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코파이로 세상과 정을 나눈 사람: 담철곤
  • 담철곤 오리온 제과 회장.
    ▲ 담철곤 오리온 제과 회장.
    외상 거래가 일반화된 중국에서 술/담배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선금 거래가 이루어지는 품목.
중국에서 결혼식에 참석해준 고마운 하객들에게 답례품으로 전달하기도 하는 제과류. 
러시아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 오면 원 없이 먹고 간다는 그것.
개성공단에서 야근수당으로 지급되는 유일한 상품이자 화폐역할을 하는 유일한 상품.
베트남의 명절 제사상에 오르는 최상의 상품. '코리아는 몰라도 OOOO는 안다'

이런 문구를 들으면 떠오르는 제품이 있는가? 아직도 모르겠다면 마지막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제 모두 눈치 챘을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노래의 주인공은 초코파이다. 초코파이는 오늘날에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국민과자이다. 

출시 첫해인 1974년, 10억 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기록갱신을 하여 2003년 9월에는 제과업계 “단일제품 사상 처음”으로 누적 매출 1조 원을 달성한다. 제과업계에서 1조원 이상 팔린 제품은 오리온 초코파이가 유일하다. 이후 초코파이 국내 누적 매출액은 2013년 2조 원을 돌파하였으며, 기록갱신은 현재진행형이다. 판매수량으로 살펴보면 현재 총 162억 개가 판매 되었으며 한 줄로 세우면 89만km, 지구 21바퀴 반이라는 엄청난 양을 보여준다. 이 초코파이 하나로 세계를 향해 뛰어든 경영인이 있다. 바로 오리온 그룹의 담철곤 회장이다.

오리온의 시작은 처음부터 화려하지 않았다. 담 회장의 장인이자 창업자인 이양구 회장이 1956년, 당시 국내 2위의 제과업체인 풍국제과를 인수하면서 동양제과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시작하였다. 이후 1957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캔디제조 시설을 도입하였으며 건빵, 하드비스킷, 웨하스, 드롭프스 등의 히트작품을 출시한다. 그러나 1971년 9월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신청으로 부도에 직면하지만 초코파이를 출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당시 동양제과(현 오리온)는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에 동양제과를 주목해봄직 하다.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 이후에 찾아온 위기상황, 이를 돌파할 방안을 찾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 풀어야할 숙제이다. 그리고 동양제과의 위기돌파 과정에서 발현된 기업가정신이야말로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기업가정신에서 말하는 기업가란 새로운 가치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도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기업가정신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업가정신은 국가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일자리 창출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면 초코파이도 없었다.

    오늘날 오리온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촉매제 초코파이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1973년 오리온의 김용찬 과자개발팀장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먹고 영감을 받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파이는 바삭해야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넘어 부드럽고 촉촉한 파이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딱딱한 비스킷 대신 부드럽고 촉촉한 초코파이가 탄생한 것이다. 초코파이는 출시 첫해부터 매년 100%라는 엄청난 성장을 달성한다. 이후 1989년 창업주 이양구 회장의 타계 이후에 담 회장은 동양그룹에서 동양제과 한 회사만을 물려받는다. 

    동양제과의 이러한 개발은 당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된 기업문화가 큰 몫을 하였다. 창업주 이양구 회장은 당시 가난한 대한민국에서 식품 제조업을 통하여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기업은 그 존재가 아니라 기업이 남겨 놓고 가는 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그의 철학은 동양제과를 좀 더 높이보고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기업문화를 형성하였고 조직원 모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게 만든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그 부산물이 바로 초코파이인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때까지 담철곤 회장은 오리온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오리온 그룹으로 이끈다. 바로 중학교 시절에 만난 현 이화경 부회장과의 10년간의 연애 끝에 1980년 결혼을 하면서 그는 동양그룹에 입사한다. 이후에 동양시멘트에서 구매과장에서 동양제과 구매부장, 사업담당 상무이사를 거치면서 경영에 대한 전면적인 실무를 배우고 익힌다.

