힌다. 이에 대해 김일성 3세는 핵실험 으름장을 곁들여 막말과 대포와 미사일로 응답한다.

      <기본조약> 18년 후에 게르만족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대박의 꿈을 이뤘는데,
    <남북공동성명> 42년 후에도 한민족은 왜 천만 이산가족이 편지 한 통 주고 받지 못할까.

    첫째는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의 6.25남침 때문이다.
    동서독도 총부리를 겨누다가 300만이 전사했다면, 과연 재통일할 수 있었을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를 보면 알겠지만, 동서독이 내전을 겪었다면, 설령 동독이 서유럽 수준으로 민주화되었다고 하더라도 통일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무정부에서 공산정권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했거나 존재하거나 존재할 모든 정체(政體 polity)에 대해 입만 나불대다가, 얼떨결에 통일의 노래를 제창하며 강철 주먹 히틀러에게 국가를 헌납한 오스트리아에선 그리고 독일에서도 대독일주의(大獨逸主義 Großdeutsche Lösung)는 나치와 동일시되어 누구도 민족과 언어와 역사가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재통일하자고 못한다. 생각 자체를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이웃 국가일 뿐이다.


    둘째는 동독과 북한의 공산독재는 미국과 필리핀의 자유민주만큼 크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자유민주라고 같은 자유민주가 아니듯이 공산독재라고 같은 공산독재가 아니다.
    한 마디로 동독은 덜 나쁜 공산집단, 북한은 최악의 공산집단!
    아마존의 원시 부족에게도 이미 수백 년 전에 서구의 쇠도끼가 전해져 벌목의 생산성을 수십 배 높였듯이, 늦어도 2차 대전 후에는 시대적 흐름이 물결의 파동처럼 전 세계에 퍼져 나가서 아무리 공산독재라 할지라도 권력세습은 불가능했지만, 딱 한 군데 북한에서는 2대도 아니고 무려 3대에 걸쳐 전체주의적 봉건 절대권력의 세습이 이뤄졌다.
    이런 상대로는 세상에 다 통하는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
    한국이 설령 서독만큼 잘했더라도 김일성 왕가와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독에는 못 미치지만, 한국도 나름대로 특히 경제발전과 북한주민 해방 정책 등으로 노태우 정부까지는 통일 준비를 잘했다. 한국은 세계화의 긍정적인 흐름을 어떤 나라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 세대 만에 천지개벽했다. 이삼백 년 전통의 서구 수준에는 못 미쳤지만 선거가 거듭되었고 사이사이 군사혁명도 시민혁명도 가능하여 국가 원수가 10번이나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3권 분립이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갔다. 말만 황제 대통령이지 실은 이제 아주 작은 규제 하나 마음대로 없애지 못하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야당이 깽판 치면 그들이 소수라도 아주 작은 민생법도 하나 못 만들고 그저 발만 동동 굴린다. 해묵은 간첩 사건만 쏙쏙 골라 절차적 문제를 문제 삼아 사법부가 무죄 선고하고 국가가 배상하라고 해도, 대통령과 여당은 속만 부글부글 끓인다. 어쨌건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도 이제 한국은 부족한 대로 선진국 반열에 근접했다. 무소불위 1인자가 2인자도 언제든지 사형시키거나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패악을 3대에 걸쳐 계속하는 북한과는 천양지차다. 이를 이제는 북한주민이 대부분 알고 있다. 잘 대비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자유통일의 뇌관에 불이 붙을 수 있다.

    1949년 2차대전 전승국들이 신탁통치를 끝내면서 서독(FRG)과 동독(GDR)이 출범하게 되자,
    서방정토로 가는 길은 러시아워를 방불케 했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주민 345만 명이 서독으로 영구히 이주해 버렸다.
    아마 그대로 두었으면, 1990년까지 갈 것도 없이 1960년대에 동서독은 절로 재통일되었을 것이다. 동독 공산당은 큰형님 소련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1961).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무언지 아는 게르만족을 무조건 억누를 수는 없었다.
    불과 3년 후 동독 공산당은 잠재적 체제 위협의 질풍노도에 물꼬를 터 주기 위해 매년 연금생활자 1백만에게 달랑 10동독마르크(M)를 쥐어 주며 4주간 서독 방문을 허용했다(1964).
    서독은 즉시 동독 화폐보다 4배에서 10배 가치 있는 서독마르크(DM)를 베그뤼숭스겔트 곧 환영금(welcome money, Begrüßungsgeld)을 100마르크(약 50달러)씩 주었고, 이 관행은 서독을 방문하는 게르만족 누구에게나 통일될 때까지 지켜졌다.
    (단체 방문객도 신분만 확인하면 100마르크씩 받아갈 수 있었지만, 동독 공산당은 이런 배 아픈 꼴을 차마 못 봐서 그 경우에는 아예 신분증을 단체로 동베를린에 압수해 두었다.)
    동독은 어차피 연금생활자는 돈만 축낸다고 보고 설령 그들이 서독에 눌러 앉더라도 괜찮다고 보았다. 과연 그들뿐 아니라 1972년부터는 연금 생활자가 아니더라도 당국의 허가를 받으면 일시적 서독 방문은 가능했는데, 그들은 99.5%가 되돌아갔다.

