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경선 패배 이후 돌연 사퇴를 선언하며, 민주당은 물론 야권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다. 손학규 대표의 사퇴는 그다지 큰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 지자체 선거 당시 경기지사 선거에서 현 김진표 원내대표가 유시민 참여당 대표에게 여론조사 경선에서 패한 바 있다. 이 당시 그 누구도 정세균 대표의 책임을 묻지 않았고, 그는 유유히 선거에 임했다.

    또한 지난 4.27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은 참여당의 이봉수 후보에게 경남 김해 여론조사 경선에서 패해 후보를 내지 못했다. 이 때의 당대표는 현 손학규 대표이다. 손대표는 이에 더해 전남 순천 재보선에서는 아예 단일화 작업도 없이 무공천을 선언하여, 순천을 민주노동당에게 넘겨주었다. 손대표가 가장 격렬한 비판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대권을 위해 호남을 팔아먹는다는 논리였다.

    손학규의 당대표 사퇴, “박원순 후보 떳떳하게 지원하기 위한 길”

    반면 이번 서울시장 단일화 과정에서는 민주당이 40%의 현장 경선을 관철시켰고, 선거인단 명부도 확보했다. 누가 봐도 민주당에 그리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물론 손대표 스스로 선거 초기부터 박원순 후보와 독대를 하는 등, 당내 후보 띄우기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순천 재보선과 비교하면 사퇴까지 거론될 상황도 아니었고, 당 내에서 경선 패배 이후 본격적으로 손대표 사퇴를 거론한 인물도 없다.

    더 의아한 것은 손대표가 당대표 사퇴 이후, 자숙과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고 곧바로 박원순 후보 지원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대목이다. 특히 손대표는 “박원순 후보를 더욱 떳떳하게 지원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자당의 후보가 무소속 후보에 패했는데, 당대표라는 사람이 아예 지위를 내놓고 무소속 후보 당선을 위해 백의종군 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왼쪽 뺨에 이어 오른쪽 뺨마저 내주는 격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손대표가 당대표로서 책임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라, 또 다시 배신의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제기도 가능하다. 손대표는 애초에 민주당 후보를 내기보다는 박원순 등 외부 인사에게 후보를 내주며, 야권통합을 주도하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천정배, 정동영 등 민주당 비주류에서 강하게 항의하며, 가까스로 민주당 경선이 이루었다. 천정배 후보는 당원 연설회 때, “민주당을 팔아먹으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라 물었고, 지지자들은 “손학규”를 외치기도 했다.

    이번 민주당의 패배는 야권단일화 작업에서 민주당 브랜드는 오히려 개혁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는 뼈를 깎는 자성과 환골탈태 주문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향이다.

    MB정권 들어 좌파운동권 단체들과의 차별성 사라져, 당연히 존재감도 상실

    민주당은 제 1야당이기 이전에 지난 10년 간 집권세력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금융개방 등을 통해 IMF를 극복했고, 이러한 노선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에서는 박원순 후보가 중심이 된 좌파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한미FTA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역대 최대의 참패를 당한 뒤, 민주당은 급격히 좌클릭한다. 특히 2008년 3월부터 시작된 광우병 촛불 때에는 10년 집권세력의 신뢰성을 내던지며, 현재의 박원순 후보를 지원하는 좌파시민사회와 길거리 투쟁을 함께 했다. 최근에는 민간기업의 노사 문제에 끼어들며, 정동영, 천정배 등 당 최고위원들이 데모단과 함께 희망버스에 올라타는 엽기적 행태까지 보여주었다.

    이명박 정권 들어 민주당이 보여준 행태는 여느 좌파운동권 단체들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민주당이 각종 촛불 집회, '희망 버스' 등에 동참하며 '거리 정치'에 열중했고, 국민은 이런 민주당이 시민단체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됐다"며 "똑같은 물건이라면 신상품을 사겠다는 심정 아니겠느냐"고 조선일보가 보도하기도 했다.

