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화포커스 제100호>
    北 군복무 10년 간 내가 배운 도둑질

    김 성 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10년 전, 탈북자로서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등을 돌아보던 때 한 가지 생각이 늘 머리에 맴돌았다. 주인이 있어 보이면서도 없어 보이는 듯한 시장통의 물건들... 누가 집어가도 모를 그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대한민국엔 도둑이 없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북한 땅엔 도둑이 꽤 많다. 물론 처음부터 도둑으로 타고난 인생은 없다. 삶이 각박해지고 살아가기가 점점 어려워지던 시절엔 이름하여 ‘생계형 도둑’이 북한 전역에 판을 치고 있었다. 특히 군인들의 도둑질이 극심했다.

    ● 담력을 키우기 위한 도둑질

      평양에서 태어나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 되던 해, 군인이 된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훔치는 것이 일상이었고 도둑질은 삶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었다.

      6개월 간 신입병사 훈련을 마치고 본대로 배치 받았던 1978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하루 훈련을 마치고 나니 피곤이 엄습했다. ‘취침’ 구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곯아떨어진 나를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부분대장 명석이었다. “부분대장동지...” 잠결에 헛소리처럼 되뇌고 있는데,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부분대장의 두툼한 손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부분대장을 따라 병실(내무반) 밖을 나섰다. 그는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마대자루 몇 개를 나에게 걸머지웠다. 이어 우리는 중대 부업용 달구지를 끌고 인접마을 과수원으로 갔다. 달 밝은 밤이어서 과수원 전체가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 먼발치에 경비막이 빤히 바라보였다.

      ‘사과는 모두 수확한 상태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야심한 밤에 과수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부분대장이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속삭였다.

      “빨리 퍼 담으라”
      “?”

      그러고 보니 발치에 뒹구는 고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농민들이 사과나무 사이에 심어 놓은 고구마들을 캐 놓고 미처 창고에 넣지 못한 듯 했다. 부분대장은 그 고구마들을 나에게 담으라는 것이었다.

      “이건?!”
      “이 XX 뭘 꾸물거려. 빨리 퍼 담지 않고!”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부분대장은 눈을 부라렸고 나는 엉겁결에 고구마를 마대에 퍼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 시간 정도를 정신 없이 담다 보니 어느덧 동편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가자!”

      그렇게 부분대장과 나는 밤새도록 도둑질 한 고구마 여덟 마대를 달구지에 싣고 부대로 돌아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진행된 ‘야간 행동’이지만 나는 이것이 인민들의 재산에 손을 댄 도둑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이 사실이 드러나면 중대장이나 정치지도원으로부터 추궁은 물론,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사안이라는 사실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생활을 전혀 몰랐던 신병의 공연한 기우였다. 부분대장과 나는 이튿날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대장의 배려 섞인 지시를 받고 하루 종일 낮잠을 자는 것은 물론, 며칠 후 중대장 사모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 대접까지 받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부분대장 명석이 나의 등을 툭 치며 이야기 했다.

      “그 고구마 중대 군관들 집에 나누어 주었어. 두 마대 씩. 그리고 그거 담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쯤으로 생각해 두라고. 딴 데 가서 절대 말하지 말고. 알았지?”

    도둑질에는 다 이유가 있다

      3년차가 되면 제법 구대원(고참) 소리도 들을 만한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10년 정도 군복무를 해야 하는 북한군의 실정상 3년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군복무 3년차였던 어느 날, 곤히 잠든 나를 또 다시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이번에는 분대장 형석이었다.

      “분대장 동지?”
      “조용히 나를 따라 와. 아무 소리 말고.”

      분대장은 나를 데리고 부대 인접 마을의 목공소로 갔다. 목공소에 다다른 분대장 형석은 아무 말 없이 가지고 갔던 빠루(못을 뽑을 때 쓰는 도구)로 목공소 뒤쪽의 조그만 뙤창문(쪽창문)을 뜯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창문을 넘어 들어가 안에 있는 목수 도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예? 목수도구를요?”
      “야가 이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가져오라면 가져 올 것이지.”

