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5회 이승만 포럼>

    [깡통진보] 동영상
    [백년전쟁]의 왜곡-조작과 그 진실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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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을 한 달 여 앞둔 2012년 11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의 시사회를 시작으로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 두 편이 공개됐다.
    1편은 [두 얼굴의 이승만]이라는 제목으로, 또 한 편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업적을 전면 부정하는 내용으로 꾸며진 [프레이저보고서]라는 제목의 영상물이다.

    이 두 편의 [백년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고 <4․9평화통일재단>(인혁당사건 사형수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이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 제작됐다고 한다.

    이후 [백년전쟁]은 동영상 공유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려졌고, 지금까지 약 400만 명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영상물을 제작한 측에서는 5월 말까지 [프레이저보고서] 2부를 제작해 공개할 예정이라며, 2부에서 4부까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 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 정권까지 영화제목처럼 100년에 이르는 역사를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백년전쟁]을 제작한 감독으로 알려진 김지영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한 지상파 방송에 나온 이 전 대통령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지영은 이때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학계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백년전쟁]을 만들기 위해 2년 간 미 중앙정보부(CIA) 문서, 케네디 도서관에 있는 외교문서와 일본 극우파들의 전기까지 섭렵했다고 한다.

    이렇게 각종 문서를 섭렵한 결과물로 만들어진 [백년전쟁]을, 김지영은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김지영의 주장과는 달리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애국심과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목적 하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선전물이었다.

    [백년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친일파와 내전 중인 나라로 설정해 놓고 시작한다.
    그래서 이 영상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반일]이라는 이분법 아래 [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의 올바른 노선]이라고 역설한다.

    [백년전쟁]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세력은 친일파이고, 따라서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이승만은 악질 친일파여야 하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세력과 여운형 등은 저항세력 즉 반일세력으로 미화돼야 했다.
    그래서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악질 친일 정치 깡패-모리배]로 만들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실체를 밝히겠다며 13개의 사례를 제시했다.
    그 중 12개의 사례는 가공된 조작물이었고, 1개의 사례는 지나치게 왜곡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7개 사례를 골라 관련 자료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1. CIA 문서


    출       처 : 1948년 10월 28일자로 작성된 미 중앙정보국 문서
    문서 제목 : 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Appendx A : Personality of Rhee Syngman
                
    [백년전쟁]의 주장 :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의 인격’이라는 CIA 문서 부록의 두 번째 문단을 인용하여 이승만을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앞 뒤 문맥을 잘라내고 관련 부분의 영어원문만을 떼어내 지나치게 왜곡되게 해석했다.
    [백년전쟁]에서 잘라낸 앞 뒤 문장을 함께 해석하면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He tends, however, to regard the best interests of Korea as synonymous with his own. It is as if he, in his own mind at least, were Korea.
    “Rhee has devoted his life to the cause of an independent Korea with the ultimate objective of personally controlling that country. In pursuing this end he has shown few scruples about the elements which he has been willing to utilize for his personal advancement, with the important exception that he has always refused to deal with Communists. This accounts for the fact that Rhee has become the symbol of anti-communism in Korean mind.”

    “그러나 그는 한국에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은 자신에게도 가장 이익이 되는 것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 자신이 곧 한국(Korea) 인 것처럼 생각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평생을 바쳤는데, 궁극적으로는 그가 그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의 성취를 위해 활용할 마음이 있는 세력들이 누군가 하는데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단 중요한 예외가 있는데, 그는 절대로 공산주의자들과는 손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승만이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반공주의의 상징이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글은 이승만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만,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 "이승만의 박사학위는 엉터리"


    [백년전쟁]의 주장 :
    이승만의 박사학위는 실력이 아니라 미국 기독교계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백년전쟁]은 개인의 인생관에 변혁을 일으킬만한 기독교 개종이라는 획기적인 전환 사건마저도 비난의 도구로 활용했다.
    미국 기독교계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이 그 기회를 이용해 미국 유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디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도미(渡美)길에 올랐다는 내용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백년전쟁]에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과정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승만은 학업능력이 부진해 하버드에서 석사도 마치지 못했으나, 미국 장로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프린스턴 입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것도 한국의 원주민 교역자를 프린스턴대학에서 배출한 것으로 하려는 의도라고 폄하하고,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학위취득일자 : 1910년 7월
    지도교수 : 에드워드 엘리엇(Edward Elliott)
    학위취득학교 및 전공분야 :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논문 제목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출판일자 및 출판사 : 1912년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

