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5> 보위과장


    무언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지원은 낯선 사무실의 소파 위에 있었다. 옷이 벗겨진 채로 얇은 담요 한 장만 덮혀 있었다. 순간 치욕스런 담화실에서의 일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라 억센 힘으로 심장을 쥐어짰다. 잠시 후 지원의 찡그린 눈에 들어온 사람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한줄기 빛처럼 고맙게 느껴지던 보위과장이었다.

    “으으으. 죄송합니다, 과장 선생님. 제가 어떻게…….”
    “아니오, 일없소. 이제 정신이 좀 드오?”
    “예, 과장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아까 담당보위원에게 따끔하게 주위를 주었소.”
    “일없습니다. 당과 조국의 따뜻한 은혜와 배려를 잊고 스스로 인민의 적이 되었으니 제게 더한 고통이 닥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예.”
    “출신성분은 열악하지만 당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강하구만. 그래 동무이름은?”
    “반동 윤지원입니다.”
    “윤지원이라, 윤지원. 흠…….”

    보위과장은 담당보위원과 느껴지는 분위기부터 확연히 달랐다. 한마디로 지원이 평양에서 보던 엘리트계층의 냄새가 물신 풍겼다. 정치범 신분인 자신을 배려하는 온화한 말씨는 어딘지 모르게 아바지 윤일현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물에 갇혀 절망적일 때 어미대신 나타나 큰 꼬리를 휘둘러 위기로부터 구해준 정의로움은 단순한 고마움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담당보위원에게 한차례 고통을 당한 지원으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윤지원 동무?”
    “예, 말씀하십시오. 과장 선생님.”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동무의 아바지 이름이 어케 되오?”
    “당과 조국의 반역자이며 인민의 적인 저의 아바지 이름은 반동 윤일현입니다.”
    “윤일현!”
    “예.”
    “윤일현이 정말 확실하오?”
    “확실합니다, 과장 선생님.”
    “그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나오고 중국에서 외화벌이를 하던 그 윤일현 동지 맞소?”
    “맞습니다, 과장 선생님. 그런데 어떻게 반동인 저희 아바지를…….”

    뜻밖이었다. 보위과장은 잠시 침통한 얼굴로 이마를 매만지더니 갑자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보위과장의 얼굴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물처럼 얽혀 있었다. 보위과장의 그런 표정을 보는 순간 지원의 마음 한쪽에선 고뇌의 이유보다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윤지원 동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절대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옮기면 아니 되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과장 선생님.”
    “좋소! 사실 난 동무의 아바지 대학 후배요. 그리고 오마니 성혜경 동무는 내 대학 동기생이오. 아바지는 리더십도 강하고 정의파라서 모든 학우들의 우상이었소. 더구나 나한테는 동기들에게 부탁해 좋은 사업소까지도 알아봐 주었소. 그런데 어느 날 선배가 국가전복죄를 지어 당에서 축출됐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물론 난 그것이 사업 중에 발생한 착오라고 믿소.”
    “맞습니다, 과장 선생님. 저희 아바지는 결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남조선으로 도주한 오마니와 쌍둥이 동생 때문에 윤 선배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 같소. 세상일이란 참! 그 아름답고 총명하던 성혜경 동무가 중국에 파견된 남조선의 대기업 반동과 부화사건을 만들 줄이야.”
    “!”
    “더구나 우리 국가안전보위부 해외반탐반 동무들의 조사내용에 의하면 그 반동이 남조선 국정원의 쁘락지라고 하던데, 아마도 우리 공화국의 해외사업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오마니에게 접근했을 것이오. 하지만 아무리 사탕발림을 하더라도 어떻게 멀쩡한 남편과 금쪽같은 혈붙이를 생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지, 쯔쯔쯔.”
    “…….”
    “그래, 아바지는 지금 완전통제구역에 있소?”
    “아닙니다.”
    “그럼 다른 관리소로 옮겨갔소?”
    “그것도 아닙니다. 작년 여름 큰비가 내리던 날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아니, 어쩌다가…….”
    “외부경계선의 고압전기철조망에 스스로 감전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셨으면 그랬을까.”

