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예수님과 부처님의 생일이 법정 공휴일이다. 이 지구상에 달리 또 그런 나라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일본도 물론 그렇지 않다. 둘 다 평일이다. 그러나 일본의 한 해 법정 공휴일 14일 가운데 누군가의 생일과 연관된 날은 사흘이나 된다. 첫째는 4월29일이다. 이날은 원래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생일이었다. 그가 타계하자 공휴일 명칭을 ‘미도리노히(綠の日)’로 바꾸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식목일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는 ‘문화의 날’로 지정되어 있는 11월3일이다. 이날 역시 애초에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생일이었다. 세 번째가 12월23일로 현재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생일이다.

  • 도쿄의 황거 ⓒ 자료사진
    ▲ 도쿄의 황거 ⓒ 자료사진

    아키히토 천황이 68번째 생일을 맞았던 2001년, 한국과 일본 매스컴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생일의 관례대로 아키히토 천황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귀가 솔깃하고, 일본의 국수주의자들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질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요점을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예로부터 깊은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은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나 초빙됐던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문화와 기술이 전수되었다. 궁내청 악부의 악사 가운데에도 당시 이주해온 사람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가 되어 지금까지 아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나와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

    한 마디로 일본 천황가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천황 스스로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가히 폭탄 발언이었다. 아무리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 공동주최를 앞두고 두 나라의 우호친선을 강조하려는 아키히토 천황의 립 서비스였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상당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는 주로 재야 학자들 가운데 천황가와 한반도의 혈연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예컨대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라는 이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일본서기>는 초대 진무(神武) 천황으로부터 제9대인 가이카(開化) 천황까지 9명의 가공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것은 고분시대에 건너온 한반도 남쪽의 사람들이다. 전기(前期) 고분 문화를 축조한 것이 가야 계통 집단이고, 5세기 말 이후의 고분문화를 이룬 것은 백제계 도래집단이다. 오진(應神) 천황릉의 피장자는 백제계 도래인이며, 천황가의 시조다.”

    자, 이쯤해서 일본 왕실의 계보를 따져보기로 하자. 현재의 아키히토 천황은 제125대 천황이다. 위의 인용문에도 나온 제1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해가 기원전 660년으로 되어 있다. 날짜는 2월11일이라고 해서 그 날이 법정 공휴일인 건국기념일이다. 한국의 개천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학자들도 신화에 바탕을 둔 이 천황가의 초기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 초기 천황 가운데 재위 기간이 100년이나 되는 인물이 있으니 도저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옛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짧았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일본에 국가다운 국가가 등장한 시기는 빨라야 3세기 중반이었다.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239년 위나라에 사절을 보내와 명제(明帝)가 ‘친위왜왕(親魏倭王)’이란 칭호를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서기 1세기 경 일본 각지에 100여 개의 작은 집단이 있었고, 그것이 합종연횡을 거쳐 4세기 경이 되자 관서 지방에 하나의 커다란 나라로 뭉쳐졌으며, 이것이 천황가의 선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역사에서 천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을 비롯한 유력 씨족이 정권을 쥐락펴락 하는가 하면, 나중에는 귀족 계급에 의해 권한이 분산되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무사 계급이 대두함으로써 이른바 군사정권이 일본의 실권을 장악했고, 천황은 그저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마지막 군사정권인 에도 막부가 무너지면서 등장한 메이지 신정부에 와서 천황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다 명확해졌다.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은 제1조에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못 박았던 것이다. 이로써 메이지 천황은 표면상으로 일본의 최고 권좌에 올랐다. 그래도 형식상 입법, 행정, 사법으로 권한이 나뉜 것이 절대적 왕정과는 다른 점이었다.
    이후 세계사의 한 흐름이기도 했던 제국주의의 함정에 일본도 빠져들면서 메이지,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천황(=히로히토)의 3대에 걸쳐 해외 침략의 상징으로 낙인찍히기에 이르렀음은 다들 잘 아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일본에서는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의 점령 통치가 시행되었다. 만약 이때 맥아더 점령군사령부(GHQ)가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戰犯)으로 처벌했더라면 일본 왕실의 운명도 끝장났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미국은 일본의 민심 등을 곰곰 관찰한 뒤 천황에게는 전쟁책임을 묻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GHQ의 주도로 새롭게 제정한 일본 헌법에는 천황과 관련된 조항을 이렇게 뜯어 고쳤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고,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에 의거한다.”

