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90> T-Zero

    “유진 씨?”
    “왜요, 팀장님?”
    “아까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러게요. 마치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한 친구 같았어요. 그나저나 지원 씨의 부상 정도가 심한가요?”
    “아무래도 부상 범위가 크겠지. 그토록 격하게 격투를 했으니. 거기다 칼에 찔리기까지 했잖아. 정밀검사 결과에 따라 어쩌면 수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장기 파열 같은 경우는 외형상 쉽게 드러나지 않잖아.”
    “그런데 팀장님, 어떻게 그토록 빨리 지원 씨의 RH-B형 혈액을 구하신 거죠?”
    “내가 구한 게 아니야.”
    “그럼요?”
    “현우가 알려준 거야. 현우의 어머님 혈액형이 바로 RH-B형이더라고. 그런데 마침 청주에서 올라오셨나 봐.”
    “그랬구나! 이거, 어째 온몸에 전율이 돋는데요.”
    “왜?”
    “두 사람의 만남이 영화처럼 운명적인 것 같아서요.”
  • 그때 정원과 유진은 아름다운 석양 속을 헬기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정원의 마음에서는 저 멀리서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모래폭풍은 태양을 가려 벌써 마음을 어둡게 했다. 하지만 모래폭풍은 누군가에겐 죽음을 가져다주고, 또 누군가에겐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시킨다. 정원은 지원이 건네준 ‘블랙북’을 움켜쥐고 정말 많은 생각과 추론을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진짜 약을 먹고도 환자가 믿지 못해 차도가 없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처럼 자신이 애써 이끌어낸 결론을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듭된 연산에도 결과물은 매번 같았다. 답답한 열기가 정원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정원은 의자에 등을 깊이 파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곤 엄 처장의 대간첩작전 지시사항을 다시금 떠올렸다.
    “심 차장님의 지시다. 무장간첩 전원을 사살하도록.”
    세상의 얼굴엔 현실과 이상 모두가 뒤섞여 있다. 그 둘 중 어느 것을 볼 것인가는 이제 정원의 선택 여부에 달렸다. 정말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다. 그즈음 정원이 날아가고 있는 국정원에서도 한바탕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 자신의 책상서랍에서 권총과 실탄을 챙기더니 황급히 헬리포트로 향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 뒤를 건장한 사내 둘이 선글라스를 낀 채 경계의 눈초리로 따랐다. 세 사람이 헬리포트에 도착하자 그들을 싣고 갈 헬기가 서서히 메인로터의 회전수를 높였다.
    “탕! 탕! 탕!”
    “헉!”
    “심 차장님, 못가십니다. 너도 권총에서 손 떼고, 어서!”
    “엄 처장, 자네 이거 뭐하는 짓인가?”
    “전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공무원입니다. 그래서 지금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들을 체포하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자네는 현실감각이 떨어지는군!”
    “현실감각이 떨어져 묻겠습니다. 고정간첩의 신분세탁을 해준 이유가 뭡니까?”
    “아, 그거. 이 나이에 겨우 세상살이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 누가 그러더군. 인간이 가장 약해질 때가 바로 자신의 탐욕과 마주할 때라고.”
    “단지 돈 때문입니까?”
    “자넨 아직도 나를 모르는가? 난 자네를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데.”
    “차장님은 그동안 그 누구보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그랬지. 아니, 난 대한민국과 그 영원함을 믿었고 그것을 위해 나를 포기했어. 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작은 것에 감동하게 되더군. 그리고 하찮은 것에 눈길이 가고 말이야.”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수하십시오.”
    “시간에 늦고 빠름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강처럼 흐를 뿐이지. 난 단지 그 강처럼 흐르고 싶었네. 그게 바로 속인들이 말하는 순리라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런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물길을 마음대로 바꾸더군. 정치가가 그랬고, 이념이 그랬고, 현실을 모르는 국민들의 변덕이 그랬어. 난 출발할 때의 목적지를 잃고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길을 잃었네. 거기다 더 이상은 국가안보가 권력의 힘에 좌우되는 것을 볼 수도 없었고. 그래서 결심했지. 이 나라와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로.”
    “하지만 저희에겐 언제나 있었던 장애물이잖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때문에 우리의 열정과 희생이 더 값진 것이고요.”
