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 ▲ 신팔균 선생.ⓒ전쟁기념관
    ▲ 신팔균 선생.ⓒ전쟁기념관


    "우리는 비록 약소 민족이지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문화 민족이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힘을 기르자, 독립을 찾자, 그래서 온 국민을 일제의 사슬에서 구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무이며 꼭 실현해야 할 과업이다"

    전쟁기념관은 항일투쟁에 일생을 바치고 독립의 후예들을 기르다 순국한 신팔균 독립운동가를 올해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신팔균 선생은 1882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해 삼도수군통제사와 병조판서 등을 지낸 조부 신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부친 신석희 슬하에서 자라며 무인의 피를 물려받았다.

    신 선생은 1902년 육군 참위로 임관한 후 1907년 군대 해산 직후까지 황실의 경호를 맡아 대한 제국의 마지막 군인으로 복무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직후인 1909년 충북 진천으로 낙향해 보명학교를 열고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집중했다.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시켜 독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신 선생은 자금문제로 보명학교의 존립이 어려워지자 집안 누대로 내려오던 고택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독립자금을 마련해 학교 운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외를 벗어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신 선생의 주요 활동무대는 만주의 서간도와 북경 등지로 1919년에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 운동가 39명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하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신팔균 선생의 호는 동천(東天)으로 지청천, 김경천 장군과 함께 '삼천(三天)'으로 불리며 위명을 떨쳤다.

    1920년대는 무장 투쟁 조직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신 선생은 이곳에서 잔여병력과 모병 인원을 개편하고 인원을 선별해 사관양성소 격인 '사관학원'을 개설해 직접 훈련시켰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신팔균의 참여로 대한통의부가 독립단 중 제 1위의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무장투쟁을 주도한 중요 인물이었다.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신팔균 선생은 1924년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함으로 끝내 독립운동의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민족 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는 3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종증 및 유관단체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