    이 논문은 “전쟁 중에 중립국의 배와 화물을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원칙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전쟁이 벌어지면, 적국으로 가는 중립국 배를 마구 침몰시키고 약탈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승만은 중세의 신성 로마제국 이래 19세기 말까지의 변화를 정리하면서, 이 같은 난폭한 관행에 쐐기를 박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미국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점에 있어서 세계 최초였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전적 저서로 꼽히는 것은 닐스 오빅(Nils Orvik)이 쓴 『1914년에서 1941년 사이에 발생한 중립성 원칙의 쇠퇴』(The Decline of Neutrality 1914-1941)라는 책이다.
    오빅은 여기서 이승만의 논문을 여러 번 인용한다.
    그만큼 이승만의 논문은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건국의 예언자 이승만』에서 인용)



    3. "이승만은 악질 친일파"


    [백년전쟁]의 주장 :
    이승만은 기회주의자이며 악질 친일파이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백년전쟁]에서 이승만을 미국의 주류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자신이 권력에 접근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힘을 가진 세력이 친일 성향을 보이면 그것에 자신의 생각을 맞춰나가는 [기회주의자]로 평가했다.

    [백년전쟁]은 더 나아가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은 때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극찬하며 미국의 비위를 맞췄고, 한국인들과 있을 때는 반일 의식이 강한 교육자로 변신하는 이중 플레이를 통해 하와이 한인사회 지도자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서중석 교수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백년전쟁]은 1916년 10월 16일자 <호놀룰루 스타블레틴>지의 이승만 기고문과 올리버 박사가 쓴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에서 <워싱턴 포스트>지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이승만을 악진 친일파로 몰았다. 


    ※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지 기고문

    출처 :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Honolulu Star-Bulletin)지
    게재일자 : 1916년 10월 16일
    기사 제목 : Dr. Rhee Denies that Korean School Teaching 'Anti-Japanese'

    [백년전쟁]은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지 편집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승만 기고문의 첫 문장만을 떼어내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오해는 빨리 풀수록 좋다.”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했다.

    1.)We do not teach in our school anything anti-Japanese. We are teaching, on the contrary, the Christian principle of loving all mankind. Our American teachers are missionaries, at least In their sympathy, and they are too cosmopolitan to teach anything against any race or any particular nation.
     Our Korean teachers have no time to teach anything but the course of study that is laid out for all the Korean children. I. myself, am too busy with other duties to teach any class at all. If I am misrepresented to the local Japanese papers, want  them to know that I do not wish to create any anti-Japanese sentiment among our people, nor do I wish them to publish any anti-Korean statements  in their papers or in any other paper.
    3.) …I beg to add one word here. If the Japanese people really wish to be friendly toward the Koreans, either In their homeland or abroad, they must remember that Koreans as a race must –have certain unalienable rights, among which are life, liberty and pursuit of happiness.

    “우리 하와이 한인학교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일체 가르치지 않는다….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어느 특정 인종 혹은 민족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세계 시민적인 사람, 철저한 코스모폴리탄이다”


    기고문의 ‘do not teach anything anti-Japanese’는 “일본 국가에 대한 반대를 일체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인, 특히 하와이의 일본계 이주민에 대한 증오를 일체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만일 나에 대해 현지 일본신문에 잘못 전해졌다면, 나는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 반 일본인 정서를 만들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기사나 또는 다른 어떤 기사에도 한국인을 증오하는 글들을 출판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이승만의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만약 본토에 사는 일본인, 혹은 해외에 사는 일본인들이 진정으로 한국인과 친근하게 지내길 원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생명, 자유, 행복에 관한 원천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 ‘워싱턴 포스트’지 인터뷰 기사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일합방] 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워싱턴포스트>지를 포토샵으로 처리해 보여줬다.

    그런데 놀랍게도 1912년 12월 2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Korea Christianizing the East"라는 제목의 이승만 인터뷰 기사가 있다.
    그러나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없었다.

