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역 앞둔 F-4 팬텀 전투기‥지금도 주요한 전략자산
  • ▲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이 F-4E 전투기에 탑승해 새해에도 빈틈없는 강력한 전방위 대비태세를 점검했다.ⓒ공군
    ▲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이 F-4E 전투기에 탑승해 새해에도 빈틈없는 강력한 전방위 대비태세를 점검했다.ⓒ공군

    2015년 1월 1일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은 F-4E 전투기 지휘비행을 실시하며 우리 공군의 강력한 전방위 대비태세를 점검했다. 공군참모총장이 선택한 F-4 전투기는 현재도 중요한 항공자산이다.

    ◇베트남 파병 34만명의 ‘고혈’로 도입한 F-4D 팬텀 전투기

    공군의 미래 항공 자산이 될 KF-X(국산차기전투기)개발 사업이 본격착수됐지만 현재 운영중인 F-4 팬텀과 F-5 전투기가 도태하는 2019년부터 우리군이 유지 해야할 전투기 대수가 현격히 줄어 들면서 사실상의 안보공백이 생기게 되는 위험한 상황이 온다.

    팬텀은 가장 많이 생산된 제트전투기 중 하나로 모두 5,195대가 생산됐다. 서방 측의 초음속 전투기로서는 최다생산 기록에 해당한다. 비교대상을 서방 측 아음속 제트기로 넓혀도 F-86(9,467대), F-84(7,524대)에 이어 3위의 기록이다. 보유국 내에서도 80년대 후반까지도 제1선의 주력 전투기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세대별 전투기 구분의 범주에만 놓고 보면 3세대 전투기 마지막 후계기로 볼 수 있다. 

  • ▲ 제 17전투비행단 소속 F-4E 팬텀 전투기.ⓒ정상윤 뉴데일리 사진기자
    ▲ 제 17전투비행단 소속 F-4E 팬텀 전투기.ⓒ정상윤 뉴데일리 사진기자

     팬텀의 최초 비행은 1958년 5월27일 맥도널 더글라스(이후 보잉에 합병)사의 원형기 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첫 이륙했다.17개월 동안의 총 비행횟수만 296회. 혹사당한 원형기가 추락해 위기를 맞았을 때 2호기가 고도상승·속도 등 각종 기록을 해치우며 미군에 정식 납품할 수 있었다. 

    가혹한 성능검증이 최고의 전투기로 탄생한다는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북한공군 열세였던 한국공군, 팬텀 도입으로 아시아 최강 전력으로 ‘급상승’ 

    한국은 1969년 당시 최신·최강의 기종인 팬텀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에 이어 4번째로 보유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최신예 전투기를 보유한 국가가 된다.

    특히, 팬텀의 대당가격은 1947년에 선보인 F-86의 22만달러보다 10배 이상 되는 240만달러로 구매할 여력을 지닌 나라가 많지 않은 당시, 우리군은 베트남(월남)전 파병 댓가로 얻은 고혈(膏血)의 산물이기에 더욱 값진 군사무기였다.

    1960년대 후반 당시를 살펴보면 북한공군은 15분내 150대 전투기를 전기지에서 비상출격 할 수 있었고, 레이더 기지를 포함한 완벽한 방공망을 구축한 상태였다.

  • ▲ 대한민국 최초의 F-4D 팬텀 전투기 모습(1969년 8월 29일). 우리가 첫 도입한 팬텀의 기종은 D형이다. 이후 E형도 추가도입해 오늘날 까지 운용한다. ⓒ공군
    ▲ 대한민국 최초의 F-4D 팬텀 전투기 모습(1969년 8월 29일). 우리가 첫 도입한 팬텀의 기종은 D형이다. 이후 E형도 추가도입해 오늘날 까지 운용한다. ⓒ공군


    특히 북한은 남한에 비해 저고도 탐지능력도 우수해 북한의 영공은 ‘철옹성’ 그 자체였다. 반면, 한국 공군은 보유기 숫자상 북한의 절반수준으로 주력 전투기로 F-5 A/B 프리덤 파이터와 F-86 세이버 전투기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일본과 대만은 이미 F-105 ‘스타파이터’라는 마하 2급 초고속 요격용 전투기를 도입, 운용하고 있어 우리와 상당한 격차를 두고 있었다. 

