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림댁은 한일 월드컵 열기가 채 식지 않은 2002년 9월 한국에 왔다. 중국 조선족 동포가 아닌 한족(漢族)이다.
    남편에 대한 얘기를 아꼈다. 질문에 대답 대신 재봉틀에 머리를 숙인 채 재봉질만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안산 이주민센터 관계자가 보다 못해 거들었다.
    “남편이랑 헤어졌어요.”
    “아, 사별하셨나요?”
    “아니요. 헤어졌어요. 구타가 심했던 모양이에요.”
    재봉틀에 숙인 길림댁의 머리가 더 밑으로 숙여졌다.
    “그럼 아이는요?”
    “...”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전철 안산역을 빠져나와 만난 거리는 한국이 아닌 것 같았다. 중국음식이며 동남아 음식을 파는 점포들이 줄이어 서있고 전화카드를 취급하는 상점도 많았다. 아니, 그 둘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길림댁을 만난 세밑 안산은 추웠다. 칼바람이 부는 한 골목에 자리한 작은 공예품점에서 길림댁은 중국 공예품에 달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돈은 얼마 못 드려요. 그저 정식으로 취업을 하지 못할 형편의 다문화가정 주부들이 소일처럼 나와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공예품점은 안산이주민센터가 운영을 하는 곳이다.
    그럼 길림댁은 소일처럼 나와 받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얘기인가?
    그러고 보니 입성도 차가운 바람을 견디기엔 너무 허술해 보인다.
    “다들 어려운데요, 뭐...”
    말꼬리를 흐리며 소곤거리는 말에서 삶의 고단함이 물씬 묻어난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세상이 됐다.
    서울시만 보아도 2008년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총 152개국 25만 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한다. 1998년 5만 1000여명에 불과했던 서울 거주 외국인이 10년 새 5배로 늘었다. 지역별로는 영등포구가 전체의 13.9%인 3만 5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구로구가 0.9%(2만7901명) 금천구 7.0%(1만 7924명)순이다.

  • ▲ 안산이주민센터가 운영하는 공예품점에 선 결혼이민여성 길림댁(오른쪽)과 류채연씨(왼쪽). ⓒ 뉴데일리
    ▲ 안산이주민센터가 운영하는 공예품점에 선 결혼이민여성 길림댁(오른쪽)과 류채연씨(왼쪽). ⓒ 뉴데일리

    하지만 급증하는 그만큼 다문화가정의 문제점 역시 커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정의 시작이 대부분 매매혼방식의 국제결혼이라는 것. 일반적으로 국제결혼이 업체의 중매를 통하여 결혼이 성사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제결혼업체들은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매매혼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터뷰를 통해 여성의 국적이나 외모 선택에 대해 설명을 듣고 국적이 정해지면 남성은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200명에 이르는 여성의 프로필을 받아보고 10~20여명의 여성을 선택해 현지로 간 다음 최종 한 여성을 신부를 맞이하여 데려오는 방식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돈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와 ‘얼마나 예쁘고 착한 여자인가’이다.
    서로의 조건이 맞아 결혼이 성사되면 그 뒤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남편들은 ‘내가 사온 사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방적인 폭력과 폭언을 일삼으며 모든 책임을 여성들에게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길림댁 역시 이런 경우다.
    지난해 6월 김유경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월간 정책연구지 ‘보건복지포럼’에 실은 ‘다문화가족의 실태와 정책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결혼이민자가 겪은 폭력 발생률은 47.8%로 나타났다. 두 명 중 한 명 꼴로 폭행을 당하면 산다는 얘기다.
    폭력 유형별로는 물건을 던지거나 내리치는 신체적 폭력이 30.6%로 가장 많았고, 모욕적인 말을 해 괴롭히는 정서적 폭력(28.9%), 가족을 돌보지 않는 등 무관심하거나 냉담하게 대하는 방임(19.6%), 경제적 착취(12.6%), 성 학대(6.6%)가 뒤를 이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길림댁과 나란히 앉아 재봉틀을 돌리던 류채연씨는 중국 청도 출신. 길림댁과 마찬가지로 한족이다. 그런데 얼굴이 밝다. 다섯 살과 네 살 난 두 딸을 키우고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결혼은 다르다. 한국에 취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다 연애를 해 결혼에 골인했단다. 출발의 차이가 한 사람의 반평생 넘는 시간을 좌우한 경우다.

    결혼이민 여성의 가정폭력 피해는 제도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점도 있다.
    우선 국내법은 혼인 상태가 최소 2년이 지나야 귀화 요건을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의 취지는 위장결혼을 막고자 하는 것이지만 이 탓에 결혼이민 여성들이 한국인 배우자에게 종속되거나 권력관계가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혼인상태 2년이 지나야 귀화자격을 갖고 다시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야 귀화를 할 수 있다.
    혼인상태 2년의 유예기간 중 이주여성의 법적 신분은 철저히 한국인 남편을 통해 보장된다. 남편의 사인이 없으면 매년 받는 출입국사무소에서의 체류 연장이 불가능하다. 결국 이런 제도가 부부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들고, 이주여성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혼 초기의 가정 파탄과 이혼 증가는 다문화가정만이 아닌 일반적 현상”이라며 “국제결혼 후 부적응 등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할 부분이며, 사회적 지원과 별개의 문제인 국적 취득은 결혼과 동시에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현재 2년인 유예기간 조항을 삭제하고 ‘혼인한 상태로 한국에 주소가 있는 자’로 귀화 요건을 바꿔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문화가정 2세들의 그늘도 깊다.
    생업에 바쁜 부모, 특히 한국말이 서툰 어머니로부터 정확하고 충분한 언어습득 기회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문제도 지나칠 수 없다.
    어눌한 말투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고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발달장애와 학습부진으로 이어져 결국 학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많다. 피부색이 다른 데서 오는 편견과 소외로 깊은 상처를 받기 쉽다.
    경기도 부천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한 다문화가정 여중생은 친구들로부터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놀림을 받고 학교 옥상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위기에 노출된 다문화 가정 2세들도 지난해로 5만 8000명을 넘어섰다. 2만 4000여명은 이미 초중고 학령기를 맞았고, 3만 3000여명이 취학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다문화가정은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다.

    안산이주민센터는 ‘코시안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코시안’(Kosian)은 Korean과 Asian을 합친 말. 단순한 단어의 결합을 넘어 ‘평등 됨(=)’과 ‘하나 됨(+)’의 철학과 인권의 사회적 실천(PRAXIS)의 뜻을 가졌다. 이 코시안의 집에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안산이주민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정명자 목사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결혼이민여성이나 그 자녀들이 겪는 아픔이 많다”고 말했다.

    다시 길림댁을 만나 보자.
    새해 소망을 물었다.
    “보육교사가 되고 싶어요”
    보육교사? 다시 안산이주민센터 관계자가 배경설명을 했다.
    자신과 같은 결혼이민여성들을 교육하는 시설에서 아이들을 볼보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었다. 지난해 한양대 안산캠퍼스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올해 다시 도전할 계획이란다.
    아팠고 아픈 비슷한 처지의 남들을 돕겠다는 꿈이다.
    2010년 벽두, 길림댁은 남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