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9> 병든 사상


    그 시각 서울의 반대쪽 하늘에도 먹구름이 밀려왔다. 현우가 청담동 백수연의 빌딩에서 본 건 지금까지 찾던 진실이었다. 그때 마침 석우와 동해도 제일기획의 배송차량을 따라 백수연 쇼핑몰로 왔다. 현우의 예상대로 그들은 역할을 분담한 공범이었다. 거기다 추가조사를 통해 직원들 간의 부당거래와 짝퉁 밀수도 확인했다. 아침이 되자 건장한 체격의 사복경찰들이 회사에 들이닥쳤다. 사장이 배임과 공금횡령, 상표법 위반으로 관련자 전원을 고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추 이사는 특히나 앞뒤가 천사와 악마로 극명하게 달랐다. 아니 거짓과 위선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였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추 이사님과 백 전무님이 짝퉁 제조와 회사공금 횡령까지 했다는 게?”
    “두 사람뿐만 아니라 생산팀의 김웅태 과장이 제조책, 총무팀 우광재 차장은 자금관리책, 물류팀 장윤석 부장은 수출책, 석정균 차장은 국내유통책을 맡았다더군. 심지어 백 전무님의 딸이 비밀창고책이었대.”
    “그런 따끈따끈한 정보를 어디서 입수한 거야?”
    “어디긴, 사장실의 황 비서지.”
    “그렇다면 신빙성이 상당히 높겠는데.”
    현우가 밝혀낸 사실들은 한마디로 모럴 해저드의 극치였다. 더구나 나반의 디자인과 패턴을 빼내 짝퉁을 제조하기까지 했다. 기술지원은 손비아가 담당했다. 미산 회원들은 비밀영업사원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짝퉁을 판매한 매장의 매출액을 분석해 얻은 결과였다. 그런데 짝퉁 밀수와 관련된 사항은 오히려 추 이사의 친형인 사장이 몇 달 전 은밀히 내사를 지시했다. 그래서 석우나 동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내사 결과 추 이사가 홍콩에 위장법인을 설립해 변칙적으로 취득한 이익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그런 추 이사의 어두운 실체에 대해 정작 사장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우가 추 이사를 공공의 적으로 정해 두 번째 사격을 준비한 이유이기도 했다.
    “나 팀장.”
    “말씀하십시오.”
    “밥 주고 놀아주었더니 키우던 개가 주인을 물어도 되는 건가?”
    “전 집 지키는 개가 아닙니다.”
    “아참! 그렇지. 그럼 오늘의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지?”
    “전 단지 제 신앙을 보여드렸을 뿐입니다.”
    “신앙이라! 그 신앙이 종교적인 믿음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신념인가?”
    “제 신앙은 930여 차례의 외침을 이겨낸 국가와 국민의 저력입니다.”
    “오만하게 느껴질 만큼 거창하군. 하지만 거침이 없어 아주 감동적이야!”
    “어떤 상황에서든 고전은 답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고전의 마지막 장에 두 나라가 나옵니다. 한 국가는 순수하게 국민들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전쟁폐허에서 성공신화를 썼기에 위대하다고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그 나라는 아시아 국가들의 아이덴티티가 됐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국가는 정반대로 아직까지 미몽 속을 헤맨다고 썼습니다. 물론 지금 그 국가는 기아, 폭정, 독재, 세습, 고립 등으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자네 혹시?”
    “그렇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거 나 팀장이 경찰 쪽에도 아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가 보군. 솔직히 난 조금 전까지도 내 죄가 짝퉁 제조뿐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어쨌든 나 팀장의 출중한 능력만큼은 내가 인정하지. 해외에 서버를 둔 종북카페에 북한을 찬양하는 선전물을 제작해 몇 번 게재했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그건 경찰이 뭔가 오해를 한 거네. 계획한 건 아니고 호기심이 너무 강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추 이사님, 이젠 이사님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과 이념적 소신까지도 버리시는 것입니까?”
    “뭐?”