    “그렇지. 따뜻하게 어깨 한 번 다독여주지도 않는 근거 없는 조국애. 그런데 말이야. 집채만 한 바위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실금 하나가 생겨 결국 쪼개지거든. 문제는 바로 시간과 반복이야. 난 그 한계시간에 다다른 거야. 그러니 더 이상 시간낭비 하지 말자고.”
    “제가 신입 때 차장님이 그러셨습니다. 난 안기부세대다. 옛 안기부의 모토는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되 양지(陽地)를 지향한다’였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양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게 우리의 숙명이다. 웬 줄 아는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은 결코 우리의 길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조국과 국민에게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도덕적 무한책임뿐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끊임없는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용기와 결단이 마지막엔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현명한 자기성찰이야말로 우리 국정원이 요구하는 인성(人性)이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이 국정원에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자네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군. 하지만 지나고 보니까 모두가 책임지지 못할 말빚이었어. 왜냐하면 성경의 진실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삶의 진실이거든.”
    “그렇다고 차장님의 이중첩자놀음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이중첩자놀음! 하하하. 내가 뭐가 아쉬워 이중첩자놀음을 하겠나 이 사람아. 난 그저 이 세상의 썩은 인간들을 이용한 것뿐이라고. 세상이 다 썩었는데 나 혼자서 썩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아니 그런가?”
    “정말 후회를 안 하시겠습니까?”
    “흠, 후회라. 후회는 이미 마음을 굳혔을 때 가슴 시리도록 다 했네. 이제는 실수나 착오였다 할지라도 시간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가슴도 덜 아리고.”
    “그럼 죄송합니다. 절 용서하십시오.”
    “허, 허. 이 사람, 용서를 구할 게 뭐 있나. 자네는 자네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고 나는 내가 새롭게 선택한 길을 갈 뿐인데. 결국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엄 처장, 자넨 정말 좋은 파트너이자 동료였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차장님.”
    “탕! 탕! 탕!”
    “윽!”
    “탕! 탕! 탕!”
    “헉!”
    정원이 분석한 결과물은 실로 놀라웠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 국정원은 중국은행(홍콩)에 가지고 있던 조광무역의 비밀계좌로 2억 5,000만 달러를 송금했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현대의 입장을 조율했던 인물로 드러난 ‘예산관 구인수’는 해외파트 심수창 차장이었다. 더구나 심 차장은 피오기를 비롯한 무장간첩들의 신분세탁뿐만 아니라 군·경의 대간첩작전 및 예상도주로의 차단위치까지 미리 알려주었다. 그런데 유진이 강 과장 피살사건과 관련해 국과수 제주서부분소에 문의했을 당시 얻은 답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은 심 차장이었다. 첫째로 사건현장에 찍힌 발자국과 보폭을 통해 추정한 용의자의 키가 170∼175cm였다. 그런데 심 차장의 키가 173cm였다. 그리고 둘째로 왼쪽 발자국의 족흔(足痕)이었다. 그것은 범인이 우뇌형 인간임을 의미했다. 실제로 심 차장은 양손잡이였다. 글을 쓸 때는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 때문인지 의식적으로 오른손을 썼다. 하지만 식사를 할 때는 편하게 왼손을 사용했다. 셋째로 심 차장은 문학과 예술 등 평소 감성적인 장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수시로 갤러리나 공연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강 과장을 피격한 사제 총기의 제작수준이 너무나 정교하고 뛰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즉 일반인이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의 총기가 아니었다.
    “팀장님, 그런데 분석결과에 순응하실 거예요?”
    “아직까지 나도 잘 판단이 서질 않아.”
    거기다 결정적인 증거는 문상원의 피살사건이었다. 당일 문상원을 추적한 사람은 확인결과 엄 처장이었다. 그런데 심 차장이 갑작스럽게 업무지시를 내려 현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상원이 사체로 발견됐다. 물론 심 차장의 알리바이는 확인됐다. 인사동의 갤러리 보안카메라에 심 차장의 얼굴이 찍힌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한 알리바이는 아니었다. 입장인지 퇴장인지 불분명했다. 그랬음에도 심 차장을 수사선상에서 지운 것은 결정적 실수였다.
    “!”
