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국을 살리는 계책은 남조선에서’
    (萬國活計 南朝鮮)
    -예언과 사명

    許文道前 통일부장관  asadalmd@hanmail.net

  •  <아프리카 35개국 “코리아 모델 가르쳐달라” 서울서 장관급 경협회의. 한국에 뜨거운 러브콜>(조선일보, 2010년 9월 16일 A5면)의 신문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감전당한 듯 전신의 떨림을 느꼈다.
    30년 가까이 되는 저쪽의 여의도 국풍(國風) 마당에서 귀에 주워담고는, 오래 가슴에 묻어두었던 예언,
    ‘만국활계 남조선’(萬國活計 南朝鮮)이 성취의 기약이 찼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이 떠올랐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구약, 전도서)

    이는 인간에게는 전략인 시간이, 하늘에는 부동의 섭리인 것을 말하고 있다.

    무릇 예언에는 자기실현의 능(能)이 있다 한다. 자기실현의 때를 만난 예언, 만국활계 남조선은 ‘만국(온 세계 나라들)을 살릴 계책은 남조선(한국)이다(남조선에 있다)’로 풀이되고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예언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구한말(舊韓末) 나라가 일제(日帝)에 망해 가던 러일전쟁(1904~1905년) 전후, 이 땅의 모든 민중이 악랄한 이웃 민족의 침학(侵虐)에 시달려, 어둡고 어두운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던 바로 그때, 듣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종류의 현실적 설득력도 없이 설해졌던 것이다.

    세계 사상의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성취의 때를 만난 이 예언이 우리 민족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만국에 활계(活計)를 발신하고 전파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동포를 살려내는 통일하는 주체는 한국(남조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언은 우리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
     
    전통사상에서 ‘만국활계 남조선’ 같은 것을 도참(圖讖)이라 한다.
    도참이란 그림이나 상징적 언어 등을 써서 장래에 일어날 사상(事象)을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의 백제 의자왕 20년(660년)에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新月)”고 적혀 있다. 이는 장차 백제는 기울고 신라는 번창할 것이라는 예견이었는데, 그 뒤 왕조의 흥망을 예언하는 도참으로 꼽혔다.

    지난 시대 국사학의 대가 이병도(李丙燾)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도참사상’ 항목을 집필해 놓았다. 그는 최치원이 “계림의 잎은 누렇게 되고, 곡령의 소나무는 푸르다(鷄林黃葉 鵠嶺松靑)”(곡령은 개성 송악산)로 신라의 쇠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을 들어, 이는 도참형식이지만 도참은 아니라 하고 있다.
    이유는 그 예언이 한 시대의 추이를 미리 감지하는 지식인의 통찰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국활계 남조선’ 예언의 분류가 어찌되었건, 알고 싶은 것은, 당시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온 세계를 걸고 들어가는, 즉 세계사적 과제를 도참 속에선들 끌어안는 발상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예언이라도 사람들의 사전에 없는 단어로 뭔가의 이미지를 창작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민족의 마음 밭의 맥락에서 민족차원을 넘어서는 전체 인류의 과제와 씨름해 본 적이 우리 역사에 과연 있었던 것인가. 이 답은 ‘만국활계 남조선’을 민족의 사명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확신을 줄 것이다.
    그전에 우선, 남조선 산(産) 만국활계에 세계의 이목과 관심이 어떻게 모여들고 있는가의 현황을 먼저 살펴보겠다. 그리하여 ‘만국활계 남조선’이라는 예언의 오늘의 성취 도달점을 확인해 두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온 세계의 뜨거운 눈,
    활계(活計)의 발신원(源) 한국에
     
    지난해 9월 서울에서 ‘한국, 아프리카 장관급 경제협력회의’가 있었다.
    2006년 첫 회의 때 전체 53개국에서 15개 나라만 참석했다가 이번에는 35개 국가로 늘어났다.
    회의에서는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국가적 기반사업에 대한 투자나 개발정책 등에 대한 지원 요청이 다양하게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개발 경험을 배우고 싶다”는 대합창이 있었다 한다.
    이날 오후 따로 열린 ‘한국발전경험 공유’ 세미나에는 아프리카 10여 개국의 장관과 공무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공부했다. 정부관계자는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 배우기가 과열상태에 이른 것 같다”고 했다.