    올리버의 『이승만 전기

    출처 :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
    저자 :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출판일자 및 출판사 : 1954년, Dodd, Mead And Company
    번역자 : 황정일
    번역본 출판일자 및 출판사 : 2002년, 건국대학교출판부

    [백년전쟁]은 올리버 박사가 언급한 이승만의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 인터뷰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백년전쟁]은 올리버 박사가 쓴 <이승만전기>의 특정 부분을 인용했다.
    그리고는 이승만이 미국 신문에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한 것처럼 포토샵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편집했다.

    그러나 올리버 박사의 <이승만전기>에도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없다.
    건국대학교에서 번역 출판한 <이승만전기> 138쪽의 해당 부분은 “한국은 3년 만에 인습에 젖어 늘어졌던 나라에서 활기차고 북적대는 산업의 고장으로 변모했다.…외양상 서울과 신시내티는 거리 사람들의 피부색 말고는 구분이 안 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2009년 서정락 박사가 발간한 또 다른 번역서인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관련부분은 “불과 3년 동안에 전통적인 인습으로 느리게 걸어가던 나라가 산업주의 본고장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성은 신시네티시와 살고 있는 사람들과 피부빛을 제외하고는 다를 게 거의 없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어디에도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없었다.

    다음의 올리버 박사의 <이승만전기> 원문의 해당부분이다.

    PEDAGOGICAL POLITICS 121


    While Rhee was in Washington, in mid-November, the Washington Post sent a reporter to interview him at the Wil-lard Hotel, where he was staying. The story, appearing in the November 18 issue, represented Rhee's best efforts to be conciliatory and to avoid any charge of trouble-making. Its tone is sufficiently well indicated by the following typical excerpt: “Within the space of three years Korea has been transformed from a slow-going country where tradition reigned into a live, bustling center of industrialism . . . Seoul can hardly be told nowadays from Cincinnati except for the complexion of its inhabitants.” Obviously, he was trying as hard as he could to avoid trouble with the Japanese author-itiesprobably uncertain in his own mind of just what course he could or should pursue.

    <워싱턴 포스트>지 아카이브 및 미의회도서관, 미국 신문 검색 사이트 등 고신문 검색이 가능한 모든 사이트를 검색했으나,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올리버 박사의 착오]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에 도달했다.



    4. "일본감옥에 갔었다는 거짓말"


    [백년전쟁]의 주장 :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일본감옥에 갔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안중근과 같은 독립투사로 보이기 위해 손끝에다 입김을 부는 괴상한 행동을 했고, 하와이 한인들이 궁금해 하면 “내가 일본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아직도 손끝이 시리다”라는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백년전쟁]은 그 이유를 하와이 한인들이 자신을 추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이승만이 일본에 의해 감옥에 갈 이유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이승만을 박해해야 될 이유도 전혀 없다고 했다.
    그것은 단지 일본의 고문을 이겨낸 독립투사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려는 시도였고,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서중석 교수 역시 이승만은 한일합병 이후 기독교 관계로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 나갔을 뿐이며, 고종황제 때 감옥살이는 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거짓말로 포장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프린스턴 출신 박사가 하와이에 정착하기 위해 들어온 사실만으로도 하와이 사회에서는 큰 이슈였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애드버타이저>(The Commercial Advertiser)지는 1913년 9월 29일자 일요판에서 “한국의 선구적 편집인 겸 발행인, 호놀룰루 학교 교사”라는 제목으로 이승만이 한인기숙학원 교장이 된 사실을 1면 전면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기사에는 이승만의 독사진, 한성감옥에서 옥중동지들과 찍은 사진, 서울YMCA의 성경반 사진과 이승만이 편집했던 1898년의 <협성회회보> 사진이 실렸다.
    <애드버타이저>지는 이승만이 한국의 개혁을 위한 젊은 혁명가로서 감옥에서 겪은 고초를 소개하고, 한국에서 최초로 신문과 주간지를 편집 발행했던 사실을 강조했다.

    이어 미국의 세 명문대학에서 수학한 사실을 소개하며 이승만의 친한 친구 가운데는 윌슨 대통령과 루즈벨트 같은 사람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위대한 작은 박사가 하와이 한국인들의 교육을 맡도록 초청되어 와서 자신의 교육기관을 발족시켰다고 썼다.

    이 기사를 본 한인들은 ‘위대한 작은 박사’가 자신들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들의 자녀를 이승만에게 맡겼다.