      이산가족상봉이랍시고 수십 년 동안 몽땅 다 합해야 1천 명도 안 되는 것을 신문방송이 그 때마다 심봉사 부녀가 용궁에서 해후라도 하는 듯 특집의 특집으로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북한 주민이 김일성 왕가의 허가를 받고 매년 1백만이 아니라 지난 60여년 동안 단 100명, 아니 단 10명이라도 한국에서 한 달간, 아니 일주일, 아니 하루라도 마음대로 돌아다닌 경우가 있는가.
    김일성 왕가는 스스로 독재의 독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기 때문에, 감시자가 없으면 독재의 만행이 귓속말로 전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런 선심은 상상도 못한다. 단 한 명의 자유왕래는커녕 동서독 주민이 거의 마음대로 주고받았던 각각 연간 1억 통에 달했던 편지와 전화조차 단 한 통도 주고받지 못하게 했다.
    저 악독하던 일제(日帝)도 편지와 전보와 전화는 막지 않았다!
    김일성 왕가와 친북좌파가 그렇게 자랑하는 <6.15선언>과 <10.4선언> 후에도 무력도발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자유왕래는 단 한 건도 없었고 편지와 전화도 평양의 허가 하에 주고받은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탈북자가 몰래 전화하는 것만 가능할 뿐이다. 가짜 탈북자 유가강처럼 탈북 후에도 북한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동독 주민과 북한 주민도 전혀 달랐다.
    계몽주의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미 대대로 맛 본 동독 주민을 동독 공산당이 감시와 통제만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왕조시대와 식민지 경험밖에 없었던 북한 주민은 공산당의 세뇌작업과 무단통치에 벌벌 떨며,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인 줄 알고 공산봉건독재에 순치(馴致)되었다.

      셋째는 한국과 서독의 공산당 다루기 또는 모시기가 판이했기 때문이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서독은 자유통일에 대한 견해가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독일의 자유통일을 흡수통일이라며 준비 안 된 통일이라며, 김영삼 정부 때부터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소수의 여론을 주도하던 자들이 악을 쓰고 거짓 선동하고 반대하면서부터, 다수의 국민이 덩달아 정말 그러면 큰 일 날 줄 알고 시큰둥 반대하면서부터 자유통일에 너도나도 고춧가루를 뿌리면서, 통일의 주도권은 김일성 왕가에게 넘어갔다. 그것을 이름도 그럴 듯하게 햇볕정책이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북한주민에게 자유민주 국가의 기본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당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연장하고 공고히 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자연히 북한인권은 금기어가 되어 버렸다. 1990년 이전의 아련한 상처 한국인권이 말기암 북한인권 대신 당장 죽을병으로 기획적으로 떠올려졌다. 자연히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것과 진 배 없는 탈북자는 쉬쉬하는 가운데 찬밥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배신자 소리까지 들었다. 위대한 수령(인간백정)을 배신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독은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몰랐지만, 사민당이든 기민당이든 동독 공산당이 아니라 동독 주민에게 이로운 정책만 고수했다. 그 중에 가장 빛나는 통일 준비 사업이 석방거래(Freikauf)이다.
    참고로, 프라이카우프에 대한 논문은 <동서독 정치범 석방거래 및 정책적 시사점> (손기웅 등 2008)이 빼어나다.

      서독은 1인당 평균 8천 마르크(DM)를 주고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총 31,775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모셔갔다. 총 23.7억 마르크가 소요되었다.

    이것은 교회 사업 B라고 해서 정부가 지출하되, 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대리자로 내세웠다. 교회 사업 B에는 이산가족을 동독에서 서독으로 영구히 이주시키는 사업도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동독 공산당도 양심이 있었는지 훨씬 싸게 불렀다. 같은 기간 이산가족은 총 85만 5130명을 이주시켰는데, 10.9억 마르크밖에 안 들어갔다. 교회 사업 A는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베를린 장벽 이후에는 동독 주민이 탈출하다가 모조리 사살된 줄 알지만, 천만에, 이처럼 정치범은 음으로, 이산가족은 양으로, 합해서 약 90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한 것이다. 베를린 장벽 이전에는 11년간 345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넘어갔지만(1945년부터 따지면 380만 명), 동독에 공산당 정권이 공고해진 후에도 이산가족은 눈물의 상봉 쇼에 동원되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주는 아니더라도 서독 여행은 1985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동독이 ‘인질’을 남기는 조건으로 여행 조건을 상당히 완화했던 것이다.

