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대홍단군에 홍단이가 많은 이유

    ‘대홍단에 가서 홍단이 찾기’

    신준식 기자 /뉴포커스

    북한의 젊은 선남선녀들은 결혼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김일성 결혼적령기 교시'에 따라 이어온 것으로 김일성 사망 이후인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관습이다.

     특히 김정일의 감자농사 방침 때문에 대홍단군으로 천 몇 백 명이 지원을 했을 때에도 장가문제는 반드시 일꾼들이 챙겨야 한다고 김정일이 직접 지도까지 했을 정도니, 공화국에서 결혼에 대한 관심사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  이 같은 김정일의 관심 덕에 처녀들의 ‘현실 체험단’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이어 중매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평양 방직공장 처녀들이 이러한 성화에 못이겨 대홍단군으로 지원을 가자 대대적인 환송행사와 더불어 중앙방송에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후에 이 사건은 공산주의 미풍으로 추켜 세워지기도 했다.

     대홍단군 지원 덕분에 ‘모두다 시집가기 전투에로’라는 구호가 생겼고, 전 군중적 운동으로 ‘맞선 작전’이 진행됐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맞선 작전은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대홍단군에 많은 신혼부부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기 갖기 전투’라는 새로운 구호가 생겨나기도 했다.

     당시 대홍단군에 살던 민원식과 박금혜 부부는 당으로부터 사전에 기획된 연출대로 김정일의 군 단위 현지지도 시 ‘아기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예정대로 대홍단군을 지나갔고, 작명을 부탁한 부부에게 “아들을 낳으면 대홍이, 딸을 낳으면 홍단이로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전파를 탔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위대한 전설로 미화되었다.

     한편,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홍단이란 이름을 가진 첫 아이가 2002년 10월 10일에 태어났고, 성만 다를 뿐 같은 마을에 수많은 홍단이가 생겨났다. 이 후 새로운 조선말에도 “대홍단에 가서 홍단이 찾기”라는 속담이 새로 생겨날 정도였는데 이 말은 현재까지도 북한에서는 '쉽고도 어려운 일'을 두고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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