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한국의 정치와 언론은 아직 조선(朝鮮)이다 
      
    한국 언론(言論)의 생리: 좌파(左派) 600년, 우파(右派) 60년

    趙甲濟    
     
     1. 한국 언론의 역사적 전통: 21세기 한국 언론은 아직 조선(朝鮮)이다.  

  • 가. 조선조의 언론:

    언론이 정치를 움직였다. 삼사(三司)와 이조전랑(吏曹銓郞)과 사림(士林)이 언론과 여론을 주도, 정치를 이끌었다. 조선조의 정치구조와 언론의 생리는 오늘의 한국과 비슷하다.

    선조(宣祖) 이후의 지배 관료층을 배출한 사림(士林)은 조선조 개국(開國)을 반대한 유학자들의 제자들이었다. 생래적으로 반(反)체제적이고 명분론이 강했으며 저항적이었다. 조선조에 살면서 조선조 개국(開國)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대한민국에 살면서 건국(建國)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심리는 반드시 위선(僞善)과 자해(自害)로 흐른다. 조선조의 엘리트들은 성리학(性理學) 즉 주자학(朱子學)을 교조적으로 섬겼다. 한국의 정치인과 언론인은 민주주의를 교조화한다. 조선 당쟁(黨爭)의 주(主)무기는 주자학적 명분론이고, 삼사(三司)와 이조전랑(吏曹銓郞)이 조성한 언론과 탄핵이었다. 이들은 실용정신, 상무(尙武)정신, 자주(自主)정신과는 담을 쌓은 집단이었다.

    한국의 언론은 지금도 정치의 주제(主題)를 설정하는 힘이 있고, 폭로를 주(主)무기로 삼으며, 보도경향은 반(反)국가, 반(反)기업, 반(反)실용적, 반군적(反軍的), 도덕주의의 성향을 보인다.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언론이지만 가치관과 행태는 조선적, 즉 수구적(守舊的)이다.

    조선조의 사림(士林)은 한국의 재야(在野)운동권에 비유된다. 조선조의 정치구조와 한국의 정치구조가 흡사하다. 이런 조선조적 전통-명분론, 위선, 반체제성, 군사-경제-과학에 대한 무지(無知), 사대성, 교조성은 전근대적이고 좌경이념과 통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조는 좌경적 정권으로서 그 전통이 600년에 걸치고, 대한민국 건국(建國) 이후 비로소 자유와 경쟁 등 우파적 가치관이 힘을 얻게 된다. 우파 60년, 좌파 600년인 셈이다. 북한정권은 조선조의 후예이다. 
     

    나. 개화기(開化期)의 언론:

    근대적 신문의 등장으로 조선조적 언론의 전통을 탈피,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이바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개화운동을 주도한 서재필, 이승만 등은 언론 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을 중시(重視)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은 최초의 일간신문 사장이었고 유명한 논설가였다. 
     

    다. 식민지 시대:

    국민계몽과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저항적, 지사적(志士的) 언론인이 많았다. 조선, 동아일보는 나라 잃은 민족에겐 일종의 재야(在野)정부였고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였다. 
     
    라. 대한민국 建國 이후:

    언론은 민주화 시대를 맞아 정보의 전달, 여론(輿論)의 형성이란 고유한 역할을 함에 있어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정치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4.19, 10.26, 2.12 총선, 6.29 선언 등 정치적 격변기(激變期), 언론의 역할은 다른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조선조적 명분론 정치가 부활하면서 군 엘리트가 퇴조(退潮)하고 현대판 삼사(三司)와 사림(士林)이 정치를 견인하는 형국이다. 사헌부(司憲府)=검찰, 사간원(司諫院)=언론, 홍문관(弘文館)=대학, 사림(士林)=운동권. 조선조의 사농공상(士農工商) 류의 현상도 보인다. 현대판 사(士)는 검찰, 정치인, 기자, 교수 등인데, 이들이 기업인 군인 과학자들(工商)을 누른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조선조적 가치관에 반감(反感)을 가졌던 혁명가인데, 이 두 지도자는 군인, 기업인, 과학자, 기술자를 우대, 민족사에서 이들이 처음으로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도록 도왔다. 조선의 언론을 지배한 주자학적 명분론은 대한민국 건국9建國) 이후엔 민주주의적 명분론으로 대체(代替)되었다. 이런 명분론은 민족과 민주를 국가와 국익(國益)보다 우선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앞세운 공산당 선동에 먹힐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인 통치 30년은 한민족(韓民族) 정치풍토에서는 예외적인 시기로서 경제, 군사, 과학, 기술을 중시(重視)하는 실용의 시대였다. 민주화는 그런 예외의 시대가 끝나고 통상적인 시대, 즉 文民優位(문민우위)의 명분론 정치로 복귀하는 것=정상화되는 것을 뜻했다. 
     

