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영봉 중앙대 교수 ⓒ 뉴데일리
    ▲ 김영봉 중앙대 교수 ⓒ 뉴데일리

    미국이 최고로 번영하던 1950년대 협박자에 대항하는 시민의 용기를 보여준 고전적 영화가 글렌 포드 주연의 '몸값'(Ransom!·1956)이다. 아들을 유괴당한 주인공은 TV화면에 지폐를 가득 쌓아놓고 말한다. "들어라 아이 도둑놈아! 네가 요구한 이 50만달러는 너에게 절대로 도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아들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이 돈의 마지막 달러, 마지막 페니까지 너의 냄새를 맡고 추적해서 너를 법 앞에 세울 것이다."

    영화는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는 행복한 장면으로 끝나지만 주인공 자신에게는 이런 결정이 이익이 될 수 없다. 한동안 주변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미국적 시민영웅'의 상징이 되어 두고두고 리메이크됐다. 한 사회는 운명의 순간에 처한 이런 시민의 선택 하나하나가 누적돼 악당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철통같이 안전한 자주시민사회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광동제약이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캠페인)'라는 유괴범에게 잡혀 인질금을 주고 풀려났다. 언소주가 광고를 엽취(獵取)해 갖다 주려 한 매체는 자유당의 장기독재를 선두에 서서 규탄하다 장렬히 폐간당한 역사를 가진 경향신문과 '민주정론'이라 자칭하는 한겨레신문이다. 결과적으로 기업을 인질로 잡고 국민이 선택한 언론시장을 강탈하려 한 것이다. 소말리아 인질해적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행태다.

    언소주의 대표는 일단 30일 검찰에 소환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뢰배의 불매 협박같이 공동체 생존근거를 위협하는 문제에 당면하면 누구나 본업을 접고 총을 들고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광동제약의 항복은 이 사회에 시장파괴자는 승리하고 기업은 패퇴할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리해서 기업생존번영의 토대인 시장경제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좌파폭력은 우리 기업이 그동안 자초한 측면이 크다. 작년 광우병 광기가 세상을 덮을 때 좌파들은 조선·동아·중앙에의 광고차단을 통해 보수언론의 고사(枯死)를 획책했다. 상식을 가진 대기업이라면 이럴 때 '조중동'에 오히려 광고를 듬뿍 안겨 한국의 시장 우호세력이 견고함을 좌파들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숨거나 굴종했다. 좌파정권기간 한국의 대표기업들은 반기업 시민단체와 환경단체들을 찬조하거나 사외이사로 영입해 좌파의 입지와 자금원을 튼튼히 해줬다. 그때 본 단맛의 결과가 지금 언소주 같은 괴물을 탄생시키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신문들을 협박범 수준으로 타락시킨 것이다.

    오늘날 국회의 타락상도 국민이 자초한 것이다. 야당은 지금 "여당을 견제하는 것이 국민의 뜻"이라며 국회의원 스스로 국회개원을 봉쇄하고 있다. '미디어 법 철회'를 약속하면 국회를 열게 해 주겠다는데, 그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 선택하는 언론구도'를 어떻게든 막자는 것이다. 이것도 국민의 뜻이 맞는가?

    폭력은 공동체구성원이 침묵함으로써 힘을 얻고, 때로는 '정의의 행동'이란 탈까지 얻어 쓸 수 있게 된다. 광우병 광극(狂劇)은 국민이 침묵하고 대통령이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듣고 가슴 뭉클했다"고 소회하는 순간 '고귀한 국민행동'이란 인증을 얻게 됐다. 자살한 전 대통령은 국가고위층과 전국공무원이 단체 참배함으로써 '독재정권의 비운의 희생자'로 채색됐다. 이리해서 법과 공권력은 폭력을 재단할 수 없게 되고 광장과 조문(弔問)대를 점령한 집단이 '국민의 뜻'을 마구 팔아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향후 언소주의 표적이 된 삼성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자명한 일이다. 10% 미만 교수가 '교수' '대학'의 이름을 내걸고 시국 선언할 때 모든 교수가 침묵하면 안 된다. PD수첩 미디어연대 따위가 '방송탄압'을 선전할 때 모든 언론인이 침묵하면 안 된다. 이렇게 국민이 좌파선동만을 섭취해 좌파정권이 부활한 뒤에는 땅을 쳐도 소용없는 일이다.
    <조선일보 7월1일자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