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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베리스의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남긴 것들

아일랜드 사투리로 전 세계 사로잡은 90년대 최고의 여성 록 뮤지션

양일국 정치학박사·문화평론가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22-01-16 13:21 | 수정 2022-01-16 13:21

▲ 크랜베리스의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 ⓒ스플래시뉴스닷컴

지난 2018년 1월 15일, 새해 벽두부터 크렌베리스를 이끌었던 가수 돌로리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의 사망 소식은 적잖은 팝 애호가들에게 마치 오랜 시간 연락이 끊겼던 옛 애인의 부음(訃音)을 듣는 상실감을 안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크랜베리스가 90년대 세계 음악시장의 판세를 좌우했다거나 그 밴드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이야기해야 할 만큼의 비중을 가진 밴드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 특유의 정서가 우리와 꽤 특별하고 로맨틱한 ‘케미’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돌로리스의 모국인 아일랜드(Ireland)는 지구상 최북단에 위치한 섬나라 중 하나이며, 비가 많이 오는 기후 특성상 우울한 정서가 지배적인 곳이다. 둘 다 자유 국가라 큰 의미는 없지만 1921년부터 영국령이 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양분돼있고, 특히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을 옹호하며 영국에 저항하는 무장단체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의 테러가 1969년부터 본격화되어 최근까지 3,532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된다. 얼마나 악명 높았는지 국제사회는 이들이 벌인 사건사고를 따로 The Troubles라는 고유명사로 부르고 있다. 후술하게 될 크랜베리스의 대표곡 “Zombie(1994)”는 바로 이 IRA가 1993년 영국의 한적한 도시 워링턴에서 행한 폭탄테러로 사망한 두 어린이를 추모하는 곡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아일랜드 뮤지션들은 특유의 슬픈 정서를 노래하게 된다. 2010년 4월 30일 내한공연에서 대표곡 “Still Got The Blues(1990)”를 천안함 용사들에게 헌정했던 ‘세상에서 제일 슬픈 기타’ 게리 무어(1952-2011), 아버지와의 사별을 슬퍼하는 가사인데 여승무원이 잠든 승객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따듯한 내용의 항공사 CF에 나와서 어색했던 “Alone Again(1971)”의 길버트 오설리번, “Lady in Red(1986)”로 동네 여고생 누나들 설레게 했던 크리스 드 버그, 1993년에 등장해 소녀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보이존이 아일랜드 출신이다. 같은 해 데뷔한 크랜베리스 역시 이국적이며 단조 선율과 어울리는 특유의 아일랜드 정서를 잘 담아낸 밴드로 기억된다.

지금쯤 구글 검색만 해봐도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감성적인 글은 지천으로 있을 것이고, 필자보다 더 해박한 깨알 정보를 정리해서 올린 블로거들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돌로리스의 삶과 음악이 오늘날 한국 가요에 시사 하는 바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볼까 한다.

먼저 돌로리스의 독창성과 개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그녀는 휘트니 휴스턴이나 머라이어 캐리와 견주어 볼만한 가창력을 지녔다고 볼 수도 없고, 동시대에 사랑받았던 노 다웃의 그웬 스테파니같은 개성이 넘치는 외모도 아니었다. 오직 따듯한 음색과 특유의 억양으로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가수였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리머릭(limeric)의 사투리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요들송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창법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돌로리스는 독특하게 노래했지만 또 한편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다는 작위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당연하다. 아일랜드 사람이 아일랜드 식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돌로리스의 투박하고 꾸밈없는 아일랜드 사투리가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는 상당히 세련되고 참신한 것으로 들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96년에 데뷔한 주주클럽의 주다인, 1997년에 나란히 등장한 자우림의 김윤아, 체리필터의 조유진은 대표적인 돌로리스 파(派) 가수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개성을 잘 찾아갔지만, 초창기 노래 가운데에는 크랜베리스를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모방이 적지 않았다.