    마.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가 문민화,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과거 조선조의 명분론적 朋黨(붕당) 정치 행태로 돌아가는 증상을 보임과 더불어 언론은 좌경화 된다. 북한정권의 끈질긴 對南(대남)공작이 만들어낸 從北(종북) 주사파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좌경화한 언론은 이런 세력을 진보-민주-개혁세력으로 미화, 이들을 키워주는 울타리가 되었다. 
     

     2. 대중민주주의 및 정보화 시대의 언론환경
     
    가. 양적(量的) 팽창과 영향력 증대:

    신문-라디오-텔레비전-인터넷-SNS 등 언론의 다양화로 사람이 언론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국민들의 매일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187분, 인터넷 98분, 라디오 71분으로서 하루에 거의 여섯 시간 노출된다. 신문 방송사는 700개를 넘고, 연간 매출액은 약20조원, 언론종사자는 약5만, 기자는 2만 명을 넘는다. 정치, 경제, 문화, 안보 등 거의 모든 국정(國政) 분야에서 언론과 홍보는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선거는 조직보다 선전이 더 중요해지고 국가정책은 홍보에 실패하면 진척될 수가 없다. 
     

    나. 全국민의 언론 참여:

    인터넷의 등장으로 대중도 글쓰기를 통하여 언론활동을 하고 여론(輿論)을 직접적으로 형성한다. 공론(公論)의 장(場)이 넓어진 반면에 글과 말의 질이 떨어지고 선동성이 강해지고 있다. 한자(漢字)말살-한글전용(專用)에 의한 한국어(韓國語)의 암호화 현상이 이런 저질화를 부추긴다. 
     

    다. 언론의 윤리 약화:

    이념적 좌편향, 상업주의, 선동성, 당파성이 언론의 원칙인 객관성과 공정성을 약화시킨다. 
     

    3. 한국 언론의 문제들
     
    가. 언론이 부추긴 종북(從北)득세와 한자(漢字)말살의 동시(同時)진행이 국민의 분별력을 약화시켜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나. 언론의 원칙이 붕괴되고 있다. 좌경화와 한국어 파괴가 동시에 진행되어 문법(文法)의 원칙, 헌법(憲法)의 원칙, 사실중시(重視)의 원칙, 공정성(公正性)의 원칙, 공공성(公共性)의 원칙, 객관성의 원칙 등이 무너지고 있다. 영향력이 큰 방송과 인터넷 포털의 일탈이 가장 심하다.

    다. 조선조의 사림(士林)처럼 언론종사자들이 반(反)체제적이고 저항적이며 경제-군사-과학 분야에 취약하다. 정치와 언론이 상호 경쟁적으로 위선적 도덕주의를 심화시킨다.

    라. 문법에 맞지 않는 기사가 너무 많다. 논평과 사실보도가 구분되지 않고, 적확(的確)한 단어 선택보다는 선동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데스크의 기사 교정 기능이 약화되었다. 한자를 쓰지 않아 한국어 발음이 엉망이 되었다. 단음화(短音化)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마. 일부 언론종사자들도 좌경화되어 계급적-반군적(反軍的)-반국가적(反國家的)-반법치적(反法治的)-反자본주의적 성향의 기사를 많이 쓴다. 좌파, 저변층, 북한, 지식인에 동정적이고 국가, 기업, 군대, 미국에 부정적이다. 기자의 약37%가 30대, 40대는 36%이다.

    바. 국민교양의 지표가 될 만한, 미국의 뉴욕타임스, 일본의 아사히,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프랑스의 르몽드 같은 고급 신문이 없어졌다. 신문이 국민교양을 함양하는 역할을 포기하였다. “좋은 신문이 없으면 좋은 정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사. 이념대결 시대를 맞아 기자사회에서도 당파성이 강해지면서 특종과 심층취재를 중시(重視)하는 기자정신이 약화되었다. ‘사실이 신념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아. 좌익세력의 선전매체가 언론 행세를 한다.

    자. 3대 공중파 방송의 편향성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탄핵 사태와 광우병 난동 사태 때 3대 방송은 사실상 좌파의 선동기관 역할을 하였다.

    차. 방송의 반(反)언론적-反법치적 보도에 대한 사회의 견제력이 약하다.
     


     4. 대책 내지는 해결책
     
    가. 국민 교양의 강화: 분별력 있는 시청자와 독자들이 좋은 언론을 만든다. 까다로운 소비자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나. 한국어(韓國語) 정상화: 한자(漢字)-한글혼용, 국어(國語)-국사(國史) 교육 강화 등

    다. 선동언론과 기자들에 대한 제재와 견제 강화

    라. 기자 재교육의 강화

    마. 4.11 총선 이후 희망이 보인다. 언론은 여론(輿論)을 만들고, 여론은 언론(言論)을 만든다. 
     


