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에 대한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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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부대를 방문하여 장병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2)
6 · 25 전쟁 기간에 국군에 대한 이승만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80세에 가까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주 전선과 훈련소를 찾아
군인들을 격려했다.
지프차로 위험한 산길을 달리기도 하고, 작은 정찰기를 타고 적의 포화를 피하기도 하였다.
눈사태와 장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선을 시찰했다.
이승만의 국군 사랑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밴플리트 장군은
<라이프> 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1951년 9월 이승만은 강원도 양구 북방의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에서 싸우게 될
3개 사단 장병을 격려하기 위해 펀치볼을 향해 출발했다.
이 대통령 일행은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쌍발기를 타고 전선에 가까운 계곡의 임시 비행장까지 날아갔다.
거기서 다시 덮개도 없는 작은 2인승 정찰기에 나누어 타고 북쪽으로 12마일을 더 날았다.
정찰기는 적군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
대통령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이처럼 어렵게 전방 시찰을 마친 다음 대통령 일행은 같은 코스로 부산의 수영 비행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 내리지 못하고 대구 동천 비행장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도 짙은 구름에 덮여 내릴 수가 없었다. 서울로 날아가기에는 연료가 부족했다.
근처에서 비행기가 내릴 수 있는 곳은 포항뿐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갔다.
겨우 활주로만 있는 곳이었다. 비행기는 낮게 드리워져 있는 구름을 뚫고 간신히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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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 시찰을 위해 헬기에 탑승한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 일행의 착륙은 예고가 없었던 것이었으므로 포항의 활주로에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몇 대의 지프차가 달려 온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그때는 군인들의 저녁 식사가 끝난 오후 7시 30분경이었기 때문에 대통령 일행은 야전식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일행은 비좁은 막사에 둘러앉았다가 밤 11시 지프차를 타고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부산가는 기차역으로 갔다.
그날의 일정은 젊은이도 힘들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내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격려했다.
전쟁 중에 대통령 관저는 임시수도인 부산에 있었지만,
이 대통령은 전선을 살피기 위해 수시로 위험한 서울로 올라와 경무대에 머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봄에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이 대통령은 정부 각료들 보다 2개월 먼저 서울로 집무실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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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대통령관저) 뒤뜰에서 장작을 패는 이승만대통령. 그의 유일한 운동이다.
서민적인 대통령
1948년 8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사저인 이화장을 떠나
경무대(景武臺)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가난한 나라 형편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절약해야 했기 때문에
대통령 부부는 경무대 건물의 일부만을 사용했다.
연회장이 있기는 했지만, 6 · 25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사용된 것은
1953년 8월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을 열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여가 생활도 소박한 것이어서,
경무대 뜰에서 산책을 하거나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장작 패는 것을 좋아해서 렌치, 드라이버, 펜치와 같은 공구(工具) 선물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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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관저에서 옷을 깁느라 바느질하는 프란체스카 여사.
하와이에 있을 때 익힌 낚시도 틈틈히 했다.
중앙청 뒤 경회루가 있는 연못으로 가는 일이 많았고, 시간이 나면 인천으로 가기도 했다.
6.25전쟁 중에 임시수도 부산에 있었을 때는 작은 배를 타고 진해 앞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술 ·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다.
자기 전에는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었다.
아침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가정 예배를 보았다.
그는 많은 사람과 사귀기 보다는 적은 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좋아했다.
손님은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나이가 훨씬 아래인 사람들에게도 공대를 할 정도로 공손했다.
국가의 탄생기에 외교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정부는 영어 잘하는 인재를 필요로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하는 일이 많았다. 그 경우에 타자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돕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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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에서 외교문서를 직접 타이핑하는 이승만대통령.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할 때 구입한 타이프라이터는 그가 하야할 때까지 사용했다.
오랜 세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 대통령은 언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취임 초기에는 매주 기자 회견을 가졌다.
주된 관심이 국제 문제였기 때문에 외신기자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다.
외신기자들을 위해 영어로 먼저 말한 다음 다시 국내 기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말했다.
6 · 25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정기적인 기자회견 대신 특별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인터뷰에서 제외된 신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은 국민과 말하기를 좋아했는 데,
대표적인 경우가 1949년 4월 하순 특별열차로 8일간 시행한 지방 순시였다.
이때 그는 기차역에 내려 군중을 만나느라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사흘이 걸렸다.
모두 26번 기차를 세우고 연설을 했다.
작은 간이역이라 할지라도 농민들이 모인 것이 보이면 열차를 멈추게 하고
잠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악수를 했다.
6 · 25전쟁 중에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아주 작고 낡은 건물을 임시관저로 사용했다.
제대로 된 난방시설도 없는 곳이었다. 아래 사람들은 거처를 옮길 것을 강력히 권했지만,
그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