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나이글스? 이젠 중독성 강한 야구 '마리한화'
  • ▲ 김태균 선수와 최진행 선수(오른쪽).ⓒ한화 이글스
    ▲ 김태균 선수와 최진행 선수(오른쪽).ⓒ한화 이글스

    【뉴데일리 스포츠】한화 이글스가 창단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1985년 창단한 한화는 30살이 된 2015년 과거 선배들이 일궜던 영광에 도전한다. 

    한화는 2009년 꼴찌, 2010년 꼴찌, 2011년 꼴찌 앞잡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화약을 만드는 한화그룹이 고용한 독수리들은 6년 이상 불발탄이었다.

    2015년부터 김성근 감독(72)에게 사령탑을 내준 한화는 30일 현재 승률 5할2푼2리를 기록하며 SK 나이츠와 공동 5위를 형성하고 있다. 6년간 꼴찌 아니면 꼴찌 앞잡이만 하던 한화가 4개 팀(LG, KIA, NC, kt)이나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2015시즌(Season) 한화는 선발투수 안영명(31·3승)과 마무리 투수 권혁(32·4세이브)의 호투와 선두 타선인 김경언(33·타율 0.361)과 이용규(30·타율 0.333)의 높은 타율, 중심 타선에서 김태균(33·홈런4개)·최진행(30·홈런4개)의 장타까지 모두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꼴찌 한화 이글스를 지난 6년간 '화나이글스'라고 불렀던 팬들은 올해 승승장구하는 한화 이글스를 '마리한화'라고 부른다. '마리한화'는 대마의 잎이나 꽃을 원료로 만든 마약인 마리화나(Marihuana)만큼 한화의 야구가 중독성이 강하다는 표현이다.

    한화의 변화가 김성근 감독의 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화를 변화시킨 김성근 감독의 무기는 훈련과 전술이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를 달련시켜 강팀을 만드는 힘든 과정을 지난해 겨울 끝냈다. 시즌이 시작된 지금은 강팀을 이끌 전술을 구상하는게 김성근 감독의 일이다. 

    김성근 감독은 2008년을 끝으로 6년간 넘어보지 못한 승률 5할을 현재 기록하고 있다. 강팀은 선수가 만들지만 승리는 감독이 만든다. 김성근 감독이 대단한 이유는 강팀을 만드는 과정부터 전술까지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사령탑이기 때문이다.  

  • ▲ 김성근 감독.ⓒ한화 이글스
    ▲ 김성근 감독.ⓒ한화 이글스

    김인식 감독이 키웠던 독수리도 승률 5할 4년 연속 점령

    한화는 1986년 프로야구 1군 무대에 데뷔했다. 1988년 승률 5할7푼9리를 기록하며 강팀으로 자리매김했고 1989년과 1992년에는 승률 6할을 넘어서기도 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한화는 2000년부터 부진의 늪에 빠졌다.  

    한화는 1999년 이희수 감독(67) 아래서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둔 후 우승을 견인한 투수 정민철(43)이 일본에 진출했고 노장 장종훈(47)의 타격감도 급격히 저하됐다. 한화는 2001년 강타자 김태균을 얻으며 장종훈의 빈자리를 채웠지만 정민철을 대체할 투수는 없었다. 

    이광한(67), 유승안(58) 감독이 이끌었던 2004년까지 4할대였다.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소 5할을 넘어야 플레이오프를 바라볼 수 있고 플레이오프에 나서야 한국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에서 4할 승률은 감독 경질의 이유가 충분히 됐다.  

    2005년 김인식 감독(68)은 한화를 맡았고 승률 5할1푼2리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김인식 감독은 2006년 괴물투수 류현진(28)을 얻었고 2001년 일본에 진출했던 특급 마무리 구대성(46)까지 얻었다. 그해 김인식 감독은 한화를 이끌고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승률 5할의 선발투수 류현진과 특급 마무리 구대성, 3할 타자 김태균까지 완벽한 구성으로 유지된 2008년까지 김인식 감독은 승률 5할을 꾸준히 유지했다. 

    2009년부터 3할대 승률로 추락한 한화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한대화(54), 김응용(73) 등 유명 야구인들을 모두 감독으로 모셨지만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정민철과 장종훈.ⓒ한화 이글스
    ▲ 정민철과 장종훈.ⓒ한화 이글스


    한화 전설들의 날갯짓


    1. 이상군·이정훈, 신생구단 해태 라이벌로 성장

    1986년 프로야구 1군 무대에 데뷔한 독수리들은 언제나 강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간은 해태 타이거즈(現 KIA)가 한국 프로야구판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삼성 라이온즈가 해태를 견제했다면 1988년부터 1989년까지는 해태의 유일한 라이벌은 빙그레 이글스(現 한화)였다.  

    창단 멤버로 입단한 투수 이상군(53)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간 133경기에 나서 56승을 거뒀다. 이 56승은 14년 독수리로만 살았던 이상군의 통산 100승 중 무려 56%에 달하는 수치다. 1987년부터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이끈 이정훈(52)은 1992년까지 6년간 세 번의 타격상을 거머줬고 3할 타율을 꾸준히 유지했다. 

    2. 송진우·장종훈, 1992년 첫 준우승 견인

    1989년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송진우(49)는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던 1992년까지 4년간 169경기에 나서 50승을 거뒀다. 왼손 투수라는 장점을 앞세워 이글스의 강력한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한 송진우의 승리를 만들어 준 타자는 장종훈이었다. 

    1986년 독수리 구단에 입단한 장종훈은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1992년까지 평균 3할1푼1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10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장종훈은 19년간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며 2006년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를 했다. 19년간 340개 홈런을 기록한 그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통산 홈런의 30%를 기록했다. 

    3. 정민철·구대성, 1999년 한국시리즈 제패

    한화 이글스는 1999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 롯데 자이언츠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던 한화는 공교롭게도 1999년 또 다시 롯데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다. 

    1992년 입단한 정민철은 1999년 우승까지 8년간 291경기에 나서 109승을 거뒀다. 1999년 한국시리즈로 팀을 이끈 정민철은 그해 18승을 거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2승을 거뒀다. 2000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정민철은 2002년 다시 한화로 복귀해 2008년까지 꾸준히 마운드에 나섰다. 

    1993년 한화에 입단한 구대성은 부상으로 1년간 휴식을 취한 뒤 1994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구대성은 일본 진출을 하기 전인 2000년까지 7년간 150세이브를 기록하며 150번의 팀 승리를 지켜냈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승3세이브를 기록하며 우승을 견인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는 구대성이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