     5. 언론의 정치적 선동 사례 
     
    가. 2003년 김현희 가짜 몰기와 3大 방송

    나. 2004년 탄핵 사태 때의 3大 방송

    다. 2008년 광우병 난동(亂動) 사태와 MBC

    라. 2010년 천안함 폭침과 한겨례 등 좌파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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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黨爭의 흐름
     安保문제는 주제가 된 적이 없다.
     
    趙甲濟
     
      李重煥이 쓴 「擇里志」란 책에는 조선왕조의 정치가 어떤 운용原理를 갖고 있었느냐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나라가 삼공육경(三公六卿)을 두고 있지만 언론과 輿論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지도자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서 체면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법규를 두고 오로지 논의로써 政事를 삼고 있다.
     
      그리하여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三公에게 시키지 아니하고 오로지 이조(吏曹)에 귀속시켰으며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질까 염려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관리의 임명과 해임권은 이조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오로지 郎官에게 맡긴 까닭으로 이조의 정랑, 좌랑이 또한 언론과 감찰의 권능을 주장하였다. 삼공, 육경이 벼슬은 비록 높고 크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떳떳치 못한 일이 생기면 전랑(銓郞·정랑과 좌랑을 가리킴)이 문득 三司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고관들을 논박하게 하였다.
     
      조정의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名節(명분과 절의)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한번 탄핵을 받으면 부득불 벼슬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전랑의 권한이 바로 三公에 겨눌 만하였으니 이것이 대관과 소관이 서로 유지하고 上職과 下職이 서로 견제하여 삼백년 동안 大權奸, 즉 대신으로서 정권을 죄지우지한 이가 없고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제어하기 어려웠던 근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는 조선개국을 할 때 고려시대의 君主가 弱하고 臣下가 强했던 폐단을 거울삼아서 보이지 않게 그것을 막으려는 장치를 숨겨둔 것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三司 가운데서 이름과 덕이 있는 자로서 엄밀하게 뽑아서 銓郞으로 삼게 하되 또한 스스로 후임자를 천거하게 하며 이조판서에게 귀속되지 않게 하였으니 인사권을 중하게 여겨 하나같이 公論에 붙이고자 함이었다. 한번 전랑을 지내면 참으로 다른 잘못이 없는 한 또한 쉽게 영의정, 우의정, 또는 판서 등 公卿에 오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명예와 利益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연소한 新進이면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吏曹銓朗(이조전랑)이란 자리가 조선조의 정부에선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조는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관료들의 임명권을 이조, 즉 총무처 같은 부서에 맡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조의 힘이 또 너무 세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장급인 吏曹銓郞에게 전담하게 하여 상부를 견제하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사헌부는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검찰과 감사원이고 司諫院은 관리들의 잘 잘못을 공론화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언론일 것이고 弘文館은 서울대학의 교수나 학자로 비견될 수 있습니다. 신진기예의 패기 있는 선비들이 맡게 되는 이조전랑의 직위는 비록 정오품(정랑)아니면 정육품(좌랑)의 높지 않은 직급이었지만 이 6명은 언론과 검찰, 그리고 명분의 기능을 장악한 삼사를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장관급인 판서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도 만만하게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전랑은 후임 전랑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 요직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권력의 장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당파싸움도 吏曹銓郞의 쟁탈전이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조전랑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출신이므로 남을 비판하고 잡아넣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재상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이 三司를 동원하여 규탄하고 조사할 수도 있어 상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면 중앙정치를 언론과 검찰 및 감사 기능을 장악한 銓郞이 독단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전국에는 여러 학파로 형성된 선비집단이 고을의 서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갈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퇴계 이황파, 남명 조식파, 율곡 이이파 식으로 이런 집단은 고매한 주자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어 있어 학설에 따른 인맥편성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실은 地緣, 學緣, 血緣이 중첩된 인맥구조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끈끈한 집단을 형성하여 과거제를 통해서 서울에 人材를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을 하는가 하면 서울에 진출한 자기들 人脈을 통해서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서원에서 전국에 돌리는 통문이란 것은 요사이로 말한다면 시국선언문 같은 것인데 이것은 山林이라고 불리던 在野 선비사회에서 여론이 되어 이것이 중앙의 성균관을 통하거나 직명상소나 복각 상소의 형태로 조정에 알려지고 때에 따라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조정에 참여한 고관들도 존경받는 대학자들을 監主라 하여 높이 받들어 모심으로써 지방 재야 지식인 사회가 제도적으로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조의 정치에 主役으로 등장했던 세력은 전제권을 가진 왕을 비롯하여 행정권을 쥔 의정부, 언론과 검찰 기능을 쥔 三司, 그리고 이 삼사를 통제하여 최상층부를 견제하는 이조전랑을 필두로 하는 젊은 세력, 그리고 중앙을 견제하고 조종하기도 하는 지방의 서원중심 선비집단으로 다양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과 감시기능, 상하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이런 상호견제 때문에 조선조에서는 고려무신정권 때의 최충헌과 같은 실력자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조가 이런 상호 감시 견제 장치를 제도화한 것은 고려 때 王權이 쇠퇴해지고 신하들이 강력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신하들끼리의 견제를 강화함으로써 王權을 강화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요사이 용어로 말씀 드리자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어용언론과 정보, 감사, 검찰 기능을 강화하고 관료집단이나 정당의 권한을 약화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런 조선조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신하도, 강력한 왕도 없는 말하자면 君弱臣弱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라는 부강하지 못하고 군대는 힘이 없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권력을 여러 관료집단 사이에 분산시켜놓으니 끝없는 당파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당파싸움은 영원한 勝者도 영원한 敗者도 없는 그런 지리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예로 현종과 숙종 때의 당쟁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慈懿大妃(자의대비)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喪服을 1년간 입어야 하느냐, 2년간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조정에서 대두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절에 대한 서적을 참고로 하여 이런 문제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책에도 大妃의 상복에 대한 언급은 없었답니다.
     