    5."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빙자한 횡령범이다"


    [백년전쟁]의 주장 :
    이승만은 피 튀기는 테러까지 동원하며 국민회를 장악했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한다며 국민의 재산들인 여학생기숙사, 에마기지(한인여학원), 한인여학교와 남학생기숙사를 담보로 대출 받아 챙기고, 마지막에는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의 재산들을 전부 매각해 목돈을 챙겼다.
    징역 7년 이하의 형에 처해지는 독립운동을 빙자한 죄질이 나쁜 횡령범죄행위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미주지역 최대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처이자 박용만을 지지하는 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법정투쟁은 물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테러도 불사했다고 주장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테러리스트로 각인시키기 위해 이승만 반대세력인 유동면의 딸 미니 유를 인터뷰에 등장시켰다.
    그리고는 “이승만이 당신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라고 질문한 후 “이승만이 한 짓인가요?”라며 재차 유도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1963년 국민회 회장을 역임했던 김영배의 아들 에드워드 김을 등장시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국민회로 들어오는 자금이 탐이 난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테러를 부각시키고, 국민회 자금을 횡령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 여학생기숙사

    [백년전쟁] 주장 :
    한인들이 모아준 여학생기숙사 건립기금으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바로 그날 부동산 원 소유자에게 $1,400(연 이자 8%, 1년 내 상환 조건)을 대출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1년 후 그 빚을 국민회에 떠넘겼다.

    이승만은 한인 동포들의 성금으로  $2,400에 땅을 구입하고(Book 408, pp. 308-309: 7. 14. 1914) $1,400의 대출(연 이자 8%)을 받아 건물을 증축했다.(Bureau of Conveyances, Book 411, pp. 222-224: 1914. 7. 14) 
    구매자는 이승만으로 되어있는데, 한인중앙학교가 하와이 감리교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한인 동포들의 성금이 하와이 감리교재단에 귀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1년 후 이 빚을 국민회에 떠넘겼다고 주장했다.
    1915년 7월 국민회가 이승만에게 에마기지를 양도한 것을 두고 빚을 떠넘겼다는 것이다.

    1918년 5월 17일 이승만은 이 땅을  P. E. R. Strauch에게 $1,600에 팔았다.
    (Book 488, p. 241, 5/17/1918)

    ※ 에마 기지

    [백년전쟁] 주장 :
    국민회 재산인 한인여학교를 단돈 $1에 인수한 갱스터

    국민회는 한인여학교를 소유하거나 운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백년전쟁]은 한인여학교를 국민회 재산이라며, 이승만이 단돈 $1에 한인여학교를 가로챈 것으로 표현했다.
    [백년전쟁]이 국민회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한인여학교는 국민회가 구입해 놓았던 에마기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승만이 한인여학교를 $1에 인수했다는 표현 은 사실과 다르다.
    [백년전쟁]은 에마기지를 가지고 고약한 장난을 쳤다.
    [백년전쟁]의 주장대로 이승만이 빚을 국민회에 떠넘겼고, 국민회는 이승만에게 빚을 갚으라고 에마기지를 주었다면, 단돈 $1에 에마기지를 인수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국민회는 1914년 1월 12일에 열린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이 기지를 여학생기숙사를 위해 기부하기로 결정했었다.
    이때는 이승만이 여학생기숙사를 위해 모금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승만에게 에마기지를 양도한 것은 1915년 7월이다.
    국민회가 이승만에게 양도한 에마기지는 1913년 5월 7일 국민회 총회장 김종학과 재무 홍인표가(박용만 지지파) 구입했다.
    이 기지는 총회관, 신문사, 교회를 짓기 위해 구입한 페리 단지(Perry Tract)의 3택지(#12~#14)로 $2,549의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아 매달 $120의 이자를 무는 조건으로 $3,049.53달러에 구입했다.(Bureau of Conveyances, Book 388, pp.349~351, April 3, 1914)

    국민회가 1914년 2월과 3월에 에마기지의 월부금을 물지 못하자 담보대출 관계자는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의 지불 금액을 탕감해주는 대신 연간 이자를 7%에서 8%로 올렸다.(Bureau of Conveyances, Book 406, pp. 74~75, April 3, 1914.)