    아프리카 발전의 근본방책을 한국에서 얻고자 하는 사유를 회의에 참석했던 카베루카 아프리카 개발은행 총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아프리카는 1960~70년대 한국과 비슷한 상태라 하겠는데, 한국이 지난 30년간 성장한 것을 볼 때 한국의 성공모델에서 아프리카가 배울 교훈이 많은 것이다.”
    식민지 체험을 공유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스스로의 활계를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니고 한국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도에 의하면, 2010년 11월 G20 회원국의 유일한 아프리카 나라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힐트데니스 한국주재대사는 ‘활계 남조선’과 새마을운동에 다음과 같이 관심을 보였다.
    데니스 대사는 남아공 정부가 지난 4, 5년간 경제성장의 모델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그 결과 한국이 가장 모범적인 사례였다고 하고서 “주요 관리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새마을운동의 경험을 배우게 할 생각”이라 한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나라들도 한국에 ‘활계’ 공급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브라질 정부는 주재 한국대사를 통해 그 나라의 북동부 지역에 마산수출지역 같은 수출진흥지역의 조성에 한국 정부의 도움을 요청해 오기도 했다. 미주개발은행도 ‘활계’ 공급 요청을 중개하고 있다.
    “엘살바도르에 한국형 서민주택을 공급하고, 볼리비아에서 한국처럼 중소기업을 육성하려는 데 한국 정부의 정책자문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3월 기점으로 그전 1년간 세계 20여 개국이 한국으로부터 경제개발, 경제위기 극복에 관한 정책자문을 받고 싶다는 요청이 우리 정부에 쇄도했다 한다.
    전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이 자원개발 협력이나, 발전 노하우 전수를 두고 한국과 보통이 아닌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배경으로 드는 것은, 이들 나라들이 한국과 식민지 지배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기자동차의 전지 등에 필요한 자원인 볼리비아의 리튬 개발에 일본과 중국 등도 강력한 관심을 보였지만, 파트너로 한국이 택해진 배경으로, 방한했던 모랄레스 대통령은 “한국과 볼리비아는 식민지였다는 공통의 아픈 경험이 있다”를 들었다.

    데푸방 라오스 중앙은행 부총재는 라오스 증권거래소 설립 파트너로 한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라오스와 한국 정부가 오랜 협력 관계를 맺고 있고, 두 나라가 식민지 경험 등 역사적,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조선일보, 2010년 3월 17일자). 덧붙여서, 거래소 설립을 도와주겠다는 나라들이 있었지만, 두 나라가 서로 도우며 함께 발전하겠다는 한국의 자세에 강한 믿음이 간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의 서천(西遷)
     
    요즘 세상은 IT 혁명, 바이오 테크 등 하이테크 경쟁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지만, 새마을운동의 세계성(글로벌리즘)에 주목하는 눈도 더러는 있다. 신문에 캄보디아 새마을운동 현지답사기가 실렸는데, 새마을운동의 오늘날 의미의 요점을 요령 있게 짚고 있어서, 여기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드물게 산업화의 기적을 일궈낸 성공비결 중 하나로 꼽히는 새마을운동이 캄보디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 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을 먹여 살리려고 1970년에 도입한 대표적 개발모델이 새마을운동이었다.
    이제 한국에선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던 새마을운동이 캄보디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라오스, 미얀마, 우간다, 콩고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수출돼 제2, 제3의 기적을 만들고 있다.
    학교나 도로, 병원 등을 지어주는 선진국의 증여식 원조와 달리, 정신개조를 강조하는 한국산 새마을운동이 패배의식과 타성에 젖은 빈국 국민들에게 (혼의 바닥을 흔드는·shaking of Foundation)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최규민, <조선일보> 2010.4.5일자)

    중국은 잠을 깬 사자답게 새마을운동을 철저하게 자기화하여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압축 경제성장의 견인 동력이 새마을운동이었음을 중국은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운동 시작 전에 한국 새마을운동에 대해 장기간의 사회학적 연구를 거쳤다. 그 요체가 운동 지도자들의 정신개조를 선행시키고, 이를 생활개혁과 동시진행적으로 농민 속으로 파급시키는 데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서 시작했다. 한반도의 10배도 더 되는 낙후된 대서부 지역의 개발계획을 세우고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2001년 새마을식 지도자연수교육이었다.

