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픈” 코미디, 민중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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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1995년생)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2학년 재학 중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회원
(사)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이런 단어가 유행했다.
 ‘웃프다’, 웃기지만 슬프다는 뜻의 신조어이다.

이 단어는, 슬픈 일을 웃으며 넘기고 싶지만 단순히 넘겨지지 않을 때 드는
복합적인 감정을 잘 표현해준다.
영단어 “Black comedy”와 비슷한 표현이라고 할까. 

 최근, ‘웃프다’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주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민중총궐기’ 시위이다.

 그날, 나는 광화문에 있지 않았다.
시위대를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SNS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다.
하지만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와이어를 설치하여 사람의 힘으로 버스를 끌어냈고,
직사하는 물대포에 저항하며 시위를 진행했다.
밤에는 추위와 어둠으로부터 지켜줄 횃불을 들었고,
심지어 무슨 목적에서 였는지 경찰버스 주유구에 불을 붙였다.
불법시위로부터 시민을 지키려는 소위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압제를 압제하려 시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럿의 입에서 감탄을 뿜게 했다.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서, 나는 그들의 열정을 보았다.
이상(理想)을 향한 그들의 열정. 시위대들은 순수이상주의자들인 듯하다.
비록 그들의 이상이 과격하고 현실과 괴리가 있지만,
청와대로 쳐들어가 “독재자의 딸”을 끌어내고
재벌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려 보자는 그들만의 이상을 위해,
 ‘총궐기’까지 하는 열정은 무기력한 내가 본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본받을 만한 열정을 가진 시위대들이었지만,
본받을 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진 못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강도들처럼, 그들은 철저히 얼굴을 숨겼다. 

사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11대 요구”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청와대로 쳐들어 가봤자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없고,
재벌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남의 것을 뺏는 비겁한 일임을.
자신의 열정이 실현불가능하고 비겁한 일에 낭비된다는 것 또한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슬픈 일이다.
허비되는걸 알면서도 의미 없는 일에 열정을 쏟는 생(生)은.
하지만 이미 ‘민중총궐기’의 선전포고를 했기에 싸움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싸움을 외면할 수 없는 자들은 애써 그들의 슬픔을 외면했을 것이다.
‘씨익’ 한번 웃어보며 말이다. 

하지만 참아내며 지어낸 웃음 속엔 참을 수 없는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싸움이 헛된 일임을 자신도 모르게 자각하게 되는 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하는 눈물. 맨 정신으론 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위현장 곳곳에 술병이 발견되었나 보다.
그렇게 그들은 슬픔을 웃기는 코미디언들이 되었다.
  • ▲ 도로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옆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지난 14일, 시위가 벌어진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는 술을 마시는 시위대의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사진=한국경제
    ▲ 도로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옆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지난 14일, 시위가 벌어진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는 술을 마시는 시위대의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사진=한국경제
    ‘웃픈’ 그들의 시위가 상식을 벗어난 한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민중총궐기’. 주말의 안방극장을 장식하는 희극들처럼,
    토요일에 벌어진 시위는 웃픈 코미디언들의 축제였다.
    털털하게 웃어보지만, 곧 허탈해 지는 얼굴.
    웃음으로 넘기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공허한 Black comedy. 

    이번 민중총궐기를 보며 만 스무살이 된 나의 마음에 하나의 바람이 솟아났다.
    공허하고도 허탈한 그들의 슬픈 웃음이 그쳐지는 바람. 
     더 이상 그들의 헛된 정열로 시민을 지켜주시는 분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들의 슬픈 웃음으로 시민들의 행복한 미소가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허탈한 웃음을 포기하고 보람 있으며 행복한 웃음을 추구할 때,
    그들도 행복해지고 우리도 행복한 서로의 win-win이 찾아올 것이라는,
    너무 오래 가져와서 이제는 진부해버린,
    이 또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어서 씁쓸하면서 웃픈,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