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 발간… 곁에서 지켜본 이승만의 참모습 덤덤히 묘사
  • “대통령은 부상당한 우리 아이들(Our boys)을 덮어줄 만한 것이면 모두 챙기도록 해서 병원으로 보냈다. 심지어 자신이 사용하는 삼베 홑이불까지 싸 보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이승만 대통령 부인)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기록한 6·25전쟁 비망록의 한 대목이다. 비망록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국군을 항상 ‘우리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이 대통령에게 국군은 국민 이상이었다. 부상당한 장병을 위해 자신의 삼베 홑이불을 내놓은 리더 이승만의 심중엔 애끓는 부정(父情)이 자리했다. 전쟁 기간 시종일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돌봤던 건국대통령 이승만. 

    출판사 '기파랑'이 6·25 전쟁 69주기를 맞아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여사의 일기 형식 전쟁기록을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로 재발간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부터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한 1951년 2월15일까지의 상황을 직접 기록했다. 이 책은 저자가 통치자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다룬 역사기록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 통치사료’로 평가된다.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 선 이 대통령의 고뇌, 한숨, 후회, 애환, 기쁨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깊이 사랑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진실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또 위기상황에서 리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건국대통령의 리더십을 공부하는 사료로 읽힐 만하다. 

    공감의 리더 이승만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때로는 울었고, 때로는 후회했고, 때로는 기뻐했다. 그가 눈물을 흘렸던 순간은 어김없이 자식처럼 아끼는 국민이 고통스러워할 때였다. 그가 후회한 순간은 어김없이 지도자로서 국민을 괴롭게 한 선택을 할 때였다. 그가 기뻐한 순간은 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조금이나마 평안에 가까워진 때였다. 

    1950년 7월28일 아침
    창밖 멀리 떼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음이 가슴 저리게 들려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픈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걱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박힌다. 창틀을 움켜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이제 결전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한 명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1950년 8월2일 
    우리 애들이 훈련받고 있는 캠프를 다녀오는 도중에 대통령이 갑자기 논 옆에 차를 세웠다. 옆의 논에는 벼들이 무성히 자라 이미 패기 시작하는데, 거기는 오래 전 누군가 모를 심다 말고 가버린 논이었다. (중략) 대통령은 빈 논둑을 말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말라버린 모 묶음을 움켜쥔 대통령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통령은 국민들의 양식과 다가올 추수를 걱정하였다. “농민들이 공산당한테 곡식을 빼앗겨서는 안 돼! 우리는 추수 전에 땅을 되찾아야 해!” 대통령이 결연히 말했다. 

    1950년 8월20일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대구 임시관저에 있을 때 두어 번 미8군에서 냉동 고기류와 빵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또 시민들은 대통령이 들도록 감자·옥수수·계란·닭 등을 지게에 지고 와 두고 가는 적도 있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이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날씨가 더워 고기나 빵 같은 것은 하루만 지나면 상하는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양(모)씨를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부산 훈련소에 다녀오지. 저 음식들을 갖고 가서 자네 솜씨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1950년 9월26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서울 수복 소식을 듣고)
    대통령과 나는 부산역으로 나가 특별열차 편으로 오전 9시 청도를 향해 출발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넓은 들이 펼쳐지고, 그곳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마을 초가지붕엔 빨간 고추가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대통령은 이제 우리 농민들이 마음 놓고 추수를 하게 되었다며 만족해했다. 
  • 위기상황 속 대통령의 모범 리더십 

    위기상황 속에서는 인간이 본성을 숨기기 어렵다. 국민을 생각한다는 지도자들 역시 6·25전쟁이라는 위기 앞에서는 자기 자식 챙기기에 급급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의 아이들(국군을 지칭)'이 전쟁터로 뛰어드는 시각, 고위층의 아들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권력층과 부유층은 앞 다퉈 일본행 여권을 신청했다. 그 속에서 이 대통령은 군에 보낼 아들이 없어 지도자로서 먼저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입으로는 반미를 외치고, 자사고 폐지를 외치면서 자기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현재 좌파 정치인들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9월8일 
    한 명의 젊은이, 한 자루의 총이 아쉬운 때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힘 있고 빽 있는 사람의 자식들은 요리조리 군대를 기피하고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린다. 장면(張勉) 당시 주미대사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부탁해 두 아들의 미국유학비자를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통령도 무초 대사로부터 한국정부 요인들이 자기 아들들의 유학비자를 부탁해와서 골치가 아프다는 불평 비슷한 소리를 듣고 몹시 괴로워했다. 대통령은 “이럴 때 우리에게 아들이 있어 군에 입대시켜 직접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은 언제나 모범에 기초했다.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가 전시 시찰 가서 먹으라고 챙겨준 샌드위치 하나를 다섯 조각내 수행원들과 나눠 먹는 장면은 그가 추구하는 리더십의 실체를 보여준다. 

    일하는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겨울이 오기 전 주택난을 해결할 것을 주문하고, 원조물자 분배 과정에서 부정이 없도록 지시했다"는 기록에서는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목격한다. 이 대통령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신속하게 전후복구사업에 착수했다. 이 대통령은 전쟁으로 폐허된 땅에서 산림을 지켜내기 위해 화목(火木) 대신 석탄·토탄·무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도록 해서 산림을 보호하고, 산사태를 막아 좋은 농지를 유지하는 정책을 구현했다. 

    이 대통령은 25세 연하이자 외국인인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를 비서로 고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부상병들의 형편을 알리고, 담요와 시트 등 구호품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하루에 37통의 편지를 써 보냈다. 애국자 대통령을 남편으로 맞이한 탓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한민국 사람보다 더 대한민국을 사랑한 사람이 됐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동란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훗날 "대통령은 장례에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라 사정이 빈까지의 여비도 문제였지만, 한시라도 대통령 곁을 떠날 수 없는 싱황이라 엄두를 못 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나라 대통령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천륜지정쯤은 남의 이야기로 여겨야 가능했다. 일하는 대통령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그랬다. 

    서운할 법도 한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이렇게 기록했다.  

    "16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통해 대통령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돈을 주고 산 선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 송이 꽃이나 한 개의 사과 같은 것을 주더라도, 그때마다 방법이 신기롭고 걸맞아 나를 한없이 즐겁게 해주곤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는 그런 이승만이 있다. 

    ◎저자 약력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00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에서 태어나 빈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 영어 통역사와 타자 및 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3년 어머니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 이듬해 뉴욕에서 결혼했다. 1946년 이 박사와 함께 귀국하여 돈암장에서 거주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경무대로 옮겼다. 1960년부터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망명의 나날을 지냈으며, 이 박사 서거 후 빈으로 돌아갔다. 1970년 영구 귀국,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타계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이승만 전 대통령 곁에 묻혔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진실한 후원자이자, 대통령의 충실한 동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