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변절자인가

    '강철서신' 김영환 직접 北 가본 뒤 기나긴 고뇌 끝에 '북한 민주화' 결심
    생각 바꿔야 하는 진실 마주하고도 부정·폭력 일삼는 사람들이 변절자

     

    주용중(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이데올로그(ideologue)'란 이념에 죽고 이념에 사는 사람이다. 이 분단의 시대에, 진정한 이데올로그가 누구냐고 물으면 "김영환씨"라고 답하고 싶다. 올해 49세인 김씨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1982년부터 1997년까지는 남한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1997년 이후는 북한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국가정보원은 1986년 김씨를 붙잡아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퍼뜨린 문건인 '강철서신'을 누가 썼느냐고 캐물었다. 고문에 못 이긴 그는 "내가 썼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더 세차게 고문했다. 강철서신이 대학생이 쓸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년형을 살고 나온 그는 더 확신범이 됐다. 남파 간첩과 접선해 북한노동당에 가입했다. 남한의 혁명을 위해선 북한의 도움이 필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1991년엔 북이 보낸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그에게 "선생의 글을 다 읽었다"고 했다. 북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지만 그의 마음속엔 그때부터 북에 대한 회의(懷疑)가 싹텄다. 직접 겪어본 북한은 인민이 주체인 나라가 아니라 김씨 왕조가 주체인 나라였다. 그는 나중에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잘 모르더라"고 털어놓았다.

    김씨가 '김정일 정권은 남북한 주민의 적(敵)'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로부터 6년 넘는 고뇌의 시간이 걸렸다. 1997년 그는 자신이 창당을 주도했던 민혁당을 해체했다. 김씨는 1999년에 쓴 전향 반성문에서 "북한 동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한다. 김정일 체제를 무너뜨리고 북한을 민주화하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고 싶다"고 썼다. 그가 반성문을 쓴 직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출범시키는 날 사무실 앞에 누군가 상자 하나를 놓고 갔다. 그 안에는 김씨와 동료 3명의 이름과 목이 잘린 쥐 4마리가 들어 있었다. 남한 당국의 눈을 피해 살던 그가 이젠 거꾸로 북한 정권의 눈엣가시가 된 것이다.

    그의 삶은 고달팠다. 생계는 아내가 중국 물품을 국내에 들여와 파는 오퍼상을 하며 꾸렸다. 아내도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남편이 다시 '운동'이란 걸 하는 모습이 내키지 않았다. 김씨는 2001년엔 위암 수술을 했다. 2004년과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에서 그를 영입하려 했지만 그는 번번이 "북한 민주화 운동이 뭔가 불순한 의도에서 진행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거절했다.

    요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실세인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1990년대 후반 김씨가 이끌었던 민혁당에서 서열 5위쯤이었다. 당시 이씨는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변신한 김씨를 '변절자'라고 부르며 당 재건을 꾀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고 무조건 변절자인가, 아니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는 진실을 마주하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변절자인가. 이씨 그룹은 요즘 입으로는 진보를 내세우면서 당권을 놓지 않기 위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선거 부정도 폭력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어느 쪽 삶이 더 순수하고, 어느 쪽 삶이 더 솔직한가.

    김씨와 절친한 사람은 기자에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의(大義)에 충실한 사람이다. 친구지만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김씨는 50여일째 중국에 붙잡혀 있다. 중국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북한 민주화 운동을 위해 힘써온 그에게 중국이 무슨 연유로 '국가안전위해죄'라는 혐의를 씌우고 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건 이번 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를 구명(救命)하고 그가 가려는 길에 동참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는 덜 외로울 것이다.  <조선일보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