    중국은 새마을운동에 애심(愛心) 양광(陽光)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운동의 지도자는 전 중국 과학기술관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중국과학기술협회 류수(劉恕) 부주석이었고, 이미 <한국 신농촌운동 추진내용과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이란 논문을 집필해 놓고 있었다.
    한국 새마을운동의 대부인 김준(金準) 원장의 뒤를 이어 오래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장으로 헌신했던 정교관(鄭敎寬)씨를 중국 측은 정확하게 찾아내어, 출발부터 지도자 교육의 강의를 맡겼다. 약속된 5년간의 연수교육을 마치고 그는 <새마을운동의 서천(西遷)>(출판사: 나무의 숲)이란 책을 남겼다. 중국 측은 정 원장에게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과 특히 성공사례를 집중적으로 알려주기를 요청했다 한다.

    교육은 낙후지역인 서북부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뤄졌다. 과정에는 농촌지도자와 함께 성(省) 레벨의 공산당 청년간부,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빠짐없이 있었다. 정교관 원장은 이미 예산 가야산으로 돌아와 있지만, 그와 한팀이 되어 뛰었던 ‘흙 살리기 운동’의 정진석 회장 등이 대륙에 뿌린 새마을의 씨의 결과는, 운동의 세계화의 길 위에서 반드시 관계자들의 발로 한번 짚어져야 할 것이다.
     
    ‘활계’ 예언의 시대배경
     
    ‘만국활계 남조선’의 예언자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다.
    우리 전통사상계에서 그는 정역(正易)을 저술한 일부(一夫) 김항(金恒·1826~1898)과 함께 근세의 2대 이인(異人)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증산교(甑山敎)의 창시자이기도 한 강증산의 행적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간행의 경전인 <전경>(典經)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刊)에서 간략히 엿보겠다.

    <강증산은 동학 봉기의 땅 전북 고부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선조 중에는 이조참의와 도승지도 있었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으나 가난으로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남의 집 살이와 나무꾼 생활도 하였으며 21세에 결혼한 후에는 처가에서 훈장 노릇도 하였다. 1894년에 동학군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한다. 동학군이 왜군에게 패멸당하고, 만경들에 가득한 민중의 참상을 보면서, 광구(匡救·바로잡아 구제함) 천하의 뜻을 세운 것은 25세 때였다. 28세 때 구세사업에 도움이 있을 것을 믿고 유불선(儒佛仙) 음양참위(陰陽讖緯)를 통독하고, 이내 8도 주유에 나섰다가, 바로 연산(連山)에서 김일부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정역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1901년 31세 때 모악산의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 49일 금식수도를 하던 중 7월에 성도하였다.
    이듬해인 1902년부터 1909년 죽을 때까지 7년간 포교했다. 지역은 모악산 근방, 만경평야를 중심으로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이었다. 동학봉기의 발생지역과 겹쳐 있다.
    그의 일생에서 두드러진 사건으로는, ‘1907년 추종자 20여 명과 함께 고부경무청에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 만에, 강증산은 40여 일 만에 석방된 일’이다.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추종자들을 불러모아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 한다.>

    강증산의 주 활동기간은 25세 때인 동학봉기의 시점으로부터 강제합방 한해 전인 39세에 타계할 때까지이다. 이 기간에 청일전쟁, 명성황후 암살, 러일전쟁, 강제보호조약,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이은 3남지역 의병격화 등의 굵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만경들의 기층민중을 상대로 한 그의 주 활동공간에서 그의 혼을 세차게 흔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려본다.

    하나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에서 봉기하던 해 12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들것에 실려 압송되어 가는 장면이다. 강증산 24세 때이다. 들것은 걸었으니 만경들 건너는 데도 몇 날이 걸렸을 터이다. 강증산이 구경꾼 사이에 끼어들어 목격했거나, 보지 못했다 해도 그린 듯이 입소문이 귀에 닿았을 것이다.
    통한스러운 시대적 중압의 한복판에서, 전봉준의 수난이 언젠가는 오고야 말 민족흥륭의 서장일 것 같은 예감을 노래한 것으로 읽고 싶은 시가 있다. 시인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이다.

