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명 공비중 살아돌아간 박재경, 송이들고 2000년 DJ 때 서울 내려와
  •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이 지금까지 저지른 최악의 대남테러 중 가장 극적이었던 사건을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없이 1.21 사태라고 대답할 것이다.
     
    1.21사태는 청와대 습격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저지당한 사건이다.
     
    당초 북한은 76명의 공비를 서울에 침투시켜 청와대와 미국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방첩대 등 6곳을 동시에 기습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너무 방대하다는 지적에 따라 청와대 한 곳만 기습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투입인원도 31명으로 조정되었다.
     
    1968년 1월 17일 오후 11시, 공비들은 임진강 고랑포 일대로 침투하여 미 2사단 경계구역을 포복해서 통과했다. 그들은 포복으로 통과하는 것에 대비하여 한 시간 이상 부동자세로 엎드려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공비들은 전원 기관단총을 소지하고 1인당 실탄 300발, TT권총 1정, 대전차용 수류탄 2발과 대인 수류탄 10발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21일 오후 8시에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대통령과 경호원 등을 살해하고 차량을 탈취하여 북쪽으로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공비들은 황해북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청사에서 최종 예행연습까지 실시했다.

  •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는 호경암(사진:wonypark님)
    ▲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는 호경암(사진:wonypark님)

    공비들은 장파리-파평산-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로 이어지는 코스로 침투를 진행했다. 이 과정서 공비들은 법원리에서 처음으로 민간인들과 마주쳤다.
     
    공비들은 법원리에서 휴전선 침투 후 두번째 숙영을 했다. 충분한 휴식을 마친 공비들은 이동을 하려다가 나무를 하러 온 우씨 4형제와 마주쳤다. 우씨 형제들은 눈 앞에 나타난 병력들이 국군 복장이었으나 국군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도망칠 상황이 아니었다.

    공비들 입장에서는 남파 후 처음 직면한 돌발상황이었다. 
    원칙대로라면 기밀유지를 위해 우씨 4형제를 죽여야 하지만 시신을 숨기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시신을 땅에 묻어야 하는데 추운 겨울이라 땅이 얼어있었기 때문이다. 시신 1구라면 몰라도 4구의 시신을 묻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공비들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공비들은 상부에 무전으로 보고했고 곧바로 답신이 왔다. 그런데 암호로 구성된 상부의 답신이 해독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때 북한에서 내려온 지령은 북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통신문 해독이 되지않자 공비들은 우씨 4형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투표를 했고 결국 풀어주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공비들은 우씨 형제를 풀어주면서 신고하면 보복받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우씨 형제를 풀어준 것은 한국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피착취 계급이므로 잘만 선동-협박하면 자신들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씨 형제를 풀어준 것은 공비들의 첫번째 실수였다.

    우씨 형제는 산에서 내려오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군경 합동으로 차단선을 구축했으나, 이미 공비들이 차단선을 벗어난 뒤였다. 당시 한국군은 북한공비들의 산악이동 속도를 시속 4km로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 차단선을 쳤으나, 공비들은 시속 10km의 속도로 이동했다.
     
    공비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북한산이었다. 그들은 북한산 정상에서 서울도심을 내려다보며 비상이 걸린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서울까지 들어오는 동안 한번도 군경과 마주치지 않았기에 그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공비들은 또 하나의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었다. 20일까지 북악산에 도착해 하루 숙영하고 다음날 청와대를 공격할 예정이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북악산이 아닌 북한산에 도착한 것이었다. 북한산은 북악산보다 서북쪽에 있다. 공비들은 북한산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며 산을 잘못 찾았다고 당황해했다.
     
    물론 북한산은 북악산에서 크게 먼 곳은 아니었기에 공비들은 북악산으로 이동할까 생각도 했으나 굳이 위험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 북한산 승가사 근처에서 마지막 숙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 공비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북한산 비봉 (출처:국립공원 관리공단)
    ▲ 공비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북한산 비봉 (출처:국립공원 관리공단)

    공비들은 다음날 해가 저물고 나서 청와대를 목표로 하산했다. 서울시내로 접어들면서 공비들은 방첩대 대원들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경찰은 이각현 서대문 경찰서장 일행이었다. 이각현 서장은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공비들을 발견했다.
     
