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維新시절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자료

    趙甲濟    

       대학생의 질문: 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 10월17일 소위 유신조치를 통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다음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은 제2의 쿠데타로서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 아닌가? 이 기간에 야당과 언론과 노조의 활동이 탄압을 받았다.
      
       필자의 답변: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 대통령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법률과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법적 측면을 포함하여 國政(국정)에 대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므로 7년의 유신 기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 중 3차 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國力(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오일쇼크 기간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維新기간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전자,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은 오늘의 한국을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한 自主국방력 건설도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이 장기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한국이 一流국가를 꿈 꿀 수 있도록 만든 것이 維新체제이다.
      
       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年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 중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로 등장하여 박정희式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 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式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한다. 아직 개방으로 나가지 못하던 중국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유신)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下位계층 20%에 대한 上位계층 20%의 소득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77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의료보험은 세계적 성공사례이다. 朴 대통령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의 토대와 안보의 울타리가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것이다. 역사는 박정희를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로 평가할 것이다. 또 한 분은 물론 이승만 建國(건국)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