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과 대한민국 ➏                  

    하지와 이승만의 갈등과 헌신

    정 일 화 /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정치학박사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남한을 군사통치했던
 미24군단장 하지(John Hodge. 당시 52세)중장은 일리노이대학을 나온 엘리트장교로
필리핀 레이테전투를 이기고 피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해 일본패망의 문을 연
태평양전쟁의 최고수훈자 급 인물이었다.

남한점령군사령관으로 와 식민지후유증을 딛고 3년간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공헌 했지만
이승만이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을 세운 분단주의자로 비판 받듯이,
그 역시 한국을 모르는 거만한 미국인으로 평가되어 왔다. 
“한국인들은 고기나 채소는 안 먹고 쌀만 달라고 데모 한다”는 것이
하지의 오만과 무지를 대표하는 말로 흔히 인용되고 있다. 
1945년 8월15일 남한은 일본식민지의 일부로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한반도는 1910년 일본에게 망하고 또 1945년 일본과 함께 연합군에게 다시 망한 존재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은 해방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8월15일 이후 모든 공장과 일터는 문을 닫고 무작정 놀았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9월12일 정당 사회단체대표 1천2백명을 모은 자리에서
한국인이 진정 독립을 원하면 질서를 갖고 독립을 위한 합당한 일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 해방후 미국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오른쪽)와 하지 미군정 사령관.(왼쪽)
    ▲ 해방후 미국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오른쪽)와 하지 미군정 사령관.(왼쪽)

    정당 사회단체가 요구하는 것은 일본인 재산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것,
    일본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즉각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데
    나라가 서려면 경제가 있어야 하고 법체계가 있어야 하며 독립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 연합군이 지금 당장 독립을 허락 한다한들,
    일본이 세밀히 얽어매 놓은 한반도식민지법은 어떻게 풀 것이며
    쓰러진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직도 남한에는 어마어마한 일본군 병력과 경찰이 그대로 있었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은 후 맥아더장군은 연합군총사령관 이름으로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1, by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를 발표하고 일본의 모든 영토와 그 부속도서, 그리고 한반도의 38선이남과 필리핀은 미태평양육군사령관인 본인이 항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반도는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미영중소의 신탁통치를 잠정적으로 할 것을 합의했음을 동시에 고시했다.  
    9월2일 맥아더는 별도로 미육군태평양지구 사령관의 이름으로 한국국민에게 보내는 선언 제1호(Proclamation No.1 by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Commander in Chief, US Army Forces, Pacific)를 발표하고,
     1)38선 이남의 모든 한국영토의 통치권은 본 사령관에게 속한다.
     2)정부 및 공공기관의 종사자들은 현재대로 업무를 계속한다.
     3)본 사령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4)재산권은 보호되며 일반업무는 계속된다.
     5)공용어는 영어로 한다.
     6)필요한 것은 차후에 결정될 제반 규칙 법률 지시등에 따른다고 발표했다.

    한국으로 볼 때 공용어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바뀐 것 외에는 법적으로 바뀐 것이 없었다.
    한국은 여전히 주권도 없었고 통치기구도 없었다.

