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현대사의 올바른 이해<4> 이승만, 건국의 원훈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한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몇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사건이다. 그만큼 역사에서 최고 최대의 사건이 국가의 흥망사다.

    지난 20세기에 한국인은 조선왕조가 망하고 대한민국이 성립하는 사건을 겪었다.
    20세기 한국사는 온통 이 두 사건으로 그 의미가 채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대한민국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다. 이 같은 국가이념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이 아니었다. 격렬한 단절의 과정이었다.

    이에 1945년 8월 한국인이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10%도 되지 않았다. 반면 훨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에 경도됐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 존속한 조선왕조의 성리학이 균(均)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유이념의 국가를 세우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특별한 정신의 소유자가 있어 강인한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 1903년 한성감옥서 6년간 복역한 종신죄수 이승만이 중죄수의 모자를 쓰고 서있다.(왼쪽)ⓒ
    ▲ 1903년 한성감옥서 6년간 복역한 종신죄수 이승만이 중죄수의 모자를 쓰고 서있다.(왼쪽)ⓒ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역사가 요구한 그 일을 감당한 분이다.
    어느 나라건 나라가 세워질 때 그러한 역할을 한 위인이 있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된다. 그럼에도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실정이다.

     이승만 때문에 민족분단이 이뤄졌다는 비판이 있다. 그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제2편에서 설명했다.

    이승만은 투철한 자유이념의 소유자였다. 이승만은 구한말 고종황제의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때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역사와 철학에 통달했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깊은 본성이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조선왕조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은 바로 그 자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가 한성감옥에서 지은 불후의 명작 ‘독립정신’은 이러한 그의 신념을 담은 것이다.
    이후 40년의 독립투쟁에서 그는 자유이념의 노선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 ▲ 1903년 한성감옥서 6년간 복역한 종신죄수 이승만이 중죄수의 모자를 쓰고 서있다.(왼쪽)ⓒ

  • ▲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책 <독립정신>. 아래는 2008년판과 2010년판 요약본.ⓒ
    ▲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책 <독립정신>. 아래는 2008년판과 2010년판 요약본.ⓒ

    많은 독립지사들이 모스크바로 달려가 레닌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는 자유의 부정으로서 우리 민족이 다시 한 번 패망할 구렁텅이로 간주했다.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좌우합작의 유혹에 빠졌다. 그의 평생 동지 김구도 결국 그 길로 돌아서 그를 떠났다. 이승만은 외쳤다. “그 길은 안 돼, 그 길은 구렁텅이야.”

  • ▲ 1948년 4월, 평양을 찾아가 김일성(당시36세)을 따르는 김구(72세). 북한은 남한의 총선과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남북합작회의를 열었다.ⓒ
    ▲ 1948년 4월, 평양을 찾아가 김일성(당시36세)을 따르는 김구(72세). 북한은 남한의 총선과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남북합작회의를 열었다.ⓒ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자유세력을 결속하고 대한민국을 세웠다. 누가 옳았는지는 지난 6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 때문에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일제 하 35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4년간 점령한 것과 많이 다르다.

    한반도는 일제의 부속영토로 완전하게 지배됐으며, 이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전선은 성립하지 않았다.
    해외의 독립운동은 그 공적이 하늘을 찌르지만 유감스럽게도 큰 세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에서 무엇이 민족을 위한 길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했다. 많은 사람들은 일제의 억압과 차별 하에서도 배우고 익히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총독부 부속관서의 직원이 되거나 학교의 선생이 되거나 일본군의 군인이 되거나 일본은행의 돈을 빌려 공장을 세웠다.

    그러한 근대문명에 대한 학습, 기획, 실행의 능력은 이후 대한민국의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그들을 일제와 협력했다고 해서 친일파로 몰면 결국 근대문명의 국가를 세우지 말자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 ▲ 1920년11월 상해임시정부의 첫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승만.
    ▲ 1920년11월 상해임시정부의 첫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승만.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중앙청에서 열린 건국선포식.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중앙청에서 열린 건국선포식.

    이승만은 처음부터 이러한 모순을 간파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고문한 소수의 악질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 과거 일본에 협력한 자라도 건국의 대열에 동참하면 모두가 애국자다, 이러한 논리로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바로 그 대동의 문명노선이 약 4000명의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면서 민족을 분열시킨 공산주의 노선을 이긴 것이다.

     이승만이 독재를 했다는 비판이 있다. 맞는 이야기다. 이승만이 독재를 한 것은 그의 과오이며 비판돼야 한다. 그가 1956년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그의 후배들이 정치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더라면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지금처럼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을 전제한 위에 지금쯤은 그 시대의 실태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복구한 위에 그 시대의 정치가와 일반 유권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하나하나 복기해 봄도 나쁘지 않다.

     최근 어느 정치사 연구자는 1950년대 한국의 비극은 정치적 자원이 너무 빈약한 가운데 한 사람에 집중된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시대에 야당의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처럼 평생 독립운동에 종사한 명망가는 없었다.

  • ▲ 1953년 육군3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장병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형과 부인 프란체스카.
    ▲ 1953년 육군3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장병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형과 부인 프란체스카.

    그들은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격렬한 투쟁과정에서 모두 이승만의 그늘로 모여든 사람이었다. 북진통일론을 지렛대로 해 미국에 맞서고 미국을 조종해 결국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이끌어낸 것은 오로지 이승만의 정치적 능력이었다.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지만 그 시대에 산업과 교육의 방면에서 적지 않은 성취가 있었다. 80 노구에 그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지휘한 그가 보기에 아들 같은 나이의 야당 지도자들은 너무나 미국에 의존적이고 부패해 미덥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공산주의자 출신의 조봉암이 대선에 출마해 30%의 지지를 얻었다. 그가 보기에 그가 이룬 건국은 여전히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독재는 이후 여러 나라에서 보는 후진국형 독재와는 판이했다. 법이 정한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선거는 어김없이 치러졌다.

  • ▲ 1959년 원자로를 처음 도입하고 원자력연구소를 건축한 이승만.
    ▲ 1959년 원자로를 처음 도입하고 원자력연구소를 건축한 이승만.

    그는 영부인이 속치마를 기워 입었을 정도로 청렴했다. 그는 4ㆍ19가 터져 그의 대리인들이 부정선거를 자행했음을 알았을 때 “그럼 내가 물러나야지” 하고 순순히 용퇴했다.

    병원을 찾아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로하며 “불의를 보고 젊은이들이 일어났으니 나라의 장래가 밝다”고도 했다. 젊은 시절 망해가는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생사의 기로에서 6년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으리라.

    후일 그가 하와이에서 쓸쓸히 죽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건국의 원훈(元勳)’이라고 칭송했다.

    늦지 않았으니 그를 ‘건국의 원훈’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 위에 이 나라가 자손만대에 물릴 건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한다. (국방일보, 201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