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교씨, 노무현정부때 4.3진상 보고서 기획단장 박원순에 7가지 질문 광고
  • 현대사포럼 이선교 대표는 7일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광고를 통해 “박원순 변호사가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서 제주4.3사건을 폭동이 아닌 무장봉기라고 정의했다”며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 2003년 초 노무현정부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 기획단’ 단장을 맡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이 대표는 광고를 통해 "좌파 남로당 폭도 400여 명이 경찰지서 11곳을 습격하고, 일반인과 살려달라는 소녀들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는데 폭동이 아니고 '무장봉기'라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이어 "1948년 9월 15일 이덕구가 제2대 폭도사령관이 되면서 대한민국을 적으로 보고 1948년 10월 24일 선전포고를 하여, 4.3폭동이 확대되었다. 양민이 많이 죽게 된 게 이덕구의 선전포고 때문인데 그 내용은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왜 뺐느냐"고 박원순 변호사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그는 이 외에도 폭도가 경찰을 살해한 점, 육군 9연대와 경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점,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된 원인과 배경 등이 진상보고서에서 모조리 빠진 점을 적시하면서, 4.3사건의 책임을 오히려 당시 국군과 경찰, 한국 정부에 있다고 뒤엎은 점 등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박원순 변호사에게 추궁했다.

    다음은 이날 이 신문에 게재된 광고전문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장 박원순 변호사는 질문에 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제주4.3사건이 폭동이 아니고 무장봉기라고 정의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1. 어린 소녀까지 죽인 것이 폭동이 아니고 무장봉기입니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사건이 3.1발포사건과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항거한 무장봉기라고 하면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 좌파 남로당 폭도 400여명이 경찰지서 11곳을 공격하여 고일수 순경의 목을 쳐 죽이고, 김장하 순경 부부를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선우중태 순경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일반인 문영백의 딸 문정자(10) 문숙자(14) 소녀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고, 애월면 구엄마을 문기찬(33), 문창수(34)도 죽였다. 경찰에 항거한 무장봉기라면 왜 위와 같이 일반인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녀들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는가? 이것이 폭동이 아니고 무장봉기입니까?

    2. 남한 5.10 선거는 반대하고 북한 8.25 선거를 지지한 것이 무장봉기입니까?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은 폭도들이 이상과 같이 우익과 선거관리위원들과 투표를 하려는 양민들을 죽이거나 산으로 내몰면서 5.10선거를 반대해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무효가 되게 하고,(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선거구 2개만 무효임) 1948년 8월 25일 북한의 건국 선거에는 제주도민의 85%라고 김달삼이 주장한 52,000여명이 지지 투표를 하여 북한의 건국에 앞장을 섰습니다. 제주4.3사건이 경찰의 탄압에 항거한 무장봉기라면 왜 5.10선거를 반대하고 북한의 선거를 지지하였습니까?

    3. 제주4.3사건 2대 폭도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한 것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왜 빼셨습니까?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폭도들의 공격으로 경찰 56명, 우익 235명이 죽었고, 폭도들은 교전 중 15명이 죽었습니다. 이때까지 제주에 주둔한 국군 9연대는 폭도들이 공격하지 않아 많은 양민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민이 선거한 투표용지 52,000여장을 가지고 북한 건국선거에 참석한 폭도사령관 길달삼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김일성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후 제주도로 돌아오지 않자 제주도는 평화를 되찾은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1948년 9월 15일 이덕구가 제2대 폭도사령관이 되면서 대한민국을 적으로 보고 1948년 10월 24일 선전포고를 하여, 4.3폭동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양민이 많이 죽게 된 원인인 이덕구의 선전포고 내용을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뺐습니까?

    4. 제주4.3 폭도가 국군을 공격하여 하루 14명(21명)이 전사한 사건을 왜 제주4.3진상보고서에서 빼셨습니까?
    이덕구는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 1948년 11월 2일 제주주둔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중대장 이하 14명(21명)이 죽어 제주4.3폭동이 확대되어 치열한 전투 중에 제주도는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고, 낮에는 대한민국이 되어 제주도민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군이 폭동을 진압하게 된 동기인 이 중요한 사건을 왜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뺐습니까?

    5. 9연대 안에서와 경찰 안에서 일어난 좌파 반란사건을 왜 제주4.3진상조서보고서에서 빼셨습니까?
    1948년 10월 28일 제주도 주둔 9연대 강의현 소위 등 80여명의 좌파 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망타진 되었고, 1948년 10월 31일 75명의 좌파 경찰과 공무원이 제주도를 공산화 하려다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왜 이 사건을 빼셨습니까?

    6. 이상의 사건 때문에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 내란을 진압하였는데 계엄령을 선포한 원인을 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빼셨습니까?
    이상의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제주도 내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제주도가 공산화 될 것으로 판단하여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내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왜 이상의 사건을 모두 빼버리고, 아무 잘못이 없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린 양민을 학살하였다고 하였습니까?(엉터리심사로 4.3희생자 13,000여명 결정)

    7. 제주4.3 폭동 책임이 김달삼ㆍ이덕구 등 폭도에게 있는데 왜 정부와 국군과 경찰과 미군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제주4.3사건 책임자는 김달삼과 이덕구와 제주 폭도들에게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제주 폭동의 책임이 왜 대통령 이승만, 9연대장 송요찬, 2연대장 함병선, 그리고 경찰과 국군과 미군에게 있다고 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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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장 박원순 변호사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2011년 11월 10일까지 신문광고란에 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제주4.3사건 ‘심사무효 확인소송’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2011.10.12 오후3시 프레스센터19층에서 강의가 있습니다. 국민여러분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현대사포럼 대표 이선교 (www.625wa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