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슨주의를 따른 이승만과 대한민국

    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따른 김일성과 북한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교수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바로 잡은 이승만
    20세기는 윌슨주의(Wilsonism)와 레닌주의(Leninism)의 경쟁의 역사였다.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 자결(自決)주의, 그리고 레닌이 주창한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두 거대사상의 대결이 20세기를 장식했고, 그 귀결은 윌슨적 가치의 승리였다. 1910년 미국 프린스턴(Princeton)대에서 한국에서 온 한 야심찬 젊은이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에게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동시에 윌슨의 정치적 이상도 전수받았다. 개화파의 막내로서 입헌(立憲)제를 주장하다가 모진 옥살이를 한 이승만이 유학생활에서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에 이어 한국인으론 첫 박사 학위(Ph.D.)를 받은 것이다.

    지난 10월 3일 윌슨의 이름을 딴 프린스턴대 우드로 윌슨 스쿨(Woodrow Wilson School, 공공정책대학원) 내에 이승만 홀이 명명(命名)됐다. 필자도 참석한 이 명명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마치 이승만이 스승이었던 윌슨의 품에 편안히 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필자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조직적인 ‘이승만 부정(否定)’ 교육을 온 몸으로 받은 세대다. 리영희의 책들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외우다시피 읽으며 이승만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물론 이승만은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과 고집이 강했고 정치적 술수에 능했다. 신익희·조병옥·이시영 등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함께 놓은 애국 인사들에게조차 권력을 나눠주는 것을 꺼렸다. 또한 너무 노년(73세)에 집권했고 거기에 장기집권 문제까지 겹쳐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이런 과오는 그의 빛나는 공적과 같이 공평하게 다뤄져야 한다. 집단농장화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나라를 파탄낸 모택동(毛澤東)에 대해 등소평(鄧小平)은 이렇게 평가했다. “공칠과삼(功七過三). 마오(毛)동지의 공이 7이라면 과오는 3이다.” 같은 기준으로 보면 이승만은 어떻게 평가돼야 할까? 아마도 ‘공구과일(功九過一)’이 아닐까. 필자는 이승만의 공과를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본다. 그러나 등소평의 기준으로 봤을 때 공구과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모택동보다는 훨씬 더 공이 많은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길고 고달팠던 독립운동 생활은 물론 의무교육 실시, 자유민주주의 노선, 한미방위조약 체결,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線) 선포 등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그의 공적을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란다. 그 중 농지개혁만 언급해보자. 대부분 국사교과서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였기에 성공적이었고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유상분배였기에 불완전했다”는 식의 오류를 앵무새처럼 되뇐다. 그렇게 북(北)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었다면 왜 북한의 농업은 엉망이고 농민들은 국가농노(農奴)와 같은 존재인가? 북한은 무상분배를 한 적이 없다.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줬을 뿐이고, 그마저도 나중에 집단농장화했다. 소유권 없는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 남쪽에서는 지주가 사라지고 자영농이 자라났다. 우리 주위에서 지주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여러 경로를 통해 근대적 산업자본이 형성됐다. 반면 필리핀은 농지개혁과 근대화·산업화에 실패해 아직도 15대 지주가문이 국부(國富)의 50%를 차지한다. 대통령도 배출한 아키노와 코후앙코 가문이 대표적이다. 1961년 우리보다 일인당국민소득이 세배였던 필리핀 업체의 시공으로 세워졌던 구(舊)문광부 자리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내달 11월 22일 개관한다. 지금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우리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역사의 반전(反轉)이 아닌가.

    이승만은 결국 자기 성공의 제물이었다. 그가 자신이 세운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통치를 했을 때 교육받은 국민들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경제발전으로 먹고 살게 되고 시민으로 성장한 국민이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더는 못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승만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선각자(先覺者)였고, 윌슨의 이상을 따라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옳은 방향으로 잡고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대결한 지도자였다. 역사는 결국 윌슨·이승만 노선이 맑스·레닌·스탈린·모택동·김일성 노선보다 옳았음을 증명했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죽이기’ 교육은 “1948년 체제”를 부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919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을 갈라놓으려는 시도도 많았다. 일부 몰지각한 국사학자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통합된 과정의 산물이었다. 1919년은 정신적 건국이자 대한민국이 수태된 날이었고, 그 이후는 고통을 수반한 임신의 기간이었으며, 1948년은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란 갓난아이가 탄생한 실질적 건국의 해였다. 그 중심부에 이승만이 있었으니 그는 임정(臨政)과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었다. 이렇게 난산(難産) 끝에 태어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소중히 성장해간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나 그들과 야합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주도하려 나서는 작금의 상황이 한심할 뿐이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