    오마니가 부화를 했다는 사실은 심장이 멎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왜 황급히 남조선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도 설명됐다. 이제 남조선으로 도주한 오마니와 지수에 대한 지원의 적개심은 보다 큰 정당성을 갖게 됐다. 그때 보위과장이 지원의 시커먼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그리고는 측은한 시선으로 위로했다. 지원이 심리적 안정을 되찾자 보위과장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가 불을 붙인 지포라이터는 반유광의 은색으로 경첩 부분이 밖으로 노출되고 두께가 제법 두꺼웠다. 하지만 앤티크한 제품 특유의 멋스러움이 은은하게 새어나와 마치 골동품 같았다.

    “히~유!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선배를 찾았더라도…….”
    “…….”
    “아마 선배도 죽으면서 억울하고 분해서 제대로 눈도 못 감았을 것이오.”
    “…….”
    “그래, 지원 동무. 지금 당장 동무에게 필요한 게 뭐요?”
    “필요한 거 없습니다, 과장 선생님.”
    “괜찮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하시오. 윤 선배에게 받은 은혜를 그 혈붙이에게라도 되돌려주어야 나도 이다음에 선배를 떳떳이 뵐 게 아니겠소. 아니 그렇소?”
    “…….”
    “마음 같아서는 내 지금 당장이라도 동무를 관리소에서 빼내주고 싶소. 하지만 윤 선배에게 붙은 죄명이 하도 엄청나 그럴 수도 없고…….”
    “아닙니다, 과장 선생님. 괜히 저 때문에 과장 선생님이 과오를 범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오. 그 선배에 그 딸이오.”
    “아바지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걸 알면 아바지도 고마워하실 겁니다.”
    “아참! 마침 내 방 청소당번이 한 명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동무가 하는 게 어떻겠소?”
    “예! 제가요?”
    “그렇소. 동무가 보다시피 뭐 딱히 정리할 것은 없고 일주일에 두 번씩, 그러니까 월요일과 목요일에 와서 간단히 책상정리와 바닥청소만 하면 되오. 그리고 정히 피곤하면 남들이 안 볼 때 저기 꽂힌 혁명서적을 읽던가.”
    “정말 감사합니다, 과장 선생님.”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겠소. 그리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오.”

    다시 돌아온 보위과장의 손엔 지원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 하던 동복 한 벌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경비대원들이 입다 버린 누더기 옷이 아니라 손이 타지 않은 새 옷이었다. 그리고 관리소 내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향기로운 비누와 봄 크림 한 통, 거기다 관리자나 신는 지하족(地下足·노동화)도 한 켤레 들려 있었다. 지원은 도무지 그것들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자 보위과장이 갖고 온 인민소비품을 반강제로 떠넘기듯 지원의 가슴에 덥석 안겼다.

    “사무실을 나가다 혹시라도 보위원이나 경비대원을 만나면 이렇게 대답하시오. 작은 소리로 오늘부터 내 정보원이 됐다고 말이오.”
    “과장 선생님,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좋소!”
    “혹시라도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알겠소. 내 일이 있으면 동무를 꼭 찾겠소.”

    보위과장의 방 청소담당이 된 지도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지원이 순번인 날은 보위과장이 아무도 몰래 과일이나 강냉이국수 같은 먹거리와 인민소비품을 챙겨주었다. 덕분에 지원은 그날 이후로 관리소생활이 예전처럼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담당보위원의 비위를 맞추느라 툭 하면 주먹질을 해대던 작업반장도 지원에게만큼은 짜증과 욕설로 끝냈다. 그런 변화를 눈치챈 다른 정치범들은 시기와 질투의 시선까지 보냈다.