    이제 헬기가 국정원의 헬리포트를 발밑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헬리포트의 원형 이·착륙지점에 누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정원과 유진은 멀리서도 그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황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정원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했다. 하지만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다. 섬세한 심 차장이 확인사살을 하고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온 것이다. 정원은 주저 없이 헬기의 캐빈 도어를 열었다. 그리곤 수송헬기에 비치돼 있던 K-2 돌격소총을 꺼내들었다. 유진이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곧이어 총의 오른쪽에서 분노가 폭발하듯 탄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곧장 날아간 총알은 단숨에 심 차장이 타고 있던 헬기의 조종석 캐노피를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찢기듯 뜯겨나갔다. 거기다 집중사격으로 조정사가 숨지고 헬기도 중심을 잃어 제자리를 맴돌았다. 잠시 후 헬기는 동체가 뒤집히며 배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곧바로 국정원의 주차장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났다. 정원과 유진은 상황정리를 다른 요원들에게 맡기고 총상을 입은 엄 처장을 병원까지 헬기로 이송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동안 강 과장님이 남기신 대북송금자료를 분석하고 그 흐름을 추적했거든. 물론 마지막에는 심 차장님도 은밀히 내사했고.”
    “그럼 그것 때문에 심 차장님에게 접근하는 저를 시시때때로 방해하신 겁니까?”
    “어쩔 수 없었어.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꼬리를 자르고 잠적했을 거야.”
    “그런데 처장님, 강 과장님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있지, 강 과장님이 내 훈육관이셨거든.”
    “그랬군요.”
    “정원아, 진실이나 정의 같은 소중한 가치는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걸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처장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
    “후후후, 왠지 어울리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혹시 강 과장님이?”
    “그래, 맞다! 역시 넌 징계를 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야. 상사의 속마음까지 함부로 읽고, 컥!”
    “괜찮으세요, 처장님?”
    “빌어먹을, 최악이군.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오르니.”
    “이제 곧 병원에 도착할 겁니다. 처장님, 조금만 힘내십시오.”
    “하긴 그래야 너랑 또 싸우지.”
    “이번엔 저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겠습니다.”
    “아무튼 난 너를 잘 안다. 넌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거든. 내가 한 일은 그저 더 세게 물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어.”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시는 겁니까?”
    “이를테면. 그런데 예상은 했지만 고집 하나는 네가 내 상사더라. 그래도 참 이상하지. 어느 것 하나 닮은 것이 없는데, 자꾸 내 흉내를 내는 네가 밉지가 않으니 말이야.”
    “아마 미운정이 들어서 그럴 겁니다.”
    “하긴 미운정도 정은 정이지. 히~유.”
    “숨이 차시면 이제 그만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너를 비롯해 유진 씨, 재국 씨. 그동안 모두 고맙고 수고했어.”
    “처장님은 제가 본 최고의 요원이십니다. 처장님과 함께 한 이번 작전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짜식!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이젠 능청스럽기까지.”
    “제가 그랬나요. 후후후.”
    “그나저나 이번 기회에 너도 결혼이나 해라. 내가 중매를 설까? 내 이종사촌 동생 중에 얼굴 예쁘고 참한 결혼 적령기의 규수가 한 명 있는데 너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어때, 내가 한 번 만남을 주선해볼까?”
    “처, 장, 님!”
    “!”
    “병원에 다 왔어요. 훗!”


  • “나는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위하여 찰나의 생을 여기에 묻고 넋은 나라의 번영을 위하 여 억겁의 세월로 지키겠노라.”
    그로부터 3주 뒤. 현우와 정원 일행, 그리고 전술팀의 부대원들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김광회 경사가 영면을 취하고 있었다. 김광회 경사는 국립묘지령에 따라 홍살문 오른쪽의 경찰관묘역에 안장됐다. 정원과 현우는 참배가 끝나자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연못을 따라 벤치와 산책길이 잘 갖춰져 있는 그림 같은 현충지(顯忠池)로 나왔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忠義)와 위훈(偉勳)이 가득한 곳이라 그런지 현충지는 녹음뿐만 아니라 햇살과 바람도 무겁고 엄숙했다. 마치 참배객들에게 전쟁 중의 종소리와 평화 시의 종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조용하지만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현우가 표지석을 쓰다듬으며 정원을 올려다봤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의식 아닐까?”
    “그래 맞아.”
    “그런데 정원아,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니?”
    “할 말! 무슨 할 말?”
    “내 경험상 넌 통제하기 까다로울 만큼 돌발행동을 하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 한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지. 왜 하필 나였니?”
    “후후후, 그걸 어떻게 알았어?”
    “네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네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
    “이유는 간단해. 넌 내가 백 퍼센트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니까.”
    “그것이 정말 이유의 전부야?”
