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사건의 성격

  •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7투쟁에서 비롯된 4·3

    제주 4·3사건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사건의 전개과정을 알아야 한다.
    4·3사건은 남로당이 전국적으로 전개한
    2·7투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2·7투쟁이란 남로당이 유엔결의에 따른
    남한 지역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전개한 폭력투쟁이다.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전 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의 통일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고, 그 결의의 실행을 준비하고,
    선거 감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오자 북한주둔 소련군은
    유엔위원단의 북한지역 입경을 거부하는 동시에
    남북한의 좌익세력에게 유엔위원단 축출 및 유엔결의 실행 저지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했다.

    북로당은 북한 지역의 모든 좌익세력을 동원하여 연일 유엔 결의를 비난하고
    유엔위원단에게 한반도를 떠나라고 촉구하는 군중대회를 북한 도처에서 개최했다.
    남로당은 군중대회 개최와 더불어 유엔위원단에게 한반도를 떠나라고 촉구하는
    편지보내기 캠페인을 전개한데 이어
    1948년 2월 7일부터는 시위, 파업, 학교 맹휴, 시설파괴,
    경찰관서 습격 등 폭력투쟁을 전개했다.
    남로당은 이 투쟁을 2·7구국투쟁이라고 불렀다.
    2·7투쟁은 전국적으로 2월 하순까지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도 남로당 제주도당의 지휘 하에 2·7투쟁이 전개되었다.
    제주도의 좌익세력은 2월 8일부터 11일까지 3일 동안
    시위, 방화, 경찰관서 습격, 전단살포 등을 자행했다.
    경찰은 2·7투쟁의 주동자들을 대거 체포하여 진압했다.
    당시 체포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및 그 추종자들은
    미군정의 특사결정에 따라 그해 3월에 석방되었다.

    유엔총회는 남로당 주도 하의 반대투쟁이 한국 국민 대다수의 뜻과는 다르다고 판단하고,
    2월 26일 유엔 감시 하의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하여 정부를 구성하라고 결의했다.
    그러한 결의에 따라 미군정은 5월 10일에 남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남한 총선일이 발표되자 남로당은 무장투쟁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5·10선거를 방해하기로 했다.
    이런 남로당의 결정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도
    제주도의 5·10선거 준비를 방해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러한 무장투쟁을 위해 1500명(무장 500명, 비무장 1000명) 규모의 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5·10선거 저지를 위한 4·3학살극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정상과 중턱의 89개 오름에서 봉화가 올랐다.
    이 봉화를 신호로 남로당원들이 지휘하는 무장 유격대원들이
    사전에 정해진 표적들을 일제히 공격했다.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북청년단 숙소,
    독촉국민회 사무소, 대동청년단 사무소, 우익애국인사들의 가옥 등을 습격했다.

    폭도(유격대원)들은 새벽부터 낮까지 경찰관과 그 가족,
    우익애국인사들과 그 가족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4월 3일 이후에도 폭도들은 게릴라전 방식으로
    경찰관, 선거준비요원, 우익애국인사 등의 가옥을 습격하여
    경찰관, 선거준비요원, 우익애국인사 등과 그 가족을 살해했다.

    살해하는 방법은 잔인무도했다.
    총으로만 사살한 것이 아니라, 톱으로 머리를 절단하고,
    칼로 사지를 절단하고, 생매장하여 살해하고,
    나이어린 소년 소녀와 임신부까지 살해했다.
    임신한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살해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경찰지서, 관공서, 우익인사 가옥, 교회당 등을 방화 파괴했다.
    이러한 폭도들의 학살만행과 파괴활동은
    선거일인 5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

    남로당원이 지휘하는 이들 폭도들이 무장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폭도들이 4월 3일 폭동을 일으키면서 살포한
    제주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속에 잘 나타나있다.
    그 호소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를 저지·파탄내기 위해
    남로당 폭도들은 4·3폭동을 일으킨 것이며,
    수많은 애국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것이다.

    폭도들은 4월 3일 이후 5월 10일까지 무장폭동을 계속하여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의 선거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당국은 5월 10일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2개 선거구의 투표를 6월23일 실시한다고 발표했으나
    폭도들과 그에 동조하는 주민들의 방해로 그마저도 실시되지 못했다.
    폭도들은 제주도 차원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제주도 차원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한 공로로
    4·3폭동 및 그 후의 무장 게릴라 활동을 지휘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들은
    북한이 만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결어

    4·3폭동과 그 후의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 남로당의 유격대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도
    경찰지서를 비롯한 관공서, 경찰관과 공무원, 우익애국인사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들은 한라산 중산간지대를 중심으로 거점을 구축하여
    그들을 토벌하려는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에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국되기 전에 그들이 전개한 범법행위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폭동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정권을 지지하면서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에 대항하는 행위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란이다.
    그들은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에 고무되어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까지 발표하면서 반란을 강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중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다 강력한 진압작전을 전개했으며,
    그로 인해 그해 연말에 이르러서야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상과 같이 일별해본 제주 4·3사건의 전개과정에 비추어볼 때,

    제주 4·3사건은 무장폭동으로 시작하여 무장반란으로 전환된 사건이다.

    그 목적은 대한민국 건국의 저지와 대한민국의 와해이다.
    따라서 제주 4·3사건은 ‘항쟁’으로 호칭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사건이다.

    항쟁이란 의로운 약자들이 불의한 강자들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제주 4·3사건을 ‘4·3항쟁’으로 호칭하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에 대해 반란하는 행위를 의로운 일로 간주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하는 행위를 불의한 일로 간주한다는 함의를 갖는다.

    제주 4·3사건이 이처럼 폭동이요 반란인데,
    그 폭동이 처음 일어난 날인 4월 3일을 국가가 기념하는 추념일로 지정한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 건국이 잘못된 일이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국가가 인정하는 행위가 된다.

    4·3사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주며, 그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은 크게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4·3사건이 일어난 4월 3일을 국가적 추념일로 정하는 것은
    국가가 4·3사건을 ‘의로운 항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폭동과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포함한
    4·3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추모·기념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취해서는 안 될 조치이다. 

    제주 4·3사건과 관련해서 국가가 위령해야 할 1차적 대상은
    대한민국 건국과 수호를 위해서 일하다가
    폭도와 반란군에 희생된 인사들 및 그 가족들의 영혼이고,
    2차적 대상은 경찰과 군인 및 민간 반공인사들에 의해서
    폭도로 잘못 몰려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영혼이다.

    폭동과 반란에 참여한 인사들의 영혼은 결코 국가가 위령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4·3사건과 관련해서는 현재수준의 위령제 정도가 타당하며,
    국가 지정 추념일로 기념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굳이 국가가 기념하는 추념일을 지정하려면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남로당이 지휘하는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킨 날인 4월 3일을 피하고,
    다른 적절한 날(예를 들면, 한라산 반란군 소탕이 완료된 날)을 택하여
    지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월 3일은 그날 잔인하게 살해된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에게 원한 맺힌 날이요,
    폭도·반란군들에게는 승리의 날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