    그러나 1915년 국민회에서 갚아야 하는 이자를 또다시 갚지 못해 담보대출 회사에서는 에마기지를 매각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회 행정임원들은 이승만과 합의하여 한인여학원이 에마기지를 인수하도록 한 것이다.

    국민회는 이 기지를 이승만 개인이 아닌 한인여학원 이사 이승만에게 형식상의 액수인 $1에 양도했다.(Bureau of Conveyances, Book 415, pp. 379~380, July 27, 1915.)

    그러므로 이승만이 $1에 한인여학교를 인수했다는 [백년전쟁]의 주장은 비논리적이다.
    [백년전쟁]의 주장대로라면 에마기지가 곧 한인여학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원용은 “일찌기 국민회가 교회사업을 위하여 매득하여 두었던 에마기지를 자기에게 주어서 교육사업에 쓰게하라고 하였다.”(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p. 138)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국민보’에 이승만이 국민회에 기지를 기부하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나, 이승만 개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문제가 된 기사는 없었다. 

    김원용이 만일 이 양도서를 보았거나 미국법을 이해했다면, 개인 이승만과 한인여학원 이사 이승만의 차이점을 이해했어야 하며, 이해했더라면 위와 같은 주장은 할 수 없을 것이다.(이덕희, 한인기독교회 한인기독학원 대한인동지회, 2008, p.250.)

    [백년전쟁]은 에마기지 양도에 얽힌 내막을 무시하고 이승만을 단돈 $1에 에마기지를  빼앗은 깡패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1918년 4월에 이 기지의 담보대출금 $2,549를 모두 상환하고(Bureau of Conveyances, Book 489, p. 202, April 26, 1918.) 4월에 #12 1택지를 마리온 실바에게 $750에 매각하고, 5월에 나머지 2택지를 $2,700에 매각했다.(Bureau of Conveyances, Book 498, p. 134, April 29, 1918. Book 488, p. 239 May 18, 1918.)

    ※ 한인 여학원 부지

    [백년전쟁]의 주장 :
    부동산 2개를 저당 잡혀 $4,250을 대출받아 챙겼다.

    한인중앙학원과 여학생기숙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했다.
    이승만은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1915년 7월 18일 푸우누이 애배뉴 기숙사 옆에 있는 2택지 3.5에이커의 땅을 매입했다.
    Lot #32(32,208 sq. ft) 매입금액은 $4,500(Book 458, pp.164-165: 1916. 7. 18), Lot #30(7,500 sq, ft) 매입금액은 $500이다.(Book 445, pp. 164-165, 1916. 7. 18)
    이 두 택지는 이승만이 구입자로 되어 있고, Lot #32를 위해 3년 상환으로 $4,250의 대출(연 이자 8%)을 받았다.(Book 459, pp. 66-69: 7/18/1916)

    이 부지의 구매자는 이승만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아직까지 학교법인이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개인의 이름으로 구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지는 선금으로 $500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대출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부지의 대출금은 이승만 개인의 부채가 된다.

    여학생기숙사 확장을 위해 이 부지를 매입했으나, 이승만은 이곳에 단층 건물을 짓고 가을 학기부터 ‘한인여학원’이라 부르고 자신이 교장직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회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아 $4,250의 돈을 챙겼다는 [백년전쟁]의 주장은 허위사실이다.

    ※ 남학생기숙사

    백년전쟁 주장 :
    남학생기숙사를 저당 잡혀 $3,500 대출받아 챙기고 마지막에는 남학생기숙사를 스트라우치에게 $1,600 매각해 목돈을 챙겼다.

    국민회는 1915년부터 남학생기숙사 건축을 위해 $7,000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1916년 11월에 국민회는 이승만을 한인남학생 기숙사 이사로 임명하고, 이 기금과 남학생기숙사 관련 문제를 이승만에게 일임했다.
    이승만은 1918년 초 남학생기숙사 신축을 위해 오션뷰 애비뉴에 있는 레아히농장 9.5에이커를 매입했고, 1922년 9월경 이 농장부지를 $11.600에 매각했다.
    [백년전쟁]은 하와이 법원 기록 그림을 보여주며 이승만이 남학생기숙사를 스트라우치에게 $1,600에 매각했다고 했으나, 그것은 여학생기숙사를 매각한 기록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법정자료> 해제는 “파리평화회의에 가려고 이승만이 본토로 출발하기 직전, 이승만과 당시 국민회 회장이던 안현경은 여학생기숙사로 사용되던 2개의 국민회 재산을 매각했다.
    이승만은 또한 한인사회의 기부에 의해 자기 명의로 구입했던 재산을 매각했다.
    이 돈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불일치는 오랫동안 한인사회 도의문제로 사라지지 않았고, 후에는 이승만에 대한 추가 불신의 동기가 되었다.”라고 기술하여 [박용만 지지파의 주장만을 반영]했다.