만약 돌로리스가 억지로 사투리 발음을 교정했거나 일반적인 영미권 가수들의 창법을 따라했다면 이처럼 사랑 받았을까? 사투리를 감추지 않았던 당찬 소녀 돌로리스의 성공은 세계화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 하나를 전해준다. 바로 노래이건 춤이건 내가 제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어설프게 남을 흉내내봐야 안 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스눕 독을 데려와서 만든 “행오버”는 모두 한국적이다. 전자는 우리 사회에 가진 척, 있는 척하는 이들을 풍자한 것이고, 후자는 끝장을 보고 마는 한국 특유의 음주 문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BTS의 성공 역시 음악 외적으로는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한 것이 한 몫을 했다지만 역시 한국 젊은이들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담은 가사와 우리식 ‘군무’가 세계 음악애호가들의 감탄을 자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적잖은 청년 가수들은 한글 가사를 영어처럼 발음해야 세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보통 음악이나 무대위에서 기량을 볼 때 글로벌 진출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이들이 이런 증상이 더 심하다. 물론 학교마다 한 분씩 있는 계량 한복 입고 다니는 선생님들처럼 무슨 우리 민족과 한글의 위대함을 예찬하자는 게 아니다. 이 만큼 서구화된 우리나라에서 곡의 느낌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가사 가운데 영어 단어나 문장이 들어가는 것이 이상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멀쩡한 한글 가사를 외국어처럼 비틀어 발음하고 한글 가사 사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영어권의 추임새를 넣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며, 그걸 보는 외국인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할지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부터 가요계에 해외 교포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이들은 가사에 영어를 많이 써도 되는 일종의 ‘자격증’ 비슷한 것을 부여받았고 개중에는 소녀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실제로 한국어를 잘하면서도 방송에서 일부러 어눌한 말투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들로 인해 당시 유행하던 해외 팝의 여러 요소들이 접목되면서 가요가 양적으로 풍성해졌지만 동시에 불필요하거나 말이 안 되는 영어 표현, 그리고 인위적인 서구식 제스쳐와 억양이 남용돼온 것이 사실이다. 가수들의 실명을 거론했다가는 편집국에서 날선 전화가 올 거 같아 생략하기로 하자.

크랜베리스와 돌로리스가 남긴 두 번째 유산은 허구헌 날 사랑 타령만하는 한국 가요와 달리 다양한 음악적 주제를 탐구했다는 것이다. 크랜베리스의 대표곡들은 흔한 사랑타령 외에도 나름의 진지한 성찰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여자로서 어머니가 되어 느끼는 지극한 모성애와 육아를 통한 깨달음을 진솔한 가사로 적은 “동물적 본능 Animal Instinct(1999)”, 그리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의 ‘달달한’ 연애장면에서 흔히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가족 찬가 Ode to My Family(1994)”는 예상과는 달리 가수로서 성공한 이후 느끼는 고독 그리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유년기를 갈망하며 쓴 곡이다. “네가 없을 때  When You’re Gone(1996)” 역시 흔한 이별 노래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세계 곳곳을 다니며 노래하는 동안 챙겨주지 못하는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곡이다. 물론 사랑 노래도 불렀다. 크랜베리스의 데뷔곡 “Linger(1993)”는 돌로리스가 첫 키스를 하고 나서 쓴 연서(戀書)라 전해진다.  

