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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열풍과 그 속에 가려진 이야기

고성혁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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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8-14 10:48 수정 2014-08-14 11:12

<명량>의 열풍과 그 속에 가려진 이야기
우린 역사에서 교훈을 못 얻는 민족인가?

고성혁(견적필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명량>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로는 1977년 영화 <난중일기>가 있었다.
故 김진규씨가 주연했던 영화 <난중일기>는 흥행엔 참패했다.
너무 뻔(?)한 레퍼토리에 모형을 이용한 조잡한 해전 영상은 영화의 질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번에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은 대히트를 기록 중이어서
이순신장군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나마 면목이 서는 듯하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民族의 聖雄으로 추앙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짓고 광화문 한 복판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면서
온 국민에게 새롭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으로서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본 덕분일 게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倭軍)을 무찌르는 모습만 본다면 통쾌하겠지만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었다.
당시 인구의 30%가 줄어들 정도였다.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지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할 정도였다.
이토록 빨리 왜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이 왜군에 협력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당시 조선은 그랬다.
조정은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당쟁을 벌였다.
文官 우대정책으로 인해서 武官은 천대받기 일쑤였다. 군대도 유명무실했다.
실제 동원가능한 군인은 거의 없었다. 군인은 장부에 기록된 숫자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 그랬을까?
 이 모든 책임은 한 인물에 귀속될 수 있다.
바로 조선의 임금 선조다. 국가의 위기는 지도력의 위기에서 초래하기 때문이다.

東西로 분열된 조선 조정, 원흉은 선조 임금
 
조선왕조의 임금은 모두 27명이다. 왕위계승에서 적장자로 계승된 경우는 1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정변이나 비정상적인 왕실의 傍系를 통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
 
선조는 중종(中宗)의 서자였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일종의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선조의 컴플렉스는 끊임없는 당쟁의 소용돌이의 원천이었다.
왕권을 보존하기 위해 임금인 선조는 신하들을 분열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극심했던 조선의 사색당파(四色黨派)는 조선 선조때 사림(士林)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시작했다. 그런 선조가 왕위에 무려 40년간 있었으니
조선에 망조(亡兆)가 안 들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판도 보면 지역색에 기반하여 東西 양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다.

조선시대 선조때도 그랬다.
영남문인세력인 東人과 기호(경기+호남)지방중심의 西人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선조는 이들 동인과 서인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어느 한쪽이 힘이 실리는 것을 원치 않은 선조는 끊임없이 동인과 서인이 싸우도록 만들었다.
동인세력에 힘이 실리는 것 같으면 서인세력의 끌어들여 동인세력을 제압했다.
반대로 서인세력의 힘이 깅헤지면 동인세력에 힘을 보탬으로서 서인세력을 끌어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국론분열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극심한 동인 서인의 대립은 군권(軍權)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수(將帥)조차도 東西 兩 진영에 속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東人의 영수(領袖)였던 서애 유성룡이 천거했다. 원균은 西人세력이 천거했다.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던 정치세력은 서인세력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갔던 조선통신사는
 그 보고 내용이 서로 달랐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했던 正使 황윤길은 서인이었던 반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副使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심지어 일본 사신이 와서 경고까지 했었다.
토요토미가 조선에 야스히로를 사신으로 보냈다.
야스히로는 조선 관군의 창이 짧을 것을 보고 비웃었다.
“저 짧은 창을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겠소이까”라며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경상도 상주에 도착했을 때 상주 목사 송응형이 그를 응대하면 잔치를 베풀었다.
야스히로는 송응형 목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야 오랜세월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이렇게 터럭이 희어졌소.
그런데 귀공께서는 기생들의 노래 속에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 머리가 희어졌소?”

서울에 도착하여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푼 자리에선 아랫사람들의 행실이 제멋대로 인 것을 보고선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공권력이 무너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야스히로 다음의 사신은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였다.
그는 선조임금에게 공작새 두 마리와 조총, 창, 칼을 공물로 바쳤다. 왜군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왜군의 무장상태를 넌지시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이 때 조총이 조선 조정에 처음 전해졌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조총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창고에 쳐박아 두고 말았다.
군인보다는 붓을 잡은 문관들이 지배하는 조선은 전쟁무기에 대해 그만큼 無知했다.

外敵 보다는 政敵에 대한 모함거리만 찾았던 것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실상이었다.
  