    바로 이 지점이다. 민주당이 총선과 대선이 다가올수록 민주노동당과 박원순의 좌파시민사회에 영역을 빼앗기는 이유는 민주당이 집권세력으로서의 국정운영에 대한 신뢰도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 일각에서는 이번 패배가 민심에서 멀어진 민주당의 현실이라 반성하고 있지만, 역시 문제는 그 민심이다. 여당과 제 1야당은 민심을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기능, 법제도화, 국가의 재정 등을 염두에 두고 체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런 정상적인 정당기능을 내팽겨치고, 성난 민심 위에 올라타서 이를 부추기며 야합하는 데만 골몰했다. 반값등록금에 대해 손학규 대표 스스로, 집회 한번 다녀와서 당론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이런 민심은 기존의 체계를 다 무너뜨리며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이런 민심의 기준으로는 민주당이야말로 가장 구태스러운 집단이고, 민주당은 바로 이렇게 확대과장된 민심에 의해 심판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민주당 외곽에 포진한 야권세력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런 민심을 선동하여 민주당을 압박하게 된다. 이미 이런 유형의 정치공학은 2003년도 열린우리당 창당 때 익히 경험해본 일이다. 이런 구태의연한 정치공학이 또 다시 반복될 동안 민주당은 이를 견제하기는커녕 이에 편승했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다.

    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는 서울시장 선거를 MB정권 심판론으로 접근했다. 오히려 좌파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박원순 후보가 생활시정을 이야기하면서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 있었다. 제 1야당의 역할과 좌파시민사회의 역할이 뒤바뀐 격이다. 제 1야당이자 과거 집권세력이 이런 행태를 보이니, 민주당보다 더 선명하고, 민주당보다 더 실용적으로 보이는 좌파시민사회, 민노당, 안철수 등이 민주당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손학규 대표, 한미FTA 등 국가 주요정책 오락가락, 민주당 개혁 실패

    손학규 대표가 대표로서 책임을 져야할 사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손학규 대표는 15년 간 한나라당 생활을 해왔음에도 지난해 당대표 경선에서 정동영, 정세균 등 민주당의 중심 인물들에 승리했다. 손대표의 최대 약점이기도 한 한나라당 경력은 오히려 지난해 경선에서는 득이 되었다. 더 이상 민주당이 운동권 단체들에 끌려가지 말고, 본래의 중도개혁 정체성을 되찾으라는 당원들의 요구였다. 손대표는 이에 어느 정도 부응했는가.

    손대표는 한EU FTA 때부터 민주노동당의 협박에 오락가락했고, 경기도지사 시절 극구 찬성했던 한미FTA에 대한 입장도 바꿨다. 한나라당 시절 경기도지사로서 해외투자유치를 자랑했던 손학규는 사라지고, 기껏해야 민주노동당의 일개 당원이나, 좌파운동권단체의 간사의 역할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손대표의 위상이 이토록 작아지니, 민주당 후보가 좌파운동권단체 후보에 패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손대표는 마지막 남은 임기 2개월 간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당대표 자리를 내던지며, 박원순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뛰겠다고 선언한 격이다. 그러면서 안 그래도 어려운 당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만약 손대표가 진정으로 책임정치를 하겠다면, 당대표 사퇴 이후 조용히 춘천에 내려가 예전처럼 닭모이를 주는 게 맞다. 민주당을 몰락시킨 무소속 후보 선거운동을 위해 당대표직을 버리겠다는 게 논리적으로 가능한 명분이냐는 것이다.

    15년 간 자신을 키워주었던 한나라당 배신한 손학규, 이제 민주당도 배신하나

    손대표는 15년 간 자신을 국회의원, 보건복지부장관, 경기도지사로 만들어주어, 대권주자 반열에 올려준 한나라당 당원들을 배신했다. 이런 손대표의 전력으로 보건데, 지금의 행태는 세가 급격히 기울고 있는 민주당을 버리고, 박원순 등의 좌파운동권단체, 문재인, 이해찬 등의 통합과 혁신 세력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나라당에 이어 또 다시 민주당마저 배신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손대표가 해야할 일은 야권 모두가 합의한 경선룰에 의해 선출된 박원순 후보를 민주당 대표로서 지원하던지, 도저히 당원들에게 낯을 들 수 없다면, 대표직을 사임하고 최소한 내년 총선까지 춘천에서 닭모이를 주는 것이다.

    당대표직을 버리고 박원순 후보 선거운동원으로 뛰겠다는 것은 아무리 그를 이해하고자 해도, 책임정치가 아닌 기회주의적 배신정치로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