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성공에 북한주민 동요..독재붕괴 우려 '대만 카드'로 몽니..중국 첩보활동시켜
  • 김정일이 가장 증오하는 나라는 중국 
      
    김정일이 대남공작부서들에 대중첩보를 지시
    장진성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중국이라는 큰 공룡이 없었다면 김정일정권은 벌써 붕괴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표현대로 오늘날 북한은 중국의 그늘 밑에서 연명하는 실정이다. 이런 주종관계를 두고 북한 정권은 동등한 혈맹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이 미국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존재, 아니 거의 적대의식을 갖고 있는 나라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 내가 통전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대미, 대일, 대남첩보가 중심이던 당 대남공작부서들에 대중첩보도 강화할 것에 대한 김정일 지시가 내려졌다. 그 계기는 이러했다. 북한에서 종파투쟁이 한참이던 1950, 60년대 무렵 숙청위기에 몰린 고위출신들이 중국으로 대거 망명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거나 중국 내 친인척 연고자들이어서 중국 공산당의 지지와 보호를 받고 있었다.  


    '친중 망명정부'설에 발끈...대응 공작 결행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부터 그들의 해외여행도 자유로워졌는데 그 과정에 김씨 세습정권을 비판하는 그들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심지어는 그들을 중심으로 김씨 정권 붕괴 후 친중 망명정부가 준비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극도의 체제불안 심리에 빠져있던 김정일은 그들의 단순 행보를 중국 공산당의 이중대북관점으로까지 확대해석했다.

    더욱이 중국의 실용주의 외교에 늘 배신감과 열등감을 느끼던 김정일은 마침내 주도적인 대응공작을 결심하게 됐던 것이다. 하여 통전부는 일본의 조총련, 러시아의 고통련,(고려인통일총연합회) 담당 부서에서 근무하던 일부 우수 요원들을 중국의 재중총연합회 관리 부서로 옮기는 한편 중국진출 인력을 대거 늘리기도 하였다.  또한 대남 및 해외첩보 담당 부서인 당 35호실과 해외조직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연락부 요원들도 중국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중국정보 빼내다 '연변사건' 터져

    그렇게 김정일의 지시로 은밀히 추진되다 발각된 사건이 바로 북한과 중국의 외교문제로까지 이어질 뻔한 “연변사건”이다. ‘연변사건’이란 북한 35호실 공작원들이 중국 동북3성의 지방정부, 공안, 군 내 중국 공산당원 간부들을 매수하여 정기적으로 정보를 빼내다 들킨 사건이다.

      그때 중국 국가안전국이 체포한 ‘연변사건’ 연루자만 해도 60여명이 넘는다. 그 외에도 중국의 국가안전국은 그동안 한국기업들의 안정적인 투자유치를 위해 항상 감시 관리해오던 북한 공작원들에 대한 보복 검거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중국이 그처럼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에는 북한이 대만에 추파를 던진 괘씸죄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김일성 생존 때부터 김정일은 대만과의 관계 정상화를 완강하게 주장했었다. 그 계기가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을 때와, 평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서울 88올림픽 참가를 선언했을 때였다.
    그때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중국도 하는 짓을 우리는 왜 참아야만 하냐고 난리였고, 공개석상에서 부자가 심하게 다툰 그 일화에 대해서는 이미 북한 간부들 속에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이 '6.25참전 보상금' 요구하자 절망...대만에 접근

      그런 김정일을 자극하게 한 것은 6.25전쟁 항미원조, 즉 중국이 미국을 반대해 북한을 지원했던 전쟁 보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중국 공산당 내 고위간부들의 개별적 발언이었다. 김정일은 북, 중관계가 더는 혈맹관계가 아니라는 증거라며 국교관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외무성이 아닌 군 고위관계자들을 대만으로 극비리에 파견하게 된다.

      그리고 대만의 적극적 지원약속에서 자신감을 가진 김정일은 2000년 3월 5일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영춘 군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상을 대동하고 평양주재 중국 대사관을 기습 방문한다. 완융상 중국 대사와의 자리에서 김정일은 항미원조 보상금 발언을 문제 삼으며 대만에 미사일을 팔아서 보상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당황한 완융상 대사가 본국에 이 사실을 알리자 격앙된 중국 지도부는 그동안 미루었던 신임북한 대사를 강경파 출신 왕궈장으로 임명하고 완융상을 본국으로 소환한다. 한편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도 대사철수 대기명령이 떨어져 짐까지 싸놓을 만큼 양국관계가 냉각된다. 하지만 중국의 강경한 입장에서 체제위기를 느낀 김정일은 2,000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2박 3일 동안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게 된다.

      그때 북한 간부들 속에서는 은밀히 이런 야유들이 오고 갔다.
    김정일이 중국 대사관에 찾아가 까불다 북경까지 끌려가 사죄한 굴욕방문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은 중국 유학파 출신 간부들을 숙청하거나, 개혁개방지지 발언 혐의로 조사받던 간부들에 대한 처형으로 분풀이를 하였다. 또한 연변 사건 책임을 씌워 35호실 과장 몇 명을 해임출당 시키고 35호실에 대한 조직개편과 축소를 단행하였다.  그 대상은 중국에 진출해 있던 35호실 산하 외화벌이 회사들뿐이다.

    지금도 북한은 여전히 공작조들과 국가보위부 해외반탐조의 파견을 더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만과의 관계도 비록 국교규모는 아니지만 내용은 그 수준에 준할 만큼 2001년 말 ‘조선대만친선협회’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대만서 속옷 선물...러시아쪽에 추파 쇼

      2002년 2월 16일 김정일의 선물로 평양시민들에게 무료 공급한 속옷 내의들은 바로 “조선대만친선협회”가 평양에 사무실을 내는 조건으로 제공한 대북지원 명목의 대가성 물자들이다. 외형상 기업인들로 구성된 ‘조선대만친선협회’는 만경대구역 팔골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리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54부가 담당하고 있다.

      대외명칭을 조선승리무역회사로 포장한 54부는 장승길 소장이 주도하는 김정일의 군 정치자금 조달 부서이다. 김정일은 대중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2002년 초 북한 내 모든 회사들이 무역거래를 중국에서 러시아 쪽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역질서의 혼란이 그대로 사회질서로 옮겨지자 3달도 채 안 돼 취소명령을 내리게 된다. 결국 중국 정부로부터 또 한 번의 미움과 함께 주민들 속에서는 지도력의 의심만 증폭되게 만든 쇼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주민들의 '중국 비교의식'이 무서워

      이렇듯 김정일 정권이 중국을 미국이나 남한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의식하는 이유는 같은 사회주의면서도 개혁개방의 성공모델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한다면 300만을 굶겨 죽인 김정일의 폐쇄정치와 승승장구하는 이웃의 중국을 보며 북한 주민들이 비로소 비교의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우상화 선전에 어느덧 자신까지 세뇌된 김정일이어서 중국의 대국주의에 누구보다도 큰 모멸감과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정일이 6자회담 틀 안에서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추진하려는 것은 북핵카드를 이용하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보겠다는 이른바 널뛰기 외교전술이다. 그러나 그 발상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중국의 만만디 외교가 김정일의 정권 안정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압박에 온 나라가 시장화 된 북한, 이것이 오늘날 북중동맹의 실상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