    “후후후, 물론 또 있지. 무모함은 용기가 아니야. 그런데 너의 용기는 무모하게 보일 만큼 강하거든. 그게 이번에 증명됐잖아.”
    “그러니까 이야기인즉 처음부터 날 단순한 방관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구나?”
    “물론이지. 첫 번째 너는 유전적으로 악을 보면 침묵할 줄 모르거든. 거기다 뱀보다 더 지혜롭기까지 하지. 두 번째는 네가 이 땅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용기도 갖고 있고.”
    “남은 이유가 더 있냐?”
    “물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악이라고 판단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대담성도 갖고 있거든.”
    “히~유! 국제테러범을 추적하는 것처럼 집요하고 치밀한 분석이군.”
    “난 너의 절친이니까.”
    “흠! 절친이라. 어떤 면에선 이보다 더 나쁜 결과도 없군. 아예 미워할 수조차 없게 만드니까 말이야. 그래 좋다, 이번 한 번은 이해하마.”
    “현우야, 그럼 이제 네가 나에게 대답할 차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아니라 엄 처장님이 가지고 있어.”
    “엄 처장님? 역시 그랬군.”
    “뭐가?”
    “그럼 네가 일단 공격타깃이 정해지면 끝까지 추적해 제거한다는 KSS의 블랙옵스(Black Ops) 팀인 태스크 포스 Ⅲ(Task Force Ⅲ) 소속의 최정예 비밀요원이구나.”
    “왜 그런 위험한 상상을 하지?”
    “언젠가 엄 처장님이 국가비밀국 요원과 약속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거든. 그 약속 상대가 너 맞지?”
    “그건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아니하다)다. 어느 기관이나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마법과 비밀은 있잖아.”
    “헐! 이거 내가 뒤통수를 한 방 제대로 맞았군. 이런 음흉한 놈! 이제 보니 철저히 농락당한 건 오히려 나였구나?”
    “현실이 블랙코미디잖아.”
    “아무튼 너를 보니 KSS가 소문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다. 피부에 소름 돋는 거 보이지?”
    “하여간 우린 서로 다른 임무영역에서 각자의 몫을 훌륭히 수행했어.”
    “그래 국가와 나에겐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거지.”
    “나 역시도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그런데 현우야,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파악한 정보로는 피오기는 북한 내 반체제인물이던데 왜 그를 제거한 거니? 얼마든지 달리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잖아?”
    “그 이유는 최근에 북한 내부에서 미묘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황변화가 감지됐기 때문이야.”
    “미묘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황변화라. 그럼 혹시 주민소요나 봉기?”
    “응, 이제 북한도 변화가 도래할 시점이 된 거지. 풀릴 것 같지 않던 영구 동토의 땅에도 비로소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한 거야. 때문에 피오기와 북한 주민,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도덕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어. 거기다 피오기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잖아.”
    “혹시 피오기가 정찰총국이 만든 살인병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거야?”
    “물론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하지만 그보다 더 한계성을 좁힌 건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야. 즉 피오기의 직속상관인 리명수 평안북도 8군단장이 직접적인 이유야. 리명수는 북한 내에서 친(親)김정은파와 반(反)김정은파의 충돌 같은 내전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중국이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는 북한 반정부조직의 수장이야. 리명수를 측면에서 지원하는 세력은 자유북한새정부위원회고.”
    “자유북한새정부위원회라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거나 김일성을 반대하다 중국으로 탈출한 망명자와 그의 후손들을 모아 중국이 자국의 국가이익 차원에서 별도로 관리하는 고위급 망명자그룹이잖아?”
    “맞아. 그런 지지기반이 있기 때문에 리명수 상장을 중심으로 한 반(反)김정은파가 감히 인민해방을 명분으로 정권탈취음모도 꾸밀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그건 기만이야. 아마도 반(反)김정은파가 권력을 장악해도 결국 김씨 일가의 복제판이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설혹 그럴 의지가 없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북한의 속국화를 지향하는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흠,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는 결국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또 다른 형태의 폐쇄적인 권위주의가 될 개연성이 크겠네.”
    “그렇지. 그들이 만들려는 새로운 세상은 어쩌면 더 험악하고 무자비한 인간사냥터가 될지도 몰라. 결국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희생자는 또다시 북한 주민이 될 테고. 물론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북한 주민의 민주화의 꿈도 짓밟히게 될 거야.”
