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강토(疆土) 불멸의 전쟁영웅을 기리며!

    이현오 /객원기자, 칼럼니스트
  • 그 날이 잊혀 지지 않는 까닭

     지난 해 8월 어느 여름날. 제15호 태풍 ‘볼라벤’(BOLAVEN)이 제주도와 남․서해지방을 휩쓸고 지나가자마자 이번에는 강한 비를 대동한 14호 태풍 ‘덴빈’(TENBIN)의 영향으로 서울에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던 8월30일 서울 국립 현충원에서는 한 무리 노병(老兵)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타오르는 향불을 지켜보며 묵상에 잠겨 들었다. 추모제 자리였다.

     60년 전 동안(童顔)이었던 청년들은 어느새 쇠약한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쏟아내는 전투 무용담은 바로 엊그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함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날이 아직도 뇌리에 또렷한 것은 추모행사가 주는 여운도 여운이지만 추모제가 진행되던 그 시각, ‘덴빈’이 몰아치면서 내 고향 섬마을 오두막을 휘둘러 가옥이 반파됨에 홀로 고향집을 지키시던 어머니가 긴급 피난해야 했던 터라 더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 나는 현충원 장교묘역 한편에 위치한 ‘1950년도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 앞에 서있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참전용사들을 위시한 관련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단체의 초청을 받아 ‘50동우회 전몰 동우’ 추모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임들을 추억하고 기리며


     임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 큰 때문이었을까! 빗줄기는 어느새 폭우로 돌변해 있었다. 
    돌이켜 보면 1950년 6월25일 이후 이 강토 곳곳에서 북한군과 혈전(血戰)을 거듭한 아군 초급장교들은 가장 큰 희생과 값진 전사(戰死)로 조국의 제단위에 꽃다운 젊음을 바쳐야 했다. 전쟁 초기 소대장은 말 그대로 총알받이 소모 장교(?)였다. 오죽 했으면 전장에서 귓전을 스치는 총탄이 ‘쐐위’ ‘쐐위’하며 허공을 갈랐다고 했을까? 소-중대장 등 초급장교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다고 한다.

     하여 국방부는 전투현장에서 전투감각이 뛰어나고 우수한 자질의 고급하사관과 준사관 중 현장 지휘관의 추천을 받아 육군소위로 현지임관 시켜 부족한 초급지휘자(관)를 메꿔 전선에 임하게 했다. 그들이 바로 현지임관 장교(약칭: 현임출신)들이며, 이 날 현충원에서 추모제를 지내는 노병(老兵)들로 1950년 임관한 ‘50동우회’ 회원들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불법 남침으로 아군의 전선이 무너짐에 따라 195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6개월 동안 현지 임관된 ‘50동우회원’은 전투병과 1,932명을 포함해 모두 2,625명이 임관, 휴전 직전까지 단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 유리한 작전지역으로 이끌고자 ‘피의 능선’ ‘저격 능선’ ‘백마고지’ ‘금화지구 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피를 토하며 피와 땀과 눈물을 다 바쳤다.

     그 결과 전사 416명, 실종 123명, 부상 278명 등 3년에 걸친 전투손실은 817명. 전체 임관자의 3분의 1 희생이라는 살신성인으로 전사(戰史)에 길이 빛날 대한민국의 존재감이었으니, 이 땅의 진정한 영웅들이셨다.