    이승만은 1904년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도미한 이래로 모든 영수증을 꼼꼼하게 챙겨놓았다. 1918년 1월 9일자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는 ‘Korean Support Their Own School’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인여학원의 재정기록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국민보>나 ‘공첩’을 통해 학교 재정 문제 등을 알리는 한편 재정보고서를 발행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런 자료들을 제대로 연구했다면, 박용만과 김원용의 주장에 대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여학생기숙사, 한인여학원, 에마기지, 남학생기숙사 부지를 모두 매각하고, 대출금은 정리했다.
    그리고 1922년 칼리히 지역에 36.53에이커(4,285평)를 $15,000에 매입하고, 하와이은행에서 $13,500의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았다. 
    1923년 7월, 이승만은 이 기금으로 칼리히 부지에 학교 건축을 시작하여 두 달 후인 9월 19일 <한인기독학원> 교사와 남녀기숙사 낙성식을 거행했다.
    학교 부지 담보대출금은 3번에 걸쳐 모두 상환했다.

    <한인기독학원>은 1947년 폐교되었다.
    여학생기숙사에서 시작된 <한인여학원>과 <한인기독학원>은 34년의 역사를 지켰다.
    이승만은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한인사회, 더구나 7,000명도 되지 않은 작은 한인사회에서 어려운 학교살림을 이끌어왔다.

    어렵게 한인들을 설득하고 미국인 친지들을 감명시키며 후원금을 얻어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학교시설을 세우고, 학교를 운영한 것은 이승만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승만은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사들의 월급은 지불했으나 자신은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
    <한인여학원>과 <한인기독학원>의 학비는 무상이었고, 기숙사비만 실비로 받아가며 200~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인기독학원> 졸업생 가운데는 한국으로 돌아가 활약한 사람도 있었고, 하와이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람들도 많았다.

    1950년 10월, <한인기독학원> 이사회는 부지 약 24에이커를 13만 8,500달러(2007년도 구매가치로 환산하면 약 270만 달러)에 팔고, 여자기숙사 시설(한인양로원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이 있는 땅 1.12에이커는 남겨 놓았다.
    칼리히 부지를 구입할 때는 36에이커였으나 중간에 학교 빚을 갚느라고 약 10에이커를 팔았기 때문에 1950년에 매각할 때는 24에이커였다.

    양유찬 이사장은 학교 설립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기금 사용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천이나 서울 근교에 미국의  MIT같은 공과대학인 한하대학을 설립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하대학교이다.
    인하대학교의 이름은 첫 하와이 이민선이 떠났던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염원대로 인하대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황무지와 같던 우리나라의 과학공업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6. "민족반역자"


    [백년전쟁] 주장 :
    이승만이 장악한 국민회 공금집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폭동이나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물로 고발했다.
    이때 이승만은 법정 증인으로 나와 미국 영토에 한국 군대를 만들고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1918년 1월, 박용만 지지세력은 재정 장부를 조사하면서 $1,800의 오차를 발견했다.
    이것은 모두 안현경이 관리했는데, 이 액수에는 소약국동맹회에 박용만을 보내기 위해 모금하고 남은 돈, 회관 방세 $4, 국민회 의무금, 도미유학생을 위해 본토에서 보내온 $400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정문제를 토의하다가 안현경 지지파와 반대파(유동면, 김성률, 김한경, 이찬숙) 간에 난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총회장 안현경이 반대파 4명을 고발하여 호놀룰루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법정사건으로 비화되어 동년 2월 재판이 시작됐고, 3월 8일 피고발인 4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승만은 무죄판결이 있기 전인 1918년 2월 6일과 2월 13일 <국민보>에 두 차례에 걸쳐 “소약국동맹회의와 재정”, “선동”이라는 표제로 박용만 지지파가 제기한 사안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기고했다.(국사편찬위원회,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1915~36년간 하와이 법정자료>’ “한국현대사자료집성 45”, 1999, 102-104쪽, 70-80쪽)