    이로써 신격화되었던 천황이 다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다. 천황의 주요 업무는 정기국회 개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새로운 총리와 각료가 뽑히면 임명장을 수여하며, 외국에서 부임하는 대사들로부터 신임장을 받는 것 등이다. 그야말로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서의 임무만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일본인들이 천황가에 절대적인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신문 방송 등 매스컴에서는 왕실 기사를 쓸 때 극존칭을 사용한다. 기사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왕실 행사를 사진 취재할 경우, 각 언론사가 사전에 정해둔 순번에 따라 한 사람이 대표로 촬영한다. 그런 다음 필름을 궁내청 담당자에게 제출하고, 그 중에서 심사를 통과한 사진이 각 언론사에 똑같이 배포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왕궁 청소 자원봉사 시스템도 있다. 도쿄 한복판에 자리한 왕궁(일본인들은 황거 皇居라고 부른다)은 그 넓이가 약 140만 평방미터로 교황이 사는 바티칸의 3배, 여의도의 6분의 1 가량이다. 300종이 넘는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무리 지어 노니는 새들의 종류도 70종에 달한다. 이렇게 넓은 왕궁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꼬리를 물어 도리 없이 선발기준까지 정했다니 그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준이란 것이 ‘첫째, 심신이 건강한 15세 이상 70세 이하의 일본인. 둘째, 15명 이상 60명 이하의 단체여야 하며 개별 참가는 안 됨. 셋째, 하루 평균 대여섯 시간씩 나흘 동안 일해야 함. 넷째, 숙식은 물론이고 점심 도시락도 각자 지참해야 함’ 등으로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자가 많아 추첨을 해야 하며, 6개월쯤 웨이팅 리스트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것이 예사라고 했다. 자원봉사인지라 품삯이 땡전 한 푼 없는 것은 물론이다. 고작 왕실 문양이 새겨진 담배 10개비와 과자 한 봉지, 그리고 그림엽서를 달랑 기념품으로 준다는데 그래도 1945년 12월에 시작된 이래 1백만 명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들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제 이쯤해서 슬그머니 매듭을 짓는 편이 낫겠다. 일본 천황이 자신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밝혔다고 해서 우리가 흥분할 일이 무에 있겠는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얼싸안고 ‘형님!’ ‘아우님!’하지 않을 바에야 역사는 역사로 차분히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메이지 천황 122대 천황

    1852년에 고메이(孝明)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무쓰히토(睦仁). 1867년 12월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를 선언한 뒤 에도를 도쿄로 개명하여 천도했다. 새로운 헌법(=메이지헌법)을 반포하고 의회를 소집하는 등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타이완 정복,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의 식민지화 등 대외 침략이 그의 재위 중에 이루어졌다. 1912년 타계.

    니혼쇼키

    옛날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역사서 <고지키(古事記)>가 선보인지 8년 뒤인 720년에 간행되었다. 두루마리 30권이며, 첫 두 권은 신화이고 나머지는 초대에서 41대 지토(持統) 천황까지를 다루었다. 순수 한문체의 편년식 기술로 엮어졌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관련 역사를 날짜와 더불어 인용하는 등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쓴 흔적이 있어 정사(正史)로 간주하기도 한다. 두루마리는 폭 27센티, 한 권의 길이가 5미터에서 10미터 전후이다.

    황거(皇居)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열었을 때 본거지로 삼았던 에도성이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으로 교토에 살던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오면서 궁성으로 바뀌었다. 10여 개의 해자(垓字)로 에워싸여 있으며, 천황과 황태자 부부의 거처 및 궁내청 건물 등이 있다. 1948년부터 황거로 불리기 시작했다.

    GHQ
    정식 명칭은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이다. 일본에 점령정치를 펴기 위해 조직되었다. 사실상 미국 단독으로 이끌었으며, 맥아더 장군이 초대 사령관이었으나 한국전쟁에서 북폭(北爆)을 주장하다가 해임되었다. 후임인 리지웨이 장군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어 해체될 때까지 사령관직을 맡았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