    눈 내리는 만경(萬頃)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며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대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이하 약)
     
    5천만이 부는 ‘푸른 기상 나팔’
     
    이 시는 강증산의 ‘만국활계’ 예언보다는 70, 80년 뒤에 쓰였지만, 시인의 영감(靈感)이 진하게 느껴진다.
    강증산은 동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아파하며 만경들의 민초들과 한 공기를 숨 쉬며 살고 있었다. 인용한 시의 첫 3연은 만경들을 북상하는 전봉준의 눈과 마주친 증산의 비창(悲愴)과 정한(情恨)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에 간 전봉준을 기다린 것은 일본공사의 재판에 의한 처형이었다.
    왜세(倭勢)에 침학되어 사지가 거덜나고, 단말마의 신음 속에 몸부림치는 조선 민초의 상징이 그 들것 위에 있었다.

    전봉준의 쏘는 듯한, 한에 찬 눈길이 한번 더 세차게 증산을 그가 받은 사명 앞으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위 인용시의 마지막 연은 성취된 ‘만국활계 남조선’의 전초적 이미지 같다 하면 어떨까.
    3천 리의 민초들이 들떠 일어나 푸른 기상나팔 불며 불며 서쪽으로, 바다로, 천지로 내닫는 모습은 ‘만국활계 남조선’의 구체상이라 할 만하다.

    온 세계 도상국(途上國)을 향해 5천만이 부는 푸른 기상나팔, 그것이 바로 ‘만국활계 남조선’이다.
    증산이 ‘만국활계 남조선’을 예언한 시점은 〈전경〉에 적혀 있지 않다. 그가 31세 때 대원사에서 49일 금식으로 성도한 다음은 아니고, 의병 혐의로 40일 고초를 겪은 1907년과 타계한 1909년 사이인 것으로 짐작된다. 종도들과 금산사(金山寺)에 들렀을 때 행한 예언의 구송(口誦) 전문은 <전경>에 다음과 같다.
     
    만국활계 남조선(萬國活計 南朝鮮)
    청풍명월 금산사(淸風明月 金山寺)
    문명개화 삼천국(文明開化 三千國)
    도술운통 구만리(道術運通 九萬里)

    (지난여름 전주에 들렀다가 모악산 산록 증산도 관계의 신축 중인 교당 현장에서 만난 한 간부로부터 <전경> 한 권을 얻었다. ‘만국활계 남조선’을 잘 알고 있었는데, 종도들은 그 예언을 치병(治病)과 관련시켜 풀이하고 있다고 했다. ‘문명개화 삼천국’이 따라 붙고 있으니까 활계는 국가와 유관할 것이다.)

    의병투쟁과 ‘만국활계 남조선’
     
    증산이 타계하기 2년 전인 1907년은 대한제국이 실질적으로 망한 해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퇴위케 하고, 군대를 해산했으며, 협약이란 모양을 꾸며 외정권(外政權)에 이어 내정권(內政權)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전토에서 반일의병이 일어났다.

    <전경> 전체를 통해 당시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이름이 보인다.
    송시열은 한 종도가 그 인물의 크기를 들먹이는 정도로 언급이 많지 않다. 최익현은 74세인 1906년 보호조약으로 깔고 앉은 일제에 항거하여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해서인지 취급이 무겁다. 증산은 같은 해에 최익현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일심(一心)’을 높이 보는 언급을 하고 있으며, 대마도에서 순국하였을 때는 만장을 쓰기도 했다.

    어쨌든, 조선조 500년의 주자학은, 이적(夷狄)으로 보았던 청(淸)이 명(明)과 교체되면서, 중화(中華)를 지리개념에서 분리하였고, 조선이 작지만 중화(中華)라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궁극의 자존의식에 도달했다.
    조선이 인류의 도(道)의 본산이라는 얘기다. 소중화 의식은 18세기 말엽 서학(천주교)을 만나 이를 배척하고 주자학적 가치체계를 지켜내겠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의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고, 1880년대 초 대(對)서양 수교를 앞두고 척사(斥邪)상소운동으로 소리를 내고, 더 내려와서는 한말 반일의병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위정척사, 조선이
    인도(人道)의 본산
     