    박용만은 1918년 3월 19일자 ‘연합회공고서’에 “시국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재했다.
    박용만은 이 글에서 “이승만이 국민회 재무 직임을 가지고 공금을 잘 못 쓴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교정하려는 대의원들을 모함하여 경무청에 체포하고 재판한 것이 염치없는 일이다. 더욱이 재판석에서 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이 죄이고 국제 평화의 소란을 음모하는 것이니 조처하라고 호소한 것은 우리 동포의 애국정신을 변천시키고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라고 이승만을 신랄하게 질책했다.(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1959, 153쪽)

    김원용은 박용만이 쓴 “시국소감”의 내용을 한층 증폭시켜 “이승만이 살인 미수범 증인으로 재판정에 들어가서 체포된 대의원들을 모함하는데 그들이 박용만의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 국민군단을 설립하고 위험한 배일 행동으로 일본 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며 파괴하려고 음모하고 있는 무리들이며 이것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키어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이니 저들을 조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했다.(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1959, 151쪽)

    그러나 이승만은 법정 증인이 아니라 고발인 신분으로 출석하여 발언했다.(신한민보, “통곡할 하와이 한인의 재판사건”, 1918. 3. 28)

    국민군단은 초창기인 1917년 이전에는 하와이정부의 주의를 받지 않았다.
    박용만이 처음으로 주둔군의 주의를 끈 것은 1917~1919년 사이다.
    그 발단은 오아후섬 동남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것을 저지한 것이 계기였다.

    방선주는 하와이영토 주둔군 정보참모가 작성한 박용만의 신상조사 보고서를 해석하여 “1915년 일본공관이 박용만에 대하여 항의한 사건이 결국 하와이 정보당국이 그를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고, 농장주에 압력을 넣어 계약연장을 허락하지 않아 병학교를 말라죽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방선주, ‘박용만 평전’, 110쪽)

    하와이 고문서 도서관에는 Secretary of the Department of the Interior에게 보낸 국민회 그리고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에 관한 보고문(2장), Acting Secretary of the Department oof the Interior가 하와이 지사에게 보낸 서한이 소장되어 있다.

    보고문 내용은 일본대사관의 Secretary of the Japanese Embassy Matsuoka가 전한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일본정부는 일본 지배를 전복하고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려고 조직된 국민회와 국민회의 박용만이 조직한 200명의 군사학교에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문에 실린 내용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정부의 태도가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미국이 일본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한다”라는 협박조인 글이다.(이덕희, 하와이 대한민국민회 100년사, 2013, 96쪽 각주 192)

    미국정부나 일본 영사관 측에 의해 생산된 박용만 조사문건은 박용만과 김원용의 주장을 뒤엎는 내용이다.
    <법정자료> 해제는 “이승만은 살인미수범 증인으로 재판정에 들어가 이들이 박용만파벌로 일본군함 출운호의 호놀룰루 도착을 파괴·음모했다고 모함했지만,”이라고 기술했다.
    이승만이 살인미수범으로 증언했다고 했으나<법정자료>에 이 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박용만이나 김원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인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발행되던 <국민보>나 <신한민보>에도 김원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사편찬위원회는 <법정자료>에 “이승만이 신문에다 대고 박용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호놀룰루의 일본군함을 폭파시키려한다고 알린 것이 바로 이때였다.”라고 서술했다.
    박용만과 김원용의 주장만을 반영한 것이다.
    [백년전쟁] 또한 김원용의 주장을 원용해 이승만을 A급 민족반역자로 낙인찍었다.



    7. 맨법 위반사건


    [백년전쟁] 주장 :
    임시정부의 돈 줄을 장악한 이승만은 맨 법률(Mann Act) 위반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수사관들에게 체포된 후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맨 법률(Mann Act) :
    1901년에 제정된 법이다.
    원래는 인신매매를 단속하기 위한 법률이었으나 “for any immoral purposes…"(기타 부도덕한 이유)라는 애매한 독소조항이 하나 있었다.
    따라서 배우자, 가족이 아닌 여성과 주 경계를 넘어 함께 여행을 하면 입건할 수 있는 악법으로 정치 탄압에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애매한 조항은 Mann Act보다 2년 앞서 제정된 “이민법”에 포함되어 있던 문구이다.
    따라서 외국인이 Mann Act로 고발되면 ‘이민법 위반’으로 다뤄 사법처리 했다.