    1985년 66,000명에서 1986년 573,000명으로 약 10배 늘어났고, 1987년에는 120만, 1988년에는 220만 명으로 폭증했다. 한편 연금생활자의 서독 나들이는 1985년 160만에서 1987년 38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껑충 뛰었다. 1989년에는 동서독 합해서 무려 1천 만 명이 동서독을 오갔다. 사실상 1986년 무렵에 독일은 통일되었던 것이다.

    북한은 230개 지역 단위로 나눠져 있어서 2000만 북한 주민이 각 지역을 벗어나려면 신안의 염전 노예가 뭍으로 나가는 것보다 어려운데, 동서독은 동서냉전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던 1964년부터 연금생활자이긴 하지만 연간 100만 명 이상이 4주간이나 누구의 감시도 안 받고 소설 쓰는 기자의 눈도 피하여 서독에서 공산당의 노예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임을, 먼 훗날 통일조국의 국민임을 미리 체험한 것이다.

      1973년, 그러니까 헬싱키 선언 2년 전에, 동독은 서독 TV 시청을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이미 50% 이상 서독의 ARD, ZDF 채널에 넋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크게 인심 쓴 것이다.
    한때 김일성 왕가는 한국의 대학생 시위 장면을 보여 주다가 북한주민이 화면에 가득한 손목시계를 보고 쑥덕거리자, 더 이상 객기를 부리지 못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위선과 독선에 가득 찬 공산당의 철갑선은 서방의 TV 등 조작되지 않은 진실에 노출되면서 서서히 형성되는 거대한 민심의 바다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속절없이 뒤집힌다. 동독만이 아니라 소련과 동구도 그렇게 뒤집힌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 왕가는 물론 한국의 자유통일 알레르기파와 정반대되는 조치다.
    인적 교류 못지않게 중요한 통일 준비가 정보 교류인데, <6.15선언> 이후 상호비방 중지라는 명목 하에 북한의 김일성 왕가 찬양 방송은 한국에 마구 내보내고 대신 한국은 휴전선 진실 확성기도 라디오 진실 방송도 진실 풍선도 전면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평양의 방송과 신문은 얼씨구나 욕설과 막말과 저주를 마음대로 퍼부었다.

     
    서독은 피 같은 돈도 절대 동독 공산당에게 대범하게 건네지 않았다.
    서독이 동독에 건넨 물자와 돈은 총 219억 마르크(약 100억 달러)이지만, 정부가 지출한 것은 교통, 우편, 전화 등의 이용금에 83억 마르크, 도로공사 분담금 23억 마르크, 교회사업 B에 34억 마르크 등 141억 마르크를 철저히 인도적인 목적에 썼다. 교회사업 A에는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28억 마르크를 지출했다. 그 외 민간이 지출한 것도 비자 발급과 환전금에 한해 50억 마르크를 지출했을 뿐이다. 여기에 서독 방문자 개개인에게 100마르크의 환영금을 준 것은 제외되었다. 연간 100만 명만 잡아도 26년간 최소 26억 마르크는 지불했을 것이다.
    하여간 정부든 민간이든 동독의 공산당에게는 공식적으로는 한 푼도 안 주었다.

      한국은 어떤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던 63명을 ‘공화국 영웅’으로 아무 조건 없이 시리아보다 저주스러운 북한으로 보내 주었을 뿐, 천만 이산가족 중 단 한 명도 세계 10위권의 선진부국으로는 모셔오지 못했다. 음으로 양으로 달러도 100% 북한의 노동당에게 바쳤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직접 건넨 것은 단 1달러도 없다. 90% 이상 원천징수됨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떠받든다. 정적에 대해서는 50년 전의 아무리 사소한 것도 두고두고 탈탈 털고, 아니면 말고, 또 탈탈 털지만, 김일성 왕가의 내탕고로 90% 이상 바로 들어가는 것이 명확한 데도 이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범하다. 돈에 대해서 서독 사람들이 얼마나 쩨쩨하게 굴었던가, 하는 것은 철저히 감추고 219억 마르크라는 총액만 갖고 서독이 동독에 우리보다 훨씬 많이 퍼 주었다고 난리법석이다.

    처음에 동독 주민은 ‘우리는 국민(Wir sind das Volk!)'를 외치며 대대적인 평화시위에 돌입했다. 더 이상 공산당의 노예나 공산당의 로봇이 아니라며 서독 국민처럼 거주이전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소련을 비롯하여 동구 전역에 불어 닥친 자유민주 만세 운동의 일환이었다. 다른 동구처럼 동독도 감히 시위를 무력 진압할 수 없었다.
    서독은 이미 오래 전에 동독 주민의 민심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동독 주민은 ‘우리는 한 민족(비어 진트 아인 폴크! Wir sind ein Volk!)'를 외쳤다.
    서독의 자유민주 우산 아래 들어가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웠을 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서독은 재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독일의 재통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