    “통계원 동무, 혹시 과장 선생님 못 보셨습니까?”
    “못 봤는데.”
    지원도 작업반마다 있는 통계원과 확인원이 담당보위원의 정부(情婦)이자 정보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음탕한 짓거리나 정보원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정치범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지원이 속한 남새분조는 탈곡장 근처의 밭뜰에서 김매기사업을 했다. 오후 2시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다른 반 보위원이 지원을 찾았다. 얼른 달려가 정자세를 취하자 보위과장이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지원은 비록 청소하는 날은 아니었지만 보위과장이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달음에 분주소로 뛰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지원이 책장 앞을 서성이다 책을 빼들었다. 북한 추리소설인 『찔레꽃』이었다.
  • “쾅!”
    “어라! 이 돼지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있는 거라!”
    “보위원 선생님, 과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보위과장님은 아까 전에 경비대 참모장님의 부름을 받고 가셨는데. 가만! 돼지년, 너 뒤에 숨긴 게 뭐라? 책 아니니?”
    “!”
    “오늘 아주 잘 걸렸다! 감히 너 같은 돼지년이 책을 봐. 책을 봐서 뭐하려고?”
    “전 단지……. 잘못했습니다, 보위원 선생님.”
    “혹시 남조선으로 도주하려는 거 아니가. 날래 말하라?”
    “절대 아닙니다, 보위원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기름을 바른 것처럼 빤지르한 네 말본새를 보고, ‘아! 이년이 언젠가 사고를 칠 년이구나’ 하고 한눈에 알아봤지.”
    “보위원 선생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았습니다.”
    “내 그동안 보위과장 동지 방의 청소담당이라 눈꼴시어도 두고 봤는데 이젠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보위원 선생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겉표지의 그림만 봤을 뿐입니다.”
    “야! 계호원(교도관)! 계호원! 밖에 아무도 없어?”
    “예, 보위원 동지.”
    “이 돼지년 구류장으로 날래 끌고 가라!”
    “보위원 선생님, 제발 보위과장 선생님 좀 만나게 해주십시오.”
    “만나면 만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그게 저, 그러니까…….”
    “정치범이 자기 사무실에서 책을 보도록 방치했다면 보위과장 동지 역시 출당(黜黨)은 물론이고 철직(撤職)될 수도 있어.”
    “…….”
    “계호원, 날래 끌고 가라!”

    모든 불안한 상황이 빛의 속도로 일어났다. 당사자인 지원조차도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정말 쇠심줄보다도 질긴 악연이었다. 하지만 지원은 자신 때문에 보위과장이 철직될 수도 있다는 말에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계호원이 주머니에서 천조각을 꺼내 지원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지원의 한 팔을 뒤로 꺾은 다음 머리채를 뒤로 당겨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그렇게 걸어갔을까. 지하 공간 특유의 한기(寒氣)가 심장까지 얼어붙게 했다.

    “야! 눈 풀어주라!”
    “예!”
    “돼지년아, 너 여기가 어딘 줄 아니?”
    “…….”
    “바로 구류장이야. 계급적 원수를 가려내는 심판장을 말하지. 크크크.”
    “보위원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습니다.”
    “읽었든 안 읽었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니 가슴 저 깊은 곳에 숨겨놓은 변절의 마음이야! 감히 배신할 생각을 품어.”
    “절대 그런 마음 품은 적 없습니다, 보위원 선생님.”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 품었는지 안 품었는지 내가 한번 알아보지. 야! 계호원! 다시 이 돼지년의 눈을 가리라! 그리고 저 철창에 수갑을 채워 매달라!”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하지만 지원이 휘둘러본 구류장의 고문실은 보위원의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육감까지 지원의 모든 감각이 가리키는 건 오로지 죽음과 연관된 단어뿐이었다. 아무튼 텅 빈 구류장에는 나무의자와 책상 하나가 집기류의 전부였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그 모양이 중세 유럽의 외과 수술도구와 비슷한 각종 고문도구들로 빼곡했다.