정철과 유성룡
 
서애 유성룡과 송강 정철은 우리에겐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기록을 남겨 후세에 경계를 하고자 했던 《징비록》의 저자 서애 유성룡,
그리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의 저자 송강 정철은 정치적으로는 숙적(宿敵)이었다.
유성룡은 동인세력의 수장이고 송강 정철은 서인의 영수였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동인세력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권력 유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율곡과 성혼(成渾)의 각별한 인정을 받고 있던 정여립은
서인(西人)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1584년(선조 17년) 이이, 성혼, 박순(朴淳) 등 西人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면서 군사적 세력을 확장했다.
 
이런 행보는 서인세력에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호기(好機)였다.
정여립의 운명을 결정지은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에 일어났다.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조임금에게 고변했다. 

선조는 격노하였다. 정여립의 집은 파헤쳐져서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이 사건은 조선 중기 최대의 정치사건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정치권력은 동인에서 서인으로 옮겨갔다. 송강 정철이 정치적 수장이 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송강 정철은 반대세력인 동인을 가차없이 숙청했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세력과 관련된 인물이 무려 1천 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 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의 역변이 일어나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서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얼마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정여립 옥사로 주도권을 잡은 정철과 서인측에서는 승부수를 띄웠다.
다름 아닌 세자 책봉과 관련된 건저의(建儲議)였다. 국왕 선조가 생존한 상태에서 세자 책봉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 신하들의 입장에서 사실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일로 정철은 거의 정치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선조임금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송강 정철은 삭탈관직 당하고 귀양을 떠났다.
그때 지은 것이 사미인곡(思美人曲)이다.

정권은 다시 東人에게로 돌아왔다. 류성룡이 전면(前面)에 등장했다.
류성룡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다.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이 민족을 구했다.
  
선조의 요동 망명을 막은 유성룡
 
선조는 그저 도망하기에 급급했다. 의주에서 요동으로 망명하려고까지 했다.
이에 류성룡이 나서서 극구 만류했다. 류성룡은 선조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곳으로 피난 오신 것은 명의 구원병을 기다렸다가 나라를 수복함입니다.
지금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놓고 오히려 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면 적이 길을 가로 막아 명나라와 통신도 어려워 질 겁니다. 이러고서 어찌 서울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으로 갔다가 불행히도 敵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북쪽 여진 오랑캐 땅밖에는 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곳에 기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신(臣)들의 가족이 그곳으로 피해 있는 까닭에 그곳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은 듯 합니다. 신의 늙은 어머니 또한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이 땅을 버리시고 가신다면 더 이상 이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 선조임금의 망명을 막은 류성룡.
그가 결과적으로 이 나라를 두 번 구한 셈이다.

광해군의 등장과 戰亂의 수습

선조가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을 때 선조의 아들 광해군은
의병(義兵)들을 수습하여 열심히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서인 세력은 도망가기 급급했던 반면에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던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생들이 의병장의 선봉에 섰다.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훗날 북인세력의 수장인 정인홍(鄭仁弘),
전라도지역 의병장 고경명 등 대부분의 의병장이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광해군과 호흡을 같이 했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남명 조식선생 문하생들은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는 사림세력을 비판했다.
호남의 유림 기대승과 영남문인세력의 태두인 이황 퇴계와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서신 교환도 남명조식 문하생들에겐 비판의 대상이었다.
 
실사구시를 강조했던 남명학파는 훗날 실학사상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민심을 수습하고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광해군과 북인세력을
 선조는 또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조는 끝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은 훗날 인조반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우린 역사에서 교훈을 못 얻는 민족인가?
 
당시 왜장 고니시를 따라 왔던 승려 덴게이(天荊)는 《서정일기》에 이 날의 동래성에서
 ‘목을 벤 게 3천여, 포로가 5백 여 명’이라고 기록했다 한다.

임진왜란 이후 40년 후엔 병자호란을 그리고 또 그로부터 약 300년 후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역사다. 지금 우리는 군축론자들로부터, 거짓된 평화론자로부터 국방력이 도전받고 있다.
복지가 이슈가 되는 시절에 국방력 강화의 목소리가 자칫 위축될 수도 있다.
국방과 안보가 무너진 상황에선 무슨 복지가 필요할까?
조선조의 명장(名將) 김종서 장군은 이런 글을 남겼다.  
 
군사를 훈련시키려고 하면 어떤이는
'백성이 굶주리고 있으니 할 수 없다'하고,
 
무기를 수리해 놓으려 하면
'백성이 가난하니 할 수 없다'하고,
장정의 숫자를 점검해 보려고 하면
'백성이 놀라서 시끄럽게 되니 할 수 없다'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려하면
'국고가 비어 있으니 안 된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국고가 비었다고 해서
오랑캐가 쳐들어 오지 않는다는 것 입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에 전혀 다르지 않게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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