    이같은 현실을 인식한 공군은 1966년 당시 장지량 참모차장을 통해 ‘공군증강 5개년 계획’을 통해 팬텀 도입을 건의한다. 

    이듬해 정일권 국무총리는 맥나마라 미국방부 장관과 협의통해 한국군 장비 현대화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팬텀 전투기 도입의 단초가 되는 ‘미공군의 팬텀 전투기 공급 연구검토’ 단계에 이른다. 

  • ▲ 팬텀 인수를 위해 도미한 선발 대원 모습(1969년 5월 30일).ⓒ공군
    ▲ 팬텀 인수를 위해 도미한 선발 대원 모습(1969년 5월 30일).ⓒ공군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반영…'팬텀'도입 안되면 베트남 '철군'

    1968년 초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이 동시 맞물려 한반도내 위기가 고조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중대요구 및 중대결의'통고를 하게 된다. 

    이후 사이런스 밴스 특사가 방한하면서 팬텀 전투기 도입에 대한 공식 거론이 됐고 4월 18일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한·미 정성회담에서 '대북 즉각보복'문제를 주장하며 다음달인 5월 28일 34대의 팬텀 전투기(F-4D 블록 26~28)의 연내도입에 합의 하게 되면서 본격 팬텀 시대를 맞는다.

    이 기체들은 F-5A처럼 미국으로부터의 임대형식으로 받았지만 몇 대만 일시 사용 후 반려되었고 대부분은 그대로 우리 공군의 보유기가 된다.

  • ▲ 최초의 팬텀기 부대인 151대대기를 수여하는 박정희 대통령(1969년 9월 23일).ⓒ공군
    ▲ 최초의 팬텀기 부대인 151대대기를 수여하는 박정희 대통령(1969년 9월 23일).ⓒ공군


    한국이 단 시간내에 팬텀을 도입한 배경에는 우리군의 베트남 파병이 주효했다. 앞서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 4월부터 파병을 시작해 1973년 3월까지 8여 년 동안 총 34만 여 명이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고 우리정부는 팬텀전투기 도입협상을 위한 카드로 ‘베트남 철군’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한국군은 베트남 파병에서 모두 5,066명이 전사했다. 

    이국땅 베트남에서 피땀을 흘린 장병들이 없었다면 한국군은 무기현대화는 물론, 최신예 전투기 F-4 팬텀을 도입하는데 더 많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처럼 힘들게 만들어낸 전략자산인 팬텀 전투기를 더욱 알차게 운용하기위해 공군은 1970년대 말까지 팬텀 작전준비태세를 완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종·정비·무기 등 각 분야 요원 112명을 미국에 급파해 자제적 운용을 위한 준비에 나선다.

    이어 6명이 1969년 8월 29일 태평양을 건너 대구기지로 직접 이 전투기를 몰고 오면서 제151전투비행대대(팬텀대대)가 창설 된다. 이른바 공군의 '팬텀기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 ▲ F-4 팬텀이 출격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받고 있다.ⓒ정상윤 뉴데일리 사진기자
    ▲ F-4 팬텀이 출격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받고 있다.ⓒ정상윤 뉴데일리 사진기자


    ◇국민의 ‘자주국방’ 열망이 반영된 ‘방위성금 헌납기’

    1974년 월남 패망과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화되자 자주국방을 이룩하자는 방위성금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단 시일내 163억원이라는 큰 돈이 모아졌다. 

    정부는 이 중 65억원으로 1975년 12월 12일 5대의 F-4 팬텀 전투기가 '방위성금헌납기'로 추가 도입한다. 방위성금헌납기는 도착한 첫날 대구기지에서 '필승편대'로 명명된다.  