    “돼지년의 옷도 모두 벗기라!”
    “예!”
    곧이어 강간을 당하듯 남의 손에 의해 지원의 남루한 옷이 벗겨졌다. 어느 순간 마지막 수치심인 속옷과 젖싸개마저도 풀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찬물을 한 양동이 끼얹었다. 순간 심장이 멎은 것처럼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다시 지난번에 죽은 줄로 알았던 고통이 되살아나 지원의 뇌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으으으.”
    “이 돼지년이 추운가 보네? 계호원! 불 좀 피우라! 추우면 덥게 해주어야지.”
    “예! 알겠습니다.”
    “보위원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때 복도 끝에서부터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원은 직감적으로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사수(射手)라는 걸 알았다. 발소리는 시시각각 다가오며 무서운 속도로 지원을 압박했다.
    잠시 후, 역시나 지원의 정면. 그것도 의식 한가운데서 발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철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동시에 군대에서 부동자세를 취할 때 몸에서 생기는 짧지만 아주 강한 스침이 지원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다. 어쩌면 이 순간부터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가 또다시 지원을 엄습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돼지년은 관리소 정치범들이 지켜야 할 10대 법과 규정을 위반했습니다. 첫 번째! 도주계획을 세우고, 두 번째! 분주소에 승인 없이 무단침입을 했으며……, 네 번째! 보위원의 지시에 불성실하고, 말대꾸까지 했습니다. …… 거기다 아홉 번째!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불복종했으며, 열 번째!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습니다.”
    “…….”
    “돼지년아, 니 죄가 뭔지 똑똑히 들었지. 누구하고 도주계획을 세웠어. 날래 말하라!”
    “선생님, 절대 그런 계획 세운 적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제가 감히 어떻게 저를 살려준 우리 공화국의 크나큰 은혜를 배반하겠습니까.”
    “개소리 치우라! 날래 불라! 어느 놈이야? 어느 돼지 새끼하고 계획을 짰어!”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다른 죄로 끌려왔으면 가볍게 몽둥이찜질로 시작하겠지만 넌 관리소의 10대 법과 규정을 어기고 도주를 계획했으니까 그에 맞는 고문을 하갔어. 야! 계호원, 이 돼지년 아무래도 좋게 말해선 안 되겠다. 달궈졌으면 인두 가져오라!”
    “!”
    “치-이이!”
    보위원은 인두가 화로 속에서 방금 꺼낸 것임을 섬뜩하게 증명했다. 달군 인두가 찬물에 닿으면서 수증기와 함께 발생되는 소음은 실제로 사람의 살을 태우는 소리와 흡사했다. 지원은 금세 새파랗게 질려 턱을 달달 떨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가깝게 느껴지던 보위원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화로 속 목탄(木炭)이 탁! 탁! 튀다 화르르 무너지며 작은 화염과 함께 열기를 고문실에 토해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인두가 다시 화로 속에 집어넣어진 것만은 확실했다.
    “쾅!”
    뒤이어 황급히 고문실을 빠져나간 두 사람의 발소리가 빈 복도를 울리며 멀어졌다. 하지만 지원은 어느 틈엔가 제3의 인물이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제3의 인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너구리를 잡는지 담배연기만 지원의 얼굴에다 자욱하게 뿜어댔다. 그렇게 몇 차례 역한 담배연기를 들이마신 지원은 머리가 핑 돌았다. 그때 지원의 다리에 채워진 수갑이 풀렸다. 순간 지원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그는 다리의 수갑을 풀고 왼손도 자유롭게 해주었다. 날개가 없어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런데 왼손이 자유롭게 되자 지원은 그때까지 잊고 있던 수치심을 느꼈다. 지원은 부끄러움을 가리려 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손이 그의 손아귀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으으으.”
    지원은 상황이 예상과 달리 전개되자 감탕(더러운 물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어리석게도 지원은 그때서야 ‘왜 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 사이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지원의 몸 앞뒷면을 마치 꼬장떡처럼 손쉽게 뒤집었다. 이제 지원은 철창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원의 짓눌려진 양쪽 가슴을 쇠창살의 차가움이 그 주변부터 파먹기 시작했다. 그때 얼음보다 더 차가운 수갑이 또다시 왼손에 단단하게 채워졌고, 온몸의 모든 솜털이 고슴도치처럼 곤두섰다.
    그때 무언가가 풀리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죽 끝에 붙은 금속성의 물체가 내는 소리를 듣고서야 지원은 비로소 자신 앞에 닥친 위험을 깨달았다.
    “짝!”
    “헉! 으으으.”
    곧이어 서릿바람 같은 가죽혁대가 사정없이 지원의 등줄기를 할퀴었다. 그리고는 걸귀처럼 지원의 뼈에 붙은 살점들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뜯었다. 그 고통이 미처 심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잔인한 늑대가 무서운 본능으로 지원의 아랫도리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성난 굶주림은 포만감을 느낄 때까지 지원의 의식을 갈기갈기 찢고 또 채웠다. 지원은 그동안 참았던 고통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집요하고 끈질긴 본능 앞에서 정말로 모든 것을 잃는 절망의 순간이었다. 지원의 한없이 지혜롭고 고요한 눈망울에서 체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으아아! 오마니와 지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북조선이 그 두 사람을 용서해도 이젠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난 반드시 복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