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는 이승만의 통일전쟁, 휴전일을 ‘통일의 날’로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장,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

    올해 7월 27일은 휴전 62주년, 대한민국은 이날도 까맣게 잊어버린지 오래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두 번 데모를 하였다. 1953년 중학교 입학직후 벌인 ‘휴전반대’ 데모, 1960년 대학2년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4.19 데모가 두 번째이다.
    시골 초등학교 졸업 국가고시에서 군(郡)수석을 거머쥐었지만, 스탈린과 김일성의 6.25침략전쟁 통에 서울 진학을 포기한 소년은 난생처음 플래카드를 들고 읍내 거리를 누볐다.
    <38선은 없어졌다. 휴전 결사반대. 38선 대신 압록강을 달라. 38선 대신 두만강을 달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여러개 구호를 번갈아 들면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몇 달 동안 데모를 해야 했다. 이때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결사적인 데모를 하였다.
  • ▲ '38선 휴전 결사반대' 외치는 데모대.(1953)
    ▲ '38선 휴전 결사반대' 외치는 데모대.(1953)
     ▶소련의 계획적인 북한군 양성으로 무력을 갖춘 김일성은 38선 일대와 황해도 옹진반도에 걸쳐 끊임없는 도발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북한군의 군사훈련 겸 남침전쟁 연습이었다.
    그것도 외면한 미국이 남한에서 전면 철군하고, 중국을 모택동이 장악하자 D-데이는 결정되었다. 1953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기습침략, 오전 10시에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면남침’을 확인하고 즉각 주한미국대사 무초(Muccio)를 경무대로 불렀다.
“적의 남침으로 한국이 제2의 사라예보(Sarajevo: 세계1차대전 도화선)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 위기를 이용하여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이승만은 역설하였다. 탱크 한 대 없는 대한민국이 300대의 소련 탱크를 어찌 막을 것인가. 
소련의 38선 고착화 순간부터 결심하였던 남북통일을 미국이 도와주면 이 전쟁을 통하여 완성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한 이승만. 6.25가 김일성의 통일전쟁에서 ‘이승만의 통일전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승만은 다음날 미국무성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전면지원을 요청하였다.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이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대사는 낙담하여 울먹였다.>-(트루먼 회고록)
  • ▲ 6.25 직후 주한미국대사 무초(왼쪽 두번째)와 미군 관계자들을 불러 결사항번과 한미공동작전을 논의하는 이승만 대통령).
    ▲ 6.25 직후 주한미국대사 무초(왼쪽 두번째)와 미군 관계자들을 불러 결사항번과 한미공동작전을 논의하는 이승만 대통령).
  • ▶지난 6월24일 KBS가 6.25의 65주년에 맞춰 “이승만은 전쟁이 나자 일본 망명을 추진” 운운 공산당식 날조모략 방송을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대통령 이승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돌맹이나 몽둥이라도 들고 나와 싸울 것이다”며 결사항전의 총력전 태세를 공표하고 전쟁지도에 나섰다. 6월27일 유엔 안보리 ‘침략’ 결의안 채택에 따라 미국은 해군과 공군을 먼저 파병하고 30일엔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통일의 걸림돌 ‘분단선’인 38선 무용론, 페지론을 들고 나왔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의 후원으로 북한정권이 무력 남침한 이상, 38도선은 존속할 이유가 없고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전쟁 이전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편지를 보내 “유엔군이 반드시 38선을 넘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멈추어선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일권 총장에게 “38선은 국군이 먼저 돌파하라” 명령하였다. 유엔군은 뒤 따를 수 밖에 없었다.
  • ▲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수용소를 나오고 있다.(1953.6.18)
    ▲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와 태극기를 들고 수용소를 나오고 있다.(1953.6.18)
  • ▶압록강에 다다른 군국이 보내온 압록강 물을 마신 기쁨도 잠시, 중공군 100만이 밀고 내려오자 미국은 당황하였다. 이승만은 그러나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유엔 안보리가 중국도 ‘침략자’로 규정하자 무릎을 쳤다. 통일전쟁에 소극적이던 미국과 유엔이 정면대결을 벌이면 남북통일은 보다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국전쟁 휴전’을 대선공약으로 들고 나온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 스탈린이 죽으면서 휴전협상은 본궤도에 올랐고 처칠의 영국과 인도등 영연방국들이 트루먼을 압박, 휴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국민을 동원하여 “휴전 결사반대”를 외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 미국은 군사작전(Ever Ready Operation)까지 준비하였다. 이승만은 “죽일 테면 죽여라,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며 ‘반공포로 석방’ 카드로 휴전 협상을 깨면서 ‘단독 북진 통일’을 양보하지 않았다.
    “국토분단고착 반대, 민족분단고착 반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대로 휴전하면 국토통일의 기회는 다시 없다며 목숨을 내놓고 미국과 정면 대결하였던 것이다.
    미국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단독북진만은 말아 달라”면서 이승만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한미 동맹과 한국군 육성, 미군의 휴전선 주둔 ‘연계철선’이다.
  • ▲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그는 "공산군과 싸우는것보다 이승만 대통령과 싸우는 것이 몇배 힘들었다고"고 말했다.
    ▲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그는 "공산군과 싸우는것보다 이승만 대통령과 싸우는 것이 몇배 힘들었다고"고 말했다.
  • ▶이승만은 끝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한국군 단독북진 통일의 길을 열어두는 동시에,
    미국과 공산권에 ‘블확실성의 협박 카드‘로 남겨서 대한민국 국력강화에 활용하였다.
    북한정권은 7월27일 휴전일을 ’승전절‘로 기념하고 주민들의 사상단속의 날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군이 38선을 넘던 날 개마고원으로 줄행랑을 쳤던 패배자가 김일성이다.
    이승만이야말로 미국과 유엔군을 동원하여 공산군을 물리쳤고 ‘한미동맹’을 관철시켜 국가안보와 아시아 평화까지 쟁취하였으며, 한국군을 통일군대로 키워낸 3중 승리의 영웅이다.
    자유통일이 절박한 대한민국은 이제라도 7월 27일을 <통일의 날>로 제정하여
    국내 및 국제간 조건 정비와 국민정신 통합육성에 매진하기 바란다. 
  • ▲ 휴전협정 직후 1953년 8월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 하는 한미 외무장관 뒤에서 키져보는 이승만 대통령. 앞죽 왼쪽 변영태 외무장관, 오른쪽 덜레스 미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과 조지워싱턴대학 및 프린스턴대학교 동창생이다.
    ▲ 휴전협정 직후 1953년 8월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 하는 한미 외무장관 뒤에서 키져보는 이승만 대통령. 앞죽 왼쪽 변영태 외무장관, 오른쪽 덜레스 미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과 조지워싱턴대학 및 프린스턴대학교 동창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