     현임 동우 중에는 2012년 5월 국가보훈처에 의해 ‘5월의 전쟁영웅’으로 헌정된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 소위와 6·25 전쟁 중 우리 군(제7보병사단)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강원도 철원 ‘425 고지’ 전투를 이끌었던 김한준 대위가 군인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을 수상했으며, ‘50동우회’ 회원 전원이 무공수훈자로 훈장을 수상했으니, 이들이 6․25전쟁기간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켜 왔는가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고 조국을 지켜낸 이들 노병들에게 어찌 무공훈장 하나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 국가가, 후손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만 아직도 유해(遺骸), 흔적마저 찾지 못하는 아픔은 또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동네에서도, 지자체도, 국가도, 어른세대도, 미래의 주역 아이들에게 전쟁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어떤 밀알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이기도 하다. 말로 하는 보훈보다 실질적이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조금이라도 미소가 감돌게 하는 그 무언가가 진행되어야 한다. ‘필요조건의 복지’가 아닌 ‘필요충분조건’의 진정한  수혜가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평균연령 86세에 임관 2,625명 중 260여명의 회원만이 생존해 있다는 50동우회. 이 날참석자들은 20여명 남짓. 60년이 넘은 세월은 이 영웅들을 마냥 붙잡아 두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이천 호국원에서도... 

     같은 해 10월23일 가녀린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이리 저리 흔들리며 길섶을 곱게 물들이고, 마을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던 날, 그 날도 나는 경기도 이천 국립호국원 추모탑 앞에 서있었다. 100여명이 넘는 육군종합학교전우회 소속 할아버지 들이 차에서 막 내려 추모비 앞으로 들어섰다.
     이분들 역시 50동우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적의 포화에 스러져 가는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적진(敵陣)으로 내달렸던 6·25참전 유공자분들이었다.
    더러는 지팡이에, 어떤 분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전우들의 '충용비' 앞에 서서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곤 했다.

     이분들 처지도 비슷했다. 전쟁 초기 전시 긴급 증·창설에 따른 장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설립된 단기과정의 육군종합학교전우회(전시사관학교) 회원들은 1950년 7,288명이 임관해 조국의 방패가 되었다. 그러나 7천여 명의 노병들은 이제 1,300여 명에 불과하다고 전우회 민애자 과장이 귀띔해 준다. 그 날 할아버지 참전용사들의 붉어진 눈자위처럼 길가의 빨간 코스모스가  파란 가을 하늘과 대비되며 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전우여', 목이 터져라 그대 이름 불러봅니다!

     2013년 4월25일 서울에서는 금년 처음으로 국가보훈처와 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후원하는 6․25참전용사 추모행사가 ‘영도유격부대전우회’ 주관으로 서울 현충원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앞에서 열렸다. 고운 임들의 넋을 위무하기 위함에서일까, 이 날도 간간이 빗방울이 뿌려졌다.

     올해 처음 찾아간 현충원은 적막감과 고요가 함께 깃든 채 아늑함으로 감싸여 있었다.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은 빗기를 머금어서인지 더욱 청초하고 막바지 피어난 꽃망울을 자랑하듯 경내를 하얗게 물들인 벚꽃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꽃비가 되어 지나는 참배객들의 머리에도, 어깨 위도, 신발 위에 내려앉으며 ‘반가워 반갑다’ 를 연발하는 것만 같았다.

     마치 60여년 前 무너져가는 이 땅을 온몸으로 지켜내다 이름 모를 들녘과 산 능선, 골짜기 마디마다에서 스스로를 던져 조국을 구하고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꽃다운 호국영령들의 손길 마냥.

     어쩌면 애달픈 당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은 청춘이라는 특권의 구가도, 미래에 대한 꿈의 성찬도 그려보지 못하고 전쟁의 참화에 휘적대다 병적도, 군번도, 생사에 대한 확신도 예기치 못한 채 오직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포화(砲火)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 땅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의 수호신으로 우뚝 섰다.
  •  이 날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 앞에서 맞은 영도유격부대전우회의 2013년 전몰전우 추모제에는 당시 전사한 전우들과 생사를 같이 했던 20여 명의 전우들, 유격부대의 뒤를 잇는 특전사 부사관들이 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들의 당시 행적을 조명하고자 부산 KBS TV 방송 중계차도 나와 모습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아 작으나마 마음의 위로를 갖게 하기도 했다.