    송시열은 소중화 사상의 중심 인물이었고 거유 최익현은 반일의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두 사람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거장 이항노(李恒老·1792~1868)가 중간에 들어 제자 스승 관계로 학통이 이어진다. <전경>의 행록에 경향이 뚜렷하면서 서로 맥락이 닿는 두 인물의 이름만 보인다는 것은 강증산이 숨 쉬었던 에토스(정신·사상 풍토)를 짐작게 한다.
    위정척사적 에토스의 어디쯤에 ‘만국활계’처럼 조선땅에만 그치지 않고 온 세계를 커버하겠다는 세계지향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 알고자 한다.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 보니, 서양과 일본에 대해 콤플렉스 많은 개화지식인들이 먼저 역사해석권을 행사했고, 그 지식체계를 우리는 당연한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근대 초입 서양문화에 대한 유학의 대응방식인 위정척사에 대한 시각이 특히 왜곡이 심하지 않았나 한다.
    식민지 학자들은 위정척사에 대해 완미, 지둔, 열등의 이미지를 오래 퍼뜨렸고, 많은 한국사람들도 휩쓸려온 것 같다. 이 정도를 염두에 두고 본다.

    위정척사의 주장을 평이하게 압축해 본다.
    대표적인 것이 양이금수론(洋夷禽獸論)이다. 즉 서양사람은 새나 짐승이라는 것이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인류이고, 서양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오품(五品: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윤리 및 예악형정(禮樂刑政·국가적 제도 문물)의 가르침 등의 유교적 문화야말로 사람이 사람 되는 소이(所以)이고 인도(人道)라는 것이다. 남녀무별(無別), 상하무별로 대표되는 도덕이 부재한 양이(洋夷)는 금수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조선, 중국과 서양의 대립은 인류와 금수의 대립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양무력이 조선을 공격하던 그때, 힘의 유무를 따져 저들과 화호(和好)한다면 소중화(小中華)로 유일하게 버티는 조선마저 금수가 되는 것이고 인리(人理)가 망해 인류의 생존 자체가 부정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인류와 문명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는 중대사였고 보면 절대적 대결 이외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피아의 힘 관계를 고려한 일본식의 원칙 없는 상황주의적 대응은 위정척사파에게는 ‘아동(兒童)의 견(見)’일 뿐이었다.
    문명과 인류생존의 근원적 위기를 앞에 하여서는 승패를 염두에 둔 투쟁은 있을 수 없었고 ‘국가의 존망 운운도 이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氣의 진화론적 폭발
     
    한 일본의 연구자가 19세기 중엽, 서양과 맞선 한일 양국의 양이(攘夷)문제를 두고서 제시된 이념적 근거를 대비하여 보였다. ‘(日本)신주(神州)야말로 대지(大地)의 원수(元首)이고 만국(萬國)의 강기(綱紀)’라는 등으로 “일본 중심의 주장일 뿐이었다. 서양의 압력에 대해 우선 동아시아 문명을 짊어지는 입장에서의 대응을 전면에 내세운 조선의 경우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吉野 誠, <明治維新と征韓論>, 明石書店)

    조선조 500년의 유학은 헌팅턴 이론으로 보면 서양문명과 충돌했을 때 인류문명의 수호자 자리에 서고자 했다. 조선유학은 위정척사에 이르러 조선 한 나라를 넘어 인류문명을 호지(護持)해 내려는 보편주의적 지향을 명확히 드러냈던 것이다.

    최익현을 통해 위정척사의 보편주의적 에토스를 이인(異人) 강증산은 감지하고도 남았고, 숨 쉬었을 것이다. 증산의 혼은 조선 일국을 넘어 만국 위에, 광구 천하(天下)의 입지 때에 일찌감치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편주의적 문명지향의 혼을 무력이나 힘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100년의 우리 민족사는 보여주고 있다. 물리적 형체야 아무리 꺾인다 해도, 그 혼이야 차(此) 일시 민족의 수맥에 지하화하여, 지구의 한랭기에 한 1억 년 진화가 정지, 압축되었다가, 그다음 연대기에 진화론적 폭발이 있듯이, 때가 오면 증산 같은 ‘만국활계 남조선’의 예언적 설계 속에서 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백 년을 성리학만 너무 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이 자라지 못한 말도 했지만, 한 오백 년 그렇게 프린시플(principle) 추구를 통해 형이상적으로 끝을 모르고 연마된 두뇌회로가 민족사의 빙하기에 500년 묵은 허드레 남루는 이제는 다 벗어 던지고, 민족의 DNA를 통해 오늘 IT 혁명시대에 나노적으로 기가적으로 작동이 시작된 것 아니겠는가. 고난의 민족사를 생명(仁)으로 천하에 갚게 되는 이 축복,
    ‘만국활계 남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