    “전 지금까지 추 이사님이 애국가를 부르거나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검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추 이사님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남한 내 주사파 조직인 제2전선의 실체이며, 속칭 존엄입니다. 검사님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추민성! 끝까지 교활한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군. 당신의 죄는 찬양고무죄가 아니야.”
    “그럼 뭡니까?”
    “간첩죄야. 참고로 찬양고무죄는 국가의 존립과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선동·동조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야. 처벌도 7년 이하의 징역형이지. 그런데 당신은 형법 98조와 국가보안법 제2·4·5조에 규정된 간첩죄로 적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하는 죄를 저질렀어. 따라서 사형이나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거야.”
    “내가 간첩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물론 있지.”
    “그게 대체 뭡니까?”
    “증거는 당신이 탕진했다는 도박자금이야. 그 돈이 북한 노동당의 충성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물증을 어렵게 확보했거든. 거기다 짝퉁 제조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까지 포함됐고. 그 모든 역할이 완벽하도록 설계한 인물은 김형찬이고 말이야. 아닌가?”
    “이거 더 이상의 발뺌은 무의미하게 됐군. 정말 놀라워. 검찰이 내 실체를 이토록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아! 그래, 이대로 끌려가면 패자처럼 보일 테니까 나도 반론은 해야겠지. 제국주의의 사상문화는 개인이기주의에 근본바탕을 두고 있지. 그리고 민중은 언제나 소모품이었고. 제국의 역사 자체가 그 증거야. 현재의 대한민국 역시도 힘없는 절대다수의 국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물론 그 열매는 권력을 잡은 소수가 따먹고.”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진화의 법칙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유사 이래로 인류의 발전을 저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경쟁과 욕망이 바로 인류발전의 원초적인 힘이며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역사가 되고 문명의 수레바퀴로 굴러갑니다. 설혹 경쟁이 비문명적·비이성적이라 할지라도 좌파들은 거기에 기댈 명분이 없습니다.”
    “왜지?”
    “경쟁이 사라진 북한은 지상낙원이 아니라 진화에서 유배된 갈라파고스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미 진화가 멈췄습니다. 그건 완성이 아니라 도태입니다. 이제 북한을 기다리는 건 멸종뿐입니다. 따라서 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계급사관에 근거한 착취가 생존에 더 치명적인지 아니면 굶주림이 생존에 더 치명적인지 그것 역시 현재의 북한이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매우 거만하고 고루하며 쓸데없이 길고 산만한 주장이군.”
    “또한 민족·민주·진보·정의. 이것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부인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최고 가치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독점한 세력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이념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북한의 폭압정치와 반민주화에 분노할 민족·민주·진보·정의의 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사고야말로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개념정의가 잘못된 오류덩어리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인생 최고의 멍청한 짓을 했군. 이제는 그걸 보다 확실히 알겠어.”
    “맞습니다. 민족의 가슴에 분단의 아픔을 새긴 북한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야말로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항구적으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또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고요. 물론 추 이사님은 사악한 뱀의 혀로 국민들의 의식 속에 새겨진 생존의 길을 지우는 데도 앞장섰습니다. 따라서 추 이사님은 민족과 역사의 이단아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 참! 이젠 혀까지 깨물렸군. 하지만 똑똑히 기억하게. 좋은 날이 오면 내가 꼭 자네를 찾아가겠네. 그리고 자네가 피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삶을 구걸하는 모습을 꼭 지켜볼 거야. 크크크.”
    “‘병든 사상은 병든 신체보다 더 처리하기 곤란하다’는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한 말을 천천히 되새겨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더불어 낡은 유물사관에 매몰되어 거꾸로 돌고 있는 이사님의 주사파시계도 제대로 수리를 하시고요.”
    “추민성. 자, 이젠 그만 갑시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 만세! 7,000만을 재결합할 민족지도자 만세!”
    “조용히 못해!”
    이제 현우의 사냥은 끝났고 꺼내들었던 사인검도 귀소본능에 따라 다시 칼집으로 들어갔다. 현우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가벼운 떨림이 일었다. 지수였다. 그런데 지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낮고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