     대부분 6․25참전 유공자들이 그렇듯 이제는 80대 고령이 되어 운신의 폭도 짧을 수밖에 없다. 추모제가 거행되는 동안 그윽한 국화 향기와 향불 냄새가 전해지는 속에 제단을 말없이 지켜보는 20여명 유격부대 전우회회원들의 형언키 어려운 눈빛에서는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전하고 싶은 얘기들도 많아 보였다.

     정전(停戰)이 가까워진 시기, 부대 성격(적진에 잠입해 독립작전 전개 등)이 휴전에 부담으로 작용될 것을 우려한 당국은 1952년 12월 갑자기 부대를 해체, 부대원들은 병역 인정도, 어떤 경제적 뒷받침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어떤 귀환계획도 없이 북한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게릴라전을 펼치며 국군의 북진을 기다리던 770여명의 대원과 현지 입대자 수백명 대원이 행방불명 돼 귀환자는 26명 뿐 이었다는 사실이다. 뉘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들만의 恨이라 할 수 있으랴.

     통계에 의하면 130여만 6·25참전 용사 중 살아있는 유공자들은 20여만 정도. 그러나 이분들 또한 멀지 않아 ‘의로운 영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6․25참전 국가유공자’란 타이틀을 가슴에 안은 채. 그래서 나는 조금은 더 알겠다. 이 분들의 마음에 어떤 한(恨) 스러움이 담겨 있는지를. 영도유격부대전우회를 통해 조금은 더 생생해 진다.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한다. 어느 사회든 영웅(英雄)을 영웅으로 인정하고 받들지 못하면 결정적 순간 영웅배출에 실패하는 우(遇)를 겪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나는 보았다. 그 때 그 자리에서!

     다시 기억을 되돌아보고 싶다. 지난 2004년 12월 어느 휴일로 기억된다. 휭휭 대는 바람에 눈발까지 섞인 그 날은 매서운 강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을 휩쓸고 있었다. 그럼에도 300여 명에 가까운 참전노병들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러는 눈밭에 드러눕기도 했다. 1시간 이상 목청을 높였다.

    “우리가 이 추운 엄동설한에 나와 목청을 높이는 것은 돈 몇 푼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할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던 자랑스런 국가 유공자’라는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위급할 때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오직 나라위한 일념으로 전쟁터로 달려간 우리   참전노병을 국가가 이렇게 홀대해서야 되겠어요?”
  •  당시 인터넷 신문 기자로 현장을 취재 중이던 필자는 추위 때문에 입술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발음을 흘리면서도 기자를 향해 어느 참전용사가 내뱉은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6․25참전용사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시위집회였다. 어찌나 추웠던지 메모를 하려 해도 글씨가 써지지 않아 몇 개 펜을 교체하고,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아 카메라 셔터를 제대로 누르지 못해 애를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두번 집회․시위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6․25참전노병들은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그 때 그 할아버지의 한이 담겼음직한 소원이 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올해부터 참전유공자는 월 15만원의 참전수당을 받는다. 2011년 12만원, 2010년 9만원, 2006년 7만원, 2002년 5만원에서 올라선 액수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뿐인 생명에 구애치 않고 위급한 나라위해 충성을 다 바친 그분들이, 우리들 후손이 바라는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의 전부일까?

     국가보훈처가 선제적 보훈을 다하겠다고 팔을 걷어 붙였다. 지역단위로 군이 나서 장례지원도 하겠다고 한다.

     추모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현충원은 아침녘 우중충한 일기와는 전혀 다르게 봄 햇살이 찬란하게 피어나고, 푸른 잔디밭에서는 단체로 온 한 무리 중․고생들의 떠들썩한 외침과 병아리 빛깔 유치원생들의 재잘거림이 경내에 힘차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올해는 한미동맹 60주년, 정전협정 60년을 맞는 해다. ‘임이 간 길 호국의 길 우리 갈 길 애국의 길’ 표어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달이다.

    이현오(칼럼니스트 / 객원기자. holeek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