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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 미국 여론에 호소하는 성명을 여러차례 발표하여 미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미국과 유엔의 어리석음을 한탄
그러면서도 미국은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휴전하려 했다. 그리고 휴전을 위해서라면 공산군 측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그리하여 캐나다의 피어슨을 위원장으로 하는 유엔 휴전 3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공산측이 휴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가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엔 휴전 3인위원회가 만든 휴전 시안은 1951년 1월 3일에 유엔에 제출되었다.
제안의 골자는 중국과 소련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한민국을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고,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무효화(無效化)하는 것으로써
대한민국을 희생으로하여 휴전한다는 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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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판문점 휴전 협상.
이승만이 펄펄 뛰며 반대할 것은 당연했다.
설사 그 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선거는 북한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이미 유엔 감시 아래 선거를 치러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반대가 너무나 완강했기 때문에,
유엔 측은 그 제안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엔의 휴전 방침은 확실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부터 개성에서 시작되어 판문점으로 옮겨가면서
중단과 계속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1953년에 들어오면서 휴전은 성립되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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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휴전반대 국민대회. '38선정전은 용공정책이다. 결사반대한다' 플라카드.
이승만은 휴전에 찬성할 수 없었다.
휴전은 한국인에게 통일도 가져다 주지 못한 채 죽음과 파괴만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회도 이승만을 지지해 주었다.
1953년 4월 9일 마지막으로 이승만은 휴전에 대한 정식 항의문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또다시 남침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도 좋지만,
공중 폭격, 야포 사격, 함포 사격의 지원만은 계속해줄 것을 요구했다.
1953년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양유찬 주미 대사를 통해 미국을 협박했다.
만일 이러한 한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으로부터 빼내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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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휴전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혈서.
깜짝 놀랄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을 협박
그러나 휴전의 방침을 굳힌 미국과 유엔은 강행할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 정부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휴전을 하려는 데 대해 분개했다.
특히 유엔 측이 북한이나 중공에 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反共捕虜)들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공산측의 요구에 양보한 데 대해 분개했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이 친공적인 중립국 대표들의 압력과 설득으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립국 가운데서도 특히 친공적이고 친소적인 인도의 군대가 모든 경비를 맡게 될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인천항에 도착한 인도군의 상륙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인도군은 미군의 헬티콥터를 이용해 판문점 지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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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이승만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석방한 반공포로들.
마침내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제 멋대로 반공포로 문제와 휴전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는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헌병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장군에게
비밀리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2시 전국의 여러 수용소에 나뉘어 있던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헌병들이 쏘는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60여명의 반공포로가 미군 경비병들의 총에 맞아 희생됐다.
그렇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무사히 탈출하여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이것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산군 측을 분노케함으로써 휴전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 참전국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가장 강력한 어조로 항의했다.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떨어 뜨린 것으로 알려진
영국 수상 처칠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극단적인 용어로 이승만을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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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거제도)
한미동맹을 맺어주면 휴전에 동의하겠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지 않고서는 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비교적 한국인들에게 동정적인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서울에 파견했다.
1953년 6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은 특사의 관행에는 어긋나게
3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이승만과 힘겨운 협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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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찾아온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 로버트슨.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 주는 조건으로 한미동맹(韓美同盟)의 체결을 요구했다.
경제 원조와 무기 지원도 요구했다.
휴전이 되어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과 동맹을 맺는 데 찬성할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회담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정 여론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자극적인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지금 한국인들의 반공투쟁(反共鬪爭)이
18세기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립투쟁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는 내용의 방송연설을 했다.
그 방송을 듣고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이승만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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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판문점)
한미동맹 결성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주 의회들도 있었다.
허스트 계통의 신문들을 비롯한 우파 성향의 신문들은 지지 논설을 실었다.
결국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는 휴전에 동의해 주었다.
그에 따라 유엔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공산측과 휴전협정서에 조인했다.
북한의 남침이 있은 지 3년 1개월 만이었다. <계속>
이주영 /뉴데일리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