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는 지난 140여 년 동안 문화적으로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서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으로 옮겨 가는 큰 전환의 시기를 보냈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 '자유'와 '번영'이라는 미완성의 과실을 먹고 있다.

    그간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한 포럼에서는 비록 미완성이지만 과실이 열리는 나무를 심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지난 13일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제19회 '이승만포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 나무에 정성을 다해 물은 줘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끈 인재들 중 한 사람을 선정해 포럼을 이어갔다.

  •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3명(김창규, 김태자, 홍광엽)과 그의 가족들.ⓒ윤희성 기자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3명(김창규, 김태자, 홍광엽)과 그의 가족들.ⓒ윤희성 기자

    [뉴데일리]가 선정한 주인공은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故 김정렬 장군.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 대통령과는 무려 42살의 나이차. 이승만 대통령이 제시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이어 받은 젊은 인재로 성장해 김 장군은 타계하던 1992년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고인이 된 김정렬 장군을 대신해 세 명의 발표자가 나섰다. 먼저 김 장군의 큰 딸인 김태자 여사가 발표자로 먼저 나섰다. 

    김 여사의 발표에 이어 제5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창규 장군이 김정렬 장군과 같이 공군을 창설하던 시절을 증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광엽 한림대 정외과 명예교수가 앞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했다.    

  •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김태자 故 김정렬 장군의 장녀. ⓒ윤희성 기자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김태자 故 김정렬 장군의 장녀. ⓒ윤희성 기자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회고록 '항공의 경종'

    김 여사는 아버지 김정렬 장군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회고록('항공의 경종', 대희출판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김정렬 장군에 대해 50분간 발표했다. 

    회고록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장군. 그는 자신의 손으로 1960년대까지의 일들을 정리했다. 그 후 기업인으로 또 국무총리로 활약했던 내용들에 대해서는 후배들이 김 장군이 남긴 논문, 연설문, 담화문, 서한 등을 연대별로 정리해 책을 완성했다.

    회고록을 바탕으로 김태자 여사의 발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김태자 故 김정렬 장군의 장녀. ⓒ윤희성 기자


    1917년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김절렬 장군은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비행 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광복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했고 1949년 한국 공군의 초대 참모총장이 됐다.

    그 뒤 1957년 공군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장, 군사정전회담한국군연락장교단장, 주한(駐韓)유엔군사령부 한국군사사절 단장,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공군에서 예편한 직후인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혁명으로 1960년에 물러났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정권에 의해 다시 발탁돼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 의장이 됐다.

    1963년 주미(駐美) 대사로 임명돼 약 1년간 재직했고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1971년부터 삼성물산(三星物産) 사장, 경제동우회(經濟同友會) 회장,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부회장, 정우개발(正友開發)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경제인으로 활동하다 1980년대 국정자문위원으로 공직에 복직했고 1987년부터 1988년 초까지 국무총리직을 맡은 바 있다.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수교훈장광화장과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1991년부터 회고록을 집필했고 자신의 회고록을 완성하지 못하고 1992년 10월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김태자 故 김정렬 장군의 장녀. ⓒ윤희성 기자

    김창규 장군, "선배 김정렬은..."

    1920년 태어난 김창규 장군은 1938년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김창규 장군은 1947년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면서 당시 공군의 간부였던 김정렬 장군과 인연을 맺었다.

    김창규 장군은 1952년 미국 공군 참모대를 졸업했고 1954년 대한민국 공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9년 김정렬 장군이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할 당시 김창규 장군은 공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매진했었다.

    "당시 김정렬 장군은 저에게 군의 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5개년,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군이 창설됐는데 그 유지를 위해서는 군인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군사관학교 설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유능한 인재를 확보하고 인력으로 교육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마련한 김창규 장군은 김정렬 장군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참모총장으로 있던 김정렬 장군은 체계가 없는 군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참모총장 임기제였다. 당시 참모총장의 임기는 없었고 김정렬 장군은 계속해서 가장 높은 지위를 영위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사직원서를 첨부해 대통령에게 임기제를 건의했다. 스스로의 권력에 칼을 대는 모습에 진정한 군인을 발견했었다."  

  •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홍관엽 교수. ⓒ윤희성 기자
    ▲ 제19회 뉴데일리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홍관엽 교수. ⓒ윤희성 기자

    "정치에는 양면성이 있다"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홍광엽 한림대 정외과 명예교수는 앞서 발표한 두 발표자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의 요지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방향을 제시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인재들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왜곡됐다고 말했다.

    "정치학은 전쟁과 평화, 과거와 미래, 이론과 실천, 생과 사, 남과 녀를 동시에 바라보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어둠에 묻혀 있는 문제에 관심과 배려를 두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과거 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정치를 한 쪽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는 듯 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주권국가의 태동기에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자신의 지혜와 경륜을 동원해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던 뛰어난 지도자였다. 김정렬 장군도 한국전쟁 1년 전 1949년에 위기를 예감하고 공군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 일에 착수했었다."

    "단지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이 평화의 세상이 온 것 처럼 생각했던 당시 시민사회 지도자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단합하기보다는 '타인의 죄와 자신의 선행'만 따지며 분열을 조장했다."

    "녹녹치 않는 국제정세와 강대국들의 이익을 이해하고 견제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힘이 있는 왕이 아닌 국민의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고 헌법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민족 통합을 내세웠다."

    "그리고 김정렬 장군을 비롯한 당시 인재들은 비록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자신이 배운 지혜를 활용하며 큰 공헌을 했다."

    "그런데 현재 이승만을 단순히 독재자로 평가하고 건국에 공헌한 김정렬 장군과 같은 인재들은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고민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