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군인, 영화 연평해전 원작가가 말하는 ‘그때 그 이야기’
  • ▲ 29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12주년 기념식에서 군 관계자들이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헌화한 후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 29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12주년 기념식에서 군 관계자들이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헌화한 후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남과 북이 본 연평해전’ 토크콘서트에 참여한 한 청중이 전한 소감이다.

    청년지식인포럼 <스토리K>가 제2연평해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되살리기 위해 마련한 ‘남과 북이 본 연평해전’ 토크콘서트가 2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에서는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이희완 소령, 북한 4군단 여군출신 이소연 씨, 영화 ‘연평해전’원작자 최순조 작가가 강연자로 참석해 제2연평해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행사는 연평해전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내용의 동영상 시청을 시작으로, <스토리K> 이종철 대표의 인사말, 토크콘서트, 질의 응답 순으로 이어졌다.

    행사에 앞서 이종철 대표는 “이 자리가 6명의 영웅을 위로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이야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미래세대에게 전하려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강연자들은 연평해전을 기억하며 슬퍼하기도, 분노하기도 했다.
    특히 한정된 강연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현실에 진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희완 소령은 자신을 “대한민국이 부르면 두발 벗고 나서서 함께할 사나이”라고 소개하며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육도라는 섬에서 한 척이 내려오고 등산곶에서 한 척이 내려왔다.
    당연히 먼저 공격받았다.

    대한민국은 평화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선제공격하지 않는다.

    기습은 전투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총을 맞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과 같다.


    당시 부함장이었던 이희완 소령은 “사격명령이 내 주 임무였다. 85m의 포탄을 맞았을 때에 느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피격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북한함정이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격명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북한이 먼저 85m의 대형포탄을 우리에게 날아왔다.
    소리가 굉장히 컸다.

    조타실을 겨냥해 날아온 포탄은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이어 불도 났다.
    병사들과 교신을 하는 헤드폰에서는 “사상자가 난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립니다” 등의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특별한 전술을 쓸 수 없었다.


    이어 그는 “연평해전 같이 이렇게 가까이서 전투하는 것은 중세 이후 별로 없다”며 “거리가 멀면 진영을 다시 짠다든지 전술을 변경 할 수 있는데. 가까우니까 불가능했다. 때문에 무조건 포탄을 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사투를 벌인 부하들의 활약상을 설명할 때는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가 떨렸다.

    해전에 참전했던 권기형 상병은 왼쪽 손가락이 잘린 상태에서도 팔에 소총을 대고 싸웠다. 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탄창을 갈아 끼웠다.


    이 소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대한민국을 사랑해달라고 국민들이게 호소하고 싶다. 60년동안 일궈놓은 이 나라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2002년 당시 북한군 통신원으로 있었던 탈북자 이소연 씨는 “연평해전에 대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강연에 참석했다”며 입을 열었다.

    북한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도발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발적이었다면 전시상황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단순 전투태세명령이 있었을 뿐이었다.
    북한은 대한민국에게 이길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북한의 목적은 남한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 뿐이다.

    북한에 경제악화가 90년대부터 들이닥쳤다.
    그때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식량을 공급하며 대북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당시 대한민국에 대해 ‘남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인식했던 북한 주민들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정일이 북한주민의 결속을 위해 시작한 것이 1999년 발생했던 제1차연평해전이다.

    하지만 제1연평해전때는 북한군 37명이 죽거나 다쳤다. 참패한 것이다.


    이소연 씨는 “제1연평해전에 참패한 북한 군인들은 함선 개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보완하다가 시간이 흘러 2002년이 된 것”이라고 했다.

    6월29일 보름 전부터 정찰국 요원들이 서해NLL을 순찰했다.
    이때 정찰요원은 김정일에게 “장군님 국민이 월드컵에 젖어있다. 이럴 때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29일에 발생한 것이다.
    연평해전 이후 김정일은 “해군에서의 영웅은 제2연평해전에서 싸웠던 군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실제로 연평해전이 끝난 이후 참전 북한 군인들은 당시 없었던 컬러TV 등 보상을 받았다.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이다.


    이소연 씨는 강연을 마치면서 남북의 극명한 문화차이를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한을 끌어 안아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사랑한다, 행복하다 이런 말조차 몰랐다.
    북 주민 소원이 흰 쌀밥, 고기국 먹는 것이다.
    근데 여기 와서는 살찐다고 먹지 않게 된다.
    북한은 주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끌어 안아야한다.


    영화 ‘연평해전’의 원작자인 최순조 씨는 “나는 원래 엔지니어였다. 근데 이 사건에 분노해 1년6개월 동안 작가공부하고, 1년4개월 동안 연평해전 취재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제1연평해전의 연장이다.
    김정일의 정치역사에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항상 대한민국에 대해 ‘겉으로는 쌀을 주지만 언제든지 북침을 할 수 있는 괴뢰’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연평해전 발발 하루 뒤인 6월30일 김 대통령은 일본에 갔다.
    국민보고 알아서 하라는 꼴 이었다.
    이것은 아주 용서받을 수 없는 직무유기다.

    해외순방 갔다가 자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돌아오는 것이 국가원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올해 개봉을 앞둔 영화 ‘NLL-연평해전’의 제작이 그동안 지지부진 한 까닭도 설명했다.

    영화 만드는데 법정에서 4년동안 싸웠다.
    3군데의 제작업체와 영화제작 협상도 다 끝내고, 배우 캐스팅도 다했는데 하지 못했다.

    이유는 특정 정치적 목적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떠한 사건을 사람들로 하여금 잊혀 지게 하는 집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통수권을 버리는 대통령. 용사들의 희생을 무관심으로 답하는 대한민국이 되서는 안된다.


    이날 행사에는 2002년 태어난 소녀도 참석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소녀의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왔지만 나도 많이 배웠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다. 내 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자”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강연자들은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하는 질문에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자”고 입을 모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