크랜베리스는 정치적 메시지를 곡에 담을 때도 특유의 세련미를 잊지 않았다. 서두에도 언급했던 “좀비”는 IRA의 만행을 규탄하는 상당한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곡이지만 우회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일례로 가사 어디에도 IRA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대신 그들의 ‘부활절 무장 항쟁’이 있었던 연도를 한 차례 언급할 뿐이다. (“1916년부터 항상 그래왔지 It's the same old thing since 1916”). 이는 연예인들의 정치적 발언으로 종종 갈등을 빚는 한국사회에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실 당장 관객의 호응을 얻기에는 비난할 대상을 직접 언급하고 욕설 등 자극적인 가사를 써야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크랜베리스는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절제함으로써 정치적 메시지에 예술성을 더했다. 또한 이 곡의 가사에 반복되는 좀비, 즉 누군가가 “분노하라!” 명령하면 분노하는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이와 비슷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예술로 승화시킨 모범적인 사례로는 빌리 조엘의 “Honesty(1978)”을 들 수 있다. 2011년에 발간된 케네스 비엘렌의 『빌리조엘의 가사와 음악 The Words and Music of Billy Joel』에 따르면 이 곡은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 세태를 한탄하면서 거짓말하지 않는 여자 친구를 원한다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 대통령의 거짓말을 풍자한 것이라 한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워싱턴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회의하는 것을 몰래 도청했다가 적발됐는데 아니라고 잡아뗐다가 결정적 증거인 녹음테이프가 나오자 사임한 바 있다. 만약 빌리 조엘이 누구처럼 “야 닉슨 이리나와!” 라고 소리쳤다면 ‘아니스티’는 반짝 떴을지 몰라도 이처럼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돌로리스가 우리에게 남긴 세 번째 유산은 화려한 스타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스타들이 제 명에 못 죽는 것은 이미 정설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상급 뮤지션들은 저마다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 고강도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2009년 6월 25일에 명을 달리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역시 오랜 공백을 깨고 전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어떻게든 다음날 있을 공연 준비와 인터뷰 등 일정을 위해 잠을 자야 했는데 오랜 불면증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수면 내시경시 투여 받는 양보다 많은 50mg의 수면제(프로포폴)를 투여해도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그는 주치의에게 추가로 수면제를 주사하라고 요구했다가 화를 입었다. 사후 응급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탈모로 가발을 썼으며 특유의 고난이도 춤을 위한 날렵한 체구를 유지하느라 저체중으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이는 최고의 무대를 위해 그가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짐작케 한다.  

두 번째 이유로는 기질적으로 감성적인 음악인들이 짧게는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세계 순회공연을 다니는 가운데 느끼는 쓸쓸함을 술과 마약으로 달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60년대 사이키델릭 음악을 이끌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재니스 조플린(1970), 짐 모리슨(1971), 지미 헨드릭스(1970)가 모두 27살에 세상을 떠난 이유는 지나친 술과 마약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1980년, 32세)도 40도의 독주 ‘잭 다니엘’을 마시다가 구토물에 의해 질식사한 것이지만 이미 당시 심각한 알콜 중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2016년 4월 21일에 사망한 프린스 역시 진통제 펜타닐(fentanyl)을 과다 복용한 것이 사인으로 알려졌는데 돌로리스가 사망한 호텔방에도 같은 성분의 마약이 발견됐다. 아편의 일종인 이 마약은 본래 끔찍한 고통을 겪는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것이나 불법적으로 복제품이 유통되고 있어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일례로 2018년 3월 19일 “아편 일기(diary)”라는 제하의 타임지는 이례적으로 표지를 포함한 전체 지면을 마약 근절 캠페인에 할애한 바 있다.

돌로리스 역시 화려한 무대 뒤에서는 고통스러운 여인이었다. 8세 무렵 믿었던 주변 사람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이후 지속적으로 신경쇠약으로 시달렸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늘 야윈 모습이었다. 이러한 불우한 환경에서 일찍 술과 마약에도 손 댄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에 발표한 “salvation”은 어른들은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아이들도 마약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자전적인 가사다. 2014년에는 20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했는가 하면 비행기에서 난동부리다 이를 만류하는 경찰에게 부상을 입혀 구설수에 올랐다. 이후 한화 약 800만원 상당의 벌금을 내면서 당시 조울증에 시달렸음을 고백하고 사과했다. 2009년 크랜베리스 재결성 이후 의욕적으로 활동해보려 했지만 대중의 반응도 예전 같지 않았고 2017년 5월 허리 통증 등 건강 문제로 유럽 투어마저 중단해야 했다.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불행이 겹치면서 그녀는 더욱 마약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류의 종주국으로서 우리도 청소년 가수들을 상품으로 육성하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인기를 누릴 때는 물론 인기가 시든 이후에도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교양과 정신력을 갖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흔히 악조건과 고통 속에서 큰 성과를 이뤄냈을 때 진흙에서 연꽃을 피웠다고 비유하곤 한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따듯한 가정,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엄마의 생활을 갈망했던 돌로리스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이 자리를 빌어 크랜베리스의 음악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뮤지션 돌로리스 오리어던의 명복을 빈다(1971-2018).

[사진 제공 = SplashNews (www.splashnews.com 스플래시뉴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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