    일단 이서장은 서울시경에 이를 보고한 후 공비들을 막았다. 서장은 공비들의 신원을 물었고 공비들은 각본대로 CIC 방첩대 소속이며 특수훈련 후 복귀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방첩대는 엄청난 권력을 자랑하는 기관이었이에 경찰 입장에서 함부로 검문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공비들은 그 점을 이용하려 했다.
     
    이 서장 일행은 이들의 뒤를 쫓았으나 공비들은 추적을 따돌렸다. 그러나 이서장이 서울시경에 보고한 내용은 각 경찰에 전파되었다. 공비들이 그 다음으로 경찰과 마주친 곳은 자하문 임시검문소였다. 이 곳은 종로 경찰서 소속 정종수, 박태안 순경 두명이 지키고 있었다.
     
    경찰관은 공비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공비들은 역시 방첩대 소속이라고 둘러대며 신분증 제시를 거절했다. 공비들은 대담하게도 효자동에 있는 방첩대 본부로 복귀 중이니 의심스러우면 부대까지 따라오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두 경찰관은 이들이 무장공비일 것이라고 직감으로 느꼈다. 경찰관이 지닌 무장이라고는 수갑 뿐이었지만, 어떻게든 이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비들은 검문하는 경찰관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공비들이 검문소를 통과하자 두 경찰관은 병력지원 요청을 무전으로 날리고 대열에 따라붙었다. 경찰관들은 대열 맨 뒤에 있는 공비에게 말을 걸며 따라붙었는데, 이 공비는 바로 부대장인 김춘식이었다.
     
    대열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앞에 이르렀을때 지프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달려와 멈췄다. 종로 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탄 차량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갑니다!"
     
    공비들은 최서장 앞에서 방첩대 행세를 했지만 최규식 서장의 당당한 한 마디에 더 이상 할말을 잃었다.
    공비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시내버스 두대가 연이어 올라오다가 지프 뒤에 멈춰섰다.
     
    공비들은 이것을 지원병력이 탑승한 차량으로 착각, 외투 속에 숨겨 둔 기관단총을 꺼내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최서장은 세발의 총탄을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공비들은 사격과 동시에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투척,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공비들은 지척에 있는 청와대로 신속하게 돌격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런 돌발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 얼이 빠진 것인지, 그들은 상식이하의 행동을 보였다.

    그들의 목표인 청와대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상황이고 죽어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면 총격전을 벌이면서 어떻게든 청와대로 진격을 했을 것인데, 공비들은 그런 사명감 자체가 없었다. 임무완수에 대한 사명감이 없다는 것은 특수부대 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故최규식 종로서장 동상(사진:stallion님)
    ▲ 故최규식 종로서장 동상(사진:stallion님)

    총격전이 시작되자 대열 맨 뒤에 있던 두 경찰관은 공비 김춘식을 잡아 쓰러뜨리고 그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비들의 총격으로 정종수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 그는 며칠 뒤 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했으며 사후 경사 계급이 추서되었다.

  • 故정종수 경사 추모비(사진:stallion님)
    ▲ 故정종수 경사 추모비(사진:stallion님)

    김신조는 경복고등학교 담을 넘어가 인왕산 쪽으로 달아났으나 두시간 반 뒤 인왕산에서 초병에게 발견되어 생포되었다.  그는 자폭하려 했으나 수류탄이 불발하는 바람에 생포되었다.
     
    한편 치안국에서는 생포한 김춘식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고가 났다. 김춘식은 자신의 조끼에 수류탄 안전핀을 걸어서 일종의 부비트랩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알지못한 상태에서 조끼를 벗기다가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그 바람에 생포한 공비가 폭사하고 말았다.
     
    토벌작전은 30일까지 계속되었다. 군경은 폭사한 김춘식을 포함, 27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1명(김신조)을 생포했다. 이 과정에서 최규식 종로서장과 이익수 대령(전사 후 준장으로 추서)을 포함한 23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민간인 7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우리측 부상자는 52명이었다.
     

  • 故정종수 경사 부조상(출처:스마트 서울경찰)
    ▲ 故정종수 경사 부조상(출처:스마트 서울경찰)

    남은 공비 3명 중 한명은 경기도 양주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두 명은 끝내 찾지못해 월북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북한으로 돌아간 공비 중 한 명이 바로 2000년 9월, 송이버섯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한 박재경 대장(총정치국 부총국장)이다. 박재경은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도 송이버섯 배달자 노릇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교전이 벌어진 그 자리에는 최규식 서장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 추모비가 있으며 대한민국 경찰은 정종수 경사를 현장 경찰의 표상으로 후배경찰에게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