    [백년전쟁]은 이 사건을 매우 고약하게 왜곡했다.
    [백년전쟁]이 주장하는 사건의 전모에 대해 하나씩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자.

    [백년전쟁]에 의하면, 이승만과 노디김은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Mann Act 위반 혐의로 수사관에게 잡혔다.
    노디김이 아빠와 딸 같은 관계라고 사정했으나, 수사관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집중조사를 벌였고, 이때 이승만의 감추고 싶은 비밀들이 모두 탄로 났다.
    백인여자들에게 접근해 마치 재벌 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 수사관들은 이승만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하고 기소했다.

    이에 이승만은 일단 그 이유는 비밀이라고 둘러대고 대통령 환영회 불참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하와이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사정하여 호놀룰루로 이관됐으나,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비밀리에 백인 유력인사들과 접촉했다.
    이승만은 백인들의 보증으로 위기 상황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이승만의 도덕성을 철저하게 파괴하고자 작정한 [백년전쟁]은 이 같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 <사건의 전모>

    1920년 시카고 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던 여성 구타펠(Guthapfel)을 내보내자 이에 앙심을 품은 구타펠은 시카고 이민국에 이승만과 노디김을 고발했다.

    1920년 6월 22일, 시카고 이민국 책임자 Harry Landis Harry는 미국 서부지역과 텍사스 등 다섯 군데 이민국에 “가끔씩 얼굴을 부들부들 떠는 40대 한국인 이승만이, 오벌린 대학 재학 중이며 YMCA, YWCA, 교회 등지에 연설하고 다니는 22살 처녀 노디김(N. D. Kim)이라는 여자를 데리고 미국 각지를 돌아다닌다. 이는 Mann Act 법률 위반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1920년 7월 12일, Harry는 다시 미국 서부지역과 텍사스 여기저기 다섯 군데 이민국 지국에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정보원에 의하면 이승만은 일본의 첩자로 미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20년 8월 2일, Harry는 세 번째 편지를 보냈고, 이 와중에 정보원이 구타펠로 밝혀졌다.
    세 번째 편지는 이승만과 노디김이 IWW(무정부주의 국제 노동자 혁명조직) 혹은 그 비슷한 조직과 연결된 한국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며 샌프란시스코 휴즈 빌딩(Hews Build.) 419호에 가서 '강 박사'(Dr. L. S. Kang)를 만나면 모든 정보를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신한민보> 사무실은 휴즈빌딩 414호실)

    1920년 8월 9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은 하와이 지국으로 “만약 이 정보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승만과 노디김에게 본토로 여행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들을(일본으로) 추방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당시 하와이는 정식 주(state)가 아니라 변경주(territory)였으며, 하와이 이민자가 본토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920년 8월 27일, 하와이 이민국 Richard Halsey는 이승만과 노디김을 정중하게 불러서, 노디김으로부터는 진술서를 받고 이승만과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세 페이지에 걸친 ‘조사 결론 보고’를 샌프란시스코 헤드쿼터로 보냈다.

    Richard Halsey는 보고서에 이승만과 노디김의 혐의에 대해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저는 이박사와 노디김 양에게,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예우로서 대하는 것이 저의 직업상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에 관한 의심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이상이 ‘백년전쟁’이 주장하는 맨 법률 위반 사건의 전모다.
    맨법 위반 사건은 구타펠에 의해 고발된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허구로 조작된 사건이다.

    [백년전쟁]은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이승만과 노디김의 사진을 합성해 머그샷을 만들었다. 머그샷을 위해 사용한 사진은 유영익 교수가 쓴 <이승만의 삶과 꿈> 160페이지와 172페이지에 수록된 사진들이다.

    지금까지 [백년전쟁]의 거짓과 왜곡을 관련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 대통령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생산한 이승만 관련 사료조차 왜곡 투성이였다.

    과거는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말을 상기할 때,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단절된 시대이거나 또는 애써 단절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