    높은 시장점유율로 안정적인 것만 같았던 담 회장의 행보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동양제과의 히트상품 초코파이에 대한 타사들의 모방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바로 제품명을 ‘초코파이’로 지으면서 상품등록을 하지 않은 것이 위기가 되어 버린다. Coke가 콜라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초코파이는 어느덧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성공에 국내의 경쟁사들은 초코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제과시장에 뛰어든다. 경쟁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오리온의 초코파이를 위협했고, 치열한 경쟁상황이 전개되었다. 오리온의 위치는 흔들렸고 큰 타격을 입었다. 오리온 내부에서는 초코파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담철곤 회장은 남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자사의 마케팅 전략의 부재로 타사의 모방초코파이가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오리온이 택한 전략은 감성마케팅 전략이었는데 선생님, 경비원, 삼촌 등을 소재로 한 ‘정’(情)시리즈 광고가 그것이다. 이처럼 소비자 마음에 자리 잡는 한 단어를 심음으로써 경쟁제품과 차별화 할 수 있었고 ‘초코파이=오리온’ 이라는 등식을 성립한다. 

    오리온의 이러한 마케팅 전략은 국내를 넘어 세계시장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 판매되는 초코파이 포장지에는 인(仁)을, 일본에는 미(美)를, 베트남에선 ‘정’을 의미하는 ‘Tinh'이라는 문구를 삽입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성공이었다. 2007년 1414억 원에 불과하던 중국 매출은 2012년 중국에서만 1조 원를 넘는 매출을 올린다. 이는 국내 매출보다 많은 액수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자에게 위기는 또 다른 축복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담철곤 회장은 창조적 발상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다른 관점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고 이에 대한 남다른 대응방안을 내놓는 것이 기업가에게 필요한 창조적 발상이다. 이러한 창조적 발상이 남들과는 다른 경쟁우위를 만들어 내고 또 다른 기회로 바꾸는 역량을 발휘한다. 이보다 더 기업가정신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말이 있는가? 타사의 모방정책에 오리온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 곳곳에 오리온 초코파이만의 차별화된 브랜드로 세계적 기업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만든 것이다.
  • 동양제과에서 오리온으로 

    초코파이의 위기를 해결하면서 담철곤 회장은 큰 결심을 한다.
    바로 2002년 동양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하면서 새롭게
    오리온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동양제과를 중심으로 16개의 회사를 동양그룹에서 계열분리하면서
    오리온그룹이 출범했다. 동양그룹이 금융, 시멘트, 건설에 집중하는 동안에 오리온은 엔터테인먼트에 집중한 것이다. 

    담 회장은 엔터테인먼트를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정하면서 오리온그룹을 재편한다. 제과을 넘어서 오리온이 잘 할 수 있는 분야, 그리고 시너지를 찾을 수 있는 분야가 엔터테인먼트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업의 핵심 계열사로 안정적인 매출과 현금을 창출하는 제과를 중심으로 영화와 외식사업으로 그 범위를 넓혀나갔다. 메가박스, OCN, 베니건스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그 범위를 스포츠 분야까지 폭을 넓힌 것이다. 

    언뜻 보면 제과와 엔터테인먼트는 전혀 무관한 사업들이며,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라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담 회장은 여기서 중요한 공통점을 봤다. 소비자들이 즐기고 먹고 쉬면서 하는 모든 문화관련 사업이란 것이다. 이러한 분야는 남들과는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른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이윤의 기회를 포착하고 고도의 계산과 치밀한 계획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기업가정신의 또 다른 단면이다. 이러한 담 회장의 사업 확장 비전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를 향한 글로벌 경영의 시작

    국내 문제를 해결하면서 담 회장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한다. 바로 해외진출이다. 담 회장은 자신이 화교출신이라는 배경을 이용하여 중국시장에 진출한다. 당시 한중수교조차 이뤄지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과감한 결정이었다. 1991년 중국시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중국사무소를 내면서 중국진출을 본격화 한다. 당시 담 회장은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직접 중국시장 답사를 하면서 주위에서 독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담 회장이 얼마나 중국시장에 기업의 사활을 걸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현지에 뼈를 묻어라”라고 현지화를 강조하는 담철곤 회장은 소수의 관리자를 제외한 생산·영업 직원의 99%를 현지인들로 채용하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중국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베트남으로 확장됐다. 오리온 베트남법인은 담철곤 회장의 주도 하에 현지 고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들과 공감하는 데 주력했다. 오리온은 제품 포장과 다양한 광고 및 프로모션 활동을 통해 현지 고객들과 친근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오리온은 2005년에 해외시장 진출이후 처음으로 매출액 1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포카칩, 스윙칩 등을 스낵시장 매출 1위로 등극시키며 해외공략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