    “그럼 넌 북한 주민들을 생지옥에서 구할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건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 아닌가.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의지에 의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힘차게 뛰는 북한 주민들의 심장뿐이겠지. 그래야 북한 땅에도 독재왕조가 뿌리내릴 수 없는 역사적 변화와 시대가 조속히 실현될 테니까.”
    “결국 이천만 북한 주민들을 지옥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북한 주민들 스스로고 리재경이 송금한 비밀자금의 사용처는 그런 북한 주민들의 꿈과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테고.”
    “맞아. 하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구성의 모순과 조절장치의 한계를 먼저 제거해야 해.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히~유! 이건 애덤 스미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절묘한 합의로군. 아무튼 갑자기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뭐?”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이상세계를 보려고 노력 중이라는 대답 말이야. 현실만 보면 탐욕스럽고 이상만 보면 망상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고 했던가.”
    “그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지름길이니까.”
    “아참! 결혼식 주례는 신부님을 모셨다면서?”
    “지원 씨가 아는 신부님이래.”
    “그나저나 네가 오늘 술 한잔 쏴라?”
    “내가?”
    “그럼 당연하지. 넌 복이 넝쿨째로 굴러들었잖아. 거기다 지원 씨의 몸에 예쁜 아기까지 생기고.”
    “그런가, 후후후. 좋아! 내가 쏜다. 그런데 형님하고 한 번 불러봐.”
    “내가 너한테?”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누가 있어?”
    “아니, 왜?”
    “너 잊었어? 게임에서 패자는 승자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들어주기로 한 거.”
    “헐!”
    “내 요구조건은 네가 형님이라고 불러주는 거다. 후후후.”
    “젠장, 먼저 게임을 하자고 했으니 빠져나갈 수도 없고. 그래, 한다! 형~님~.”
    “그래, 동~상~. 푸하하하.”
    “아주 신이 났군, 신이 났어. 푸하하하.”
    “현우 씨!”
    “!”
    “예비 형부!”
    “아니, 저건. 지원 씨하고 지수 씨잖아. 현우야, 두 사람 벌써 퇴원한 거야?”
    “응, 어제. 한사코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팀장님!”
    “제수씨가 알려줬구나.”
    “뭐, 제수씨?”
    “그럼 아니야. 동생의 여자친구면 예비 제수씨가 맞잖아. 쿠쿠쿠.”
    “헐! 그래 맞다. 푸하하하!”
    “현우 씨, 하늘 좀 한 번 봐요. 저녁놀이 참 고와요.”
    “!”
    “우~와!”
  • 지원은 문득 아바지의 얼굴에 피었던 환한 진달래를 떠올렸다. 그동안 그토록 애절하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진달래였다. 그런데 그 진달래가 연한 붉은빛의 노을이 되어 저녁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원은 아바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니, 아바지의 영혼이 이 대한민국에 있음을 비로소 확신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어 ‘빨강’의 상징적 이미지는 피, 불, 생명, 힘, 정열, 사랑, 욕망, 분노, 죄악, 공포, 폭력, 전쟁, 죽음, 그리고 북한이다. 하지만 그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건 단지 불, 생명, 힘, 정열, 사랑, 욕망, 분노 등 이미지의 절반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념과 체제가 다른 북한 주민들의 몫이다. 북한 주민의 일상이 바로 피, 죄악, 공포, 폭력, 전쟁, 죽음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채지만 남·북의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함축된 상징적 의미와 심리적 속성은 지구에서 천황성의 거리만큼 멀다. 지원은 ‘파랑’에 기대고서야 비로소 ‘빨강’이 꿈과 희망을 의미하는 ‘태양의 색’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 태양이 떨어진 저녁 하늘이 불타는 바다로 넘실대고 있다.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의 색깔마저도 황홀할 만큼 흥분되고 매혹적이다. 대한민국에서 보는 ‘빨강’은 북한의 그것과 달랐다. 폭정과 굶주림의 가시가 없어 아기처럼 순하고 맑았다. 아바지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미소는 바로 대한민국의 ‘빨강’이었다. 또한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지원은 점점 더 짙게 타들어가는 태양을 보며 시각적으로도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빨강’이 그 뜨거운 열기로 영구 동토를 단숨에 녹이길 기도했다. 이제 지원의 ‘빨강’은 어둠의 껍질을 벗고 그 명도를 한층 밝게 해 미래에 대한 도전과 변화로 타올랐다. 분명 태양은 춥고 어두운 곳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일 더욱 밝고 큰 태양으로 떠오를 것이다. 지원 스스로가 삶은 지옥이 아니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