      결국 그날 저녁 리(북한 농촌마을의 말단 단위)목공소의 목수도구 일체를 도둑질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나는 단숨에 ‘구대원 소리(고참 대접)’를 듣게 되었고 분대장의 신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재산을 훔쳤다”는 죄책감으로 찜찜해 하고 있는 나에게 분대장이 불쑥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그 목수반장 새끼 말이야. 내가 며칠 전에 대패 좀 빌려달라니까 다짜고짜 안 된다는 거야. 군대가 빌려 가면 대패날이 싹 다 버린다나. 그런 새끼들에겐 인민군대의 본때를 보여주어야 된단 말이야. 내 말 틀려?”

    보충형 도둑질

      6년차. 나도 부분대장이 되어 제법 대원들을 거느린 하사관이 되었다. 대원 일곱 명을 거느린 부분대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발생했다.

      토요행군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기재 점검을 하는데 분대의 막내 허철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야, 문제 있어?”라고 묻는 나에게 허철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분대장 동지, 제 무기 소제대가 없어졌습니다. 행군하다가 어디서 흘린 것 같은데”
      “뭐야!?”

      한바탕 욕설을 퍼 부은 나는 허철이를 포함한 대원 세 명과 함께 방금 걸었던 행군 노정을 되짚어 갔다. 행군이 주로 평지에서 진행되고 한 5리 정도 과수원 길을 지나쳤으니까 소제대는 아마 과수원 어느 나뭇가지에 걸려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하지만 허철이가 잃어버린 무기 소제대는 과수원 길을 포함한 행군 길 전 노정을 훑고 또 훑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새벽녘 중대로 돌아오는 길에 허철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충해!”

      허철이는 다른 분대에서 소제대를 훔쳤다. 그 뒤 허철이가 훔친 소제대는 분대와 분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전 중대에 도둑놈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형형색색의 도둑질

      사병 생활 10년 간 안 해본 도둑질이 없을 정도다. 해마다 농촌지원에 나가서 군인들이 해 먹는 콩청대... 이는 ‘공개형’ 도둑질에 해당한다.

      어느해 가을 ‘도토리 작업’(식량대용으로 도토리를 따는 작업) 때엔 개인별 과제가 너무 부담돼(1인당 하루 30kg의 도토리를 따오라는 명령) 중대 전원이 학생들이 따온 도토리를 훔쳤던 ‘집단형’ 도둑질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또 한 번은 우리 소대가 독립임무를 받고 황해도 룡연군에 있는 인민무력부 후방총국(대한민국의 군수사령부에 해당) 소속 감나무 밭을 지키러 간 적이 있다. 10만 정보나 되는 감나무 밭의 귤과 감 모두 ‘우리 것’이 되고 말았다. 소대장은 소대장대로 대원들을 시켜 감나무 밭을 작살냈고 어린 전사들조차 제 몫을 챙기고자 감나무를 흔들어 댔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었으니 이런 경우는 ‘파렴치형’에 해당된다.

      노동당 입당과 상급학교 진학, 승진을 위한 도둑질도 있다. ‘입당형’ 도둑질은 주로 중대 정치지도원의 부인이 타깃이 된다. 농장탈곡장이나 개인집에서 옥수수나 쌀을 훔쳐 가져다 바치는 경우다. 상급학교(제대 후 대학 추천을 뜻함) 진학을 위한 ‘진학형’ 도둑질에는 주로 민간인들의 돼지가 희생양이 된다. 군관들이 주로 이용하는 ‘승진형’ 도둑질은 그 비중에 따라 소대와 중대, 대대 전체가 동원되어 제법 통 큰 작전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손쉽게 남의 물건을 훔쳐보았고, 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의 ‘도둑놈’ 과거는 탈북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의 새 삶은 잃었던 나의 인간성을 조용히 되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