    1989년까지 총 80대의 F-4D(블록 26~28)가 도입돼 조국 영공방위의 최일선을 누비며 1983년 구 소련 TU-16, 1984년 구 소련 TU-95 및 핵잠수함, 1985년 부산 앞바다 간첩선, 1998년 동해 출현 러시아 정찰기(IL-20) 식별·요격 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 ▲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방위성금 헌납기, 일명 '필승편대'ⓒ공군
    ▲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방위성금 헌납기, 일명 '필승편대'ⓒ공군


    이처럼 조국의 영공 수호에 앞장섰던 F-4D 팬텀 전투기는 41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2010년 6월 16일 대구기지에서 F-4D 퇴역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를 끝으로 F-4D 도입과 함께 창설됐던 제151전투비행대대도 해체됐다. 41년 동안 F-4D 전투기만 운용해 온 이 부대는 1985년 이후 퇴역까지 24년 7개월 동안 8만8,000시간(누적 비행시간 기준) 무사고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한국공군 ‘팬텀’ 도입에 놀란 일본…팬텀 중 가장 최신형 ‘F-4E’ 도입

    F-4D 팬텀으로 동북 아시아 최강의 항공전력을 보유하게 된 한국. 이에 놀란 일본은 1970년 도입을 결정해 1973년에 F-4D보다 더욱 개량된 최신형 F-4E 팬텀를 도입한다.

    이에 뒤질세라 1976년 한국은 로 명명된 신조 기체 F-4E Block 64 19대를 발주해 1977년 첫 전력화를, 1978년에는 F-4E Block 67 18대를 발주·인도 받아, 같은해 제11전투비행단 제152전투비행대대에 그리고 1979년 6월 제153전투비행대대에 배치했다.

    이후 F-4E 팬텀은 청주에 위치한 '제17전투비행단'으로 이동돼 현재까지 우리군의 핵심전력으로 영공방위를 위한 비행을 하고 있다.이후 공군의 팬텀 전투기는 미 공군 저장분(MIMEX)을 도입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장 마지막 생산된 팬텀 전투기인 5,057번째 기체가 한국공군 소유이다. 

  • ▲ 초계비행에 나선 F-4E 팬텀 전투기.ⓒ정상윤 뉴뎅일리 사진기자
    ▲ 초계비행에 나선 F-4E 팬텀 전투기.ⓒ정상윤 뉴뎅일리 사진기자


    1982년에 F-4D 6대와 1985년에 F-4E 4대를 인도받고, 1987년 12월부터 1988년 4월 사이에 24대의 F-4D형, 1988년에 F-4E 24대, 1989년 오산 미 공군 제51전투비행단이 F-16C/D 전투기로 기종 전환을 하면서 F-4E 1개 대대분 19대를 포함, 30대의 F-4D/E를 추가 인도받았다. 

    ◇팬텀 전투기, 퇴역하는 그날까지 '대한민국'영공 지킨다

    한국 공군에게 팬텀 전투기는 여전히 중요한 자산이다. F-15K가 도입되면서 함께 들어온 장거리 공대지 유도탄인 ‘슬램ER’이전까지는 팬텀의 ‘팝아이’ 미사일이 항공 타격력으로는 유일하게 평양까지 폭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대한민국 영공방위에 있어 팬텀은 수십 년간 북한의 도발에 대한 즉각 보복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전략무기로 자리매김 해왔다.

    47년이 지난 현재까지 팬텀이 조국 영공방어에 빈틈을 내주지 않는 이유다.이 같은 이유는 팬텀 전투기에만 있는 AGM-142 '팝아이‘ 미사일 때문이다. 우리 공군은 스크램블(긴급출동) 사이렌이 울리면 30분도 안 돼 F-4E에 '팝아이'를 장착하고 이륙할 수 있다. 

    팝아이는 사정거리 112km로 1m 이내의 오차로 정확도를 자랑한다. 특히 2m 두께의 콘크리트도 관통할 수 있는 구조의 탄두중량은 350kg이나 된다. 팬텀 전투기의 임무를 대체할 F-15K가 운용하는 탄두중량 230kg의 SLAM-ER 미사일보다 파괴력이 강하다.

  • ▲ 팬텀 전투기가 팝아이 미사일을 달고 훈련 비행중이다.ⓒ공군
    ▲ 팬텀 전투기가 팝아이 미사일을 달고 훈련 비행중이다.ⓒ공군

    팬텀 전투기가 도태되는 2019년이 되면 제17전투비행단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도깨비들’이 떠나면 ‘번개돌이’가 이곳 제17전투비행단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차기 전투기로 낙점된 최신예 스텔스 'F-35A 라이트닝II‘ 전투기가 팬텀 전투기의 화려한 역사를 이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