    서울 용산에 위치해 있던 일본제17방면군사령관 요시오 고즈키중장은
    소련군이 이미 개성까지 점령해 왔는데 미군은 들어오지 않고 있어 불안감이 태산 같았다.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는 것 보다는 미국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사령부에 빨리 미군을 들어오게 해 달라고 열심히 전문을 보냈다.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 행사에 참석한 맥아더를 맞아 담소하는 이승만 대통령.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하지 사령관.(KBS화면 캡처).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 행사에 참석한 맥아더를 맞아 담소하는 이승만 대통령.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하지 사령관.(KBS화면 캡처).
  •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부대인 미24군단에게 한반도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하지장군은 예하 7사단 일부병력인 6백90명과 함께 9월6일 인천에 도착했다.
    7사단장 아놀드(Archibald V. Arnold)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인들의 본국귀한문제 외에는 별다른 정책방침을 받지 못한 상태로
    해방 후의 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7사단 병력에 이어 40사단, 6사단병력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각 지방의 도지사와 미군주둔군도 질서있게 배치했다. 하지는 전후문제처리위원회인 국무성-전쟁성-해군성조정위원회(SWNCC)의 명령 176/8호에 의거 적군영토점령군 사령관 자격(conventional powers of a military occupanht of enemy territory)으로 일본총독부의 모든 권한을 인수하고 일본체제를 해체하며 식민지재산을 몰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여운형이 일본 아베총독의 위임을 받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고
    한반도적화운동의 본부격인 소련영사관도 페쇄하면서
    민주주의 교육체제를 만들어 새 교육을 실시했다.
    해방후의 혼란기를 틈타 어쩌면 공산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본격적인 군정 거부, 하지장군에 대한 비난행위가 거세졌다.
    철도파업, 대구 10월폭동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전염병도 창궐했다. 

    하지가 맥아더사령부로부터 받은 명령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막연한 문구뿐이었고 독립이 어떤 형태로 이뤄질 것이라든지 언제쯤 이뤄질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세가 없었다.

     이미 갈라져 있는 38선을 두고
    첫째는 소련주둔군 사령부와의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
    둘째 미영중소의 최대 5년에 걸친 신탁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지침만 받았다.
    하지는 군사명령체계로서는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에 속해 있었으나 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무성의 행정지휘아래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혼란이 많았다.
    맥아더사령부에서는 일본관리를 그대로 두고 행정을 지속하라고 명령했으나
    국무성은 당장 일본관리와 행정체제를 폐지하라고 명령했다.

    하지가 가장 껄끄럽고 거북하게  여겼던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다른 많은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본재산의 선점, 일본인 추방 그리고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38선이남에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총선거를 통해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철학이 너무 강해 도무지 타협이 되지않았다. 

    이승만은 38선 이북의 소련과는 처음부터 대화가 안 되는 상대라고 못 박고 있었으며
    하지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상하고 있을 때도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는 물론 좌파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국무성의 명령에 따라 남북한 통일정부 또는 남한의 중립정부 구성을 추구하는 하지와
    때로는 극렬한 대립을 했다.

    이승만은 52세의 앞길이 창창한 하지중장에게
    "당신의 그런 태도 갖고는 별을 더 달기는 글렀다"라고 비난하였고
    하지는 이승만(70세)에게" 당신의 대통령되는 것을 절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막말을 하기도 했다.
  • ▲ 1945년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를 하지 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박사(왼쪽).
    ▲ 1945년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를 하지 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박사(왼쪽).
  • 신탁통치안, 남북협상안, 남한의 중립정부안을 극복하고 총선에 의해 1948년 8월15일 자유민주국인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을  때 하지는 바로 그날 서울을 떠나려 했다. 지쳐 있었다.  
    그는 점령군사령관으로서 38선 이남의 일본통치권과 재산을 몰수하여 3년간 잘 관리하다가
    유엔에 의해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그대로 대한민국에 이양했다.
    천년은 갈 것이라고 장담하던 일본의 한반도점령은 미군정청의 몰수과정을 거쳐 몰수 되어 끝이 나고 한국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승만은 하지장군을 3일만이라도 더 있다가 가라고 권했다.
    그는 하지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 헌신한 하지의 노력에  한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는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면서 지난 3년간 조병옥-장택상으로 구성된 반공치안질서팀을 한번도 바꾸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 탄생에 공이라면 공일 것이라고 말했다.
    4성장군으로 진급되어 미국남부기지사령관을 하고 있던 하지를
    뒤에 유명한 언론인이 된 포병장교 이도형씨가 찾아갔다.
    하지는 ‘이승만박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여러번 했다.

    두 거인중 한 사람은 자유대한민국의 탄생에 전력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대한민국탄생을 위해 자유질서를 수립하고 민생을 살리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다. (jcolum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