      그래서 영의정 정대화 등 원로대신이 의논하여 자의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잠정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도 1년상에 동의했습니다. 원래 효종은 차남이었다가 형이 죽는 바람에 세자가 되어 왕이 된 경우이므로 어머니 자의대비는 차남이 죽을 때 하는 식으로 1년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西人들과 늘 대립하던 南人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남인의 윤선도는 서인들이 1년상을 주장하는 것은 죽은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효종의 형 소현세자의 아들을 정통으로 삼으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1년상이냐, 2년상이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장례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향방이 걸린 정치사건이 됩니다.
     
      이 논쟁에서 1년상을 주장한 西人들이 이겨 2년상을 주장했던 南人들은 실각당하고맙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싸움의 한 특징은 상복 논쟁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시킨 다음에 死生결단하고 싸운다는 점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당쟁도 있고 권력투쟁도 있습니다만 그런 싸움의 주제가 우리나라와는 다른 것입니다.
     
      효종의 죽음 직후에 있었던 상복 논쟁, 그 14년 후 효종의 왕비 장씨가 죽자 이번에도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씨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장씨를 큰 며느리로 대우하여 1년간 상복을 입을 것인가, 9개월간 입을 것인가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이 영수로 있던 서인은 전처럼 효종의 왕비를 작은 며느리로 대우하여 자의대비가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들은 1년을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는 현종이 14년 전의 논리를 바꾸어 南人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숙청되고 남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상복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쟁으로 끝나야 마땅한데 정치적 숙청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주자학은 무슨 철학도 종교도 학설도 아닌 권력투쟁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道學정치, 즉 도덕정치를 내세운 주자학이 현실에서는 도덕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유발한 것은 주자학의 논리나 학설들이 실천논리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남을 함정에 빠뜨리고 제거하는 무기로 악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집권자가 오늘은 역적으로 몰리어 죽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은 권좌에 오르게 되는 일의 일상적인 반복이 바로 조선조 당쟁이었습니다.
      조선조의 당쟁이나 권력투쟁에 불을 당기고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이조전랑과 三司, 즉 오늘의 언론과 비슷한 기능을 가졌던 사간원, 오늘의 검찰 감사 기능과 비슷한 사헌부, 오늘의 대학사회와 비슷한 기능을 가졌던 홍문관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의 약점을 확대하고 폭로하고 근사한 규탄의 명분을 만들고 하는 데는 천재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승진하여 우의정도 하고 영의정도 하니 그런 이들의 국가운영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론이나 감찰기능이 국가에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보조적인 기능이어야 합니다. 국가의 주된 기능은 역시 국방, 외교, 행정, 경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조에서는 이런 기능보다도 언론이나 감찰기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정치가 남을 비판하고 잡아넣고 모함하고 선동하는 비생산적이고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치와 司正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언론이고 검찰이고 지식인들(교수 및 소위 시민단체)입니다. 옛날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사람들처럼 남의 약점을 캐고 들추고 따지고 가리는 데는 선수들이지만 나라를 건설하고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상대방을 관용하는 자세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조선조 당쟁과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쟁 사이엔 중대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당쟁이나 정쟁의 중요한 주제는 과거 들추기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해석을 달리하여 과거에 자신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보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니 항상 정치의 주제는 미래나 현실이 아니고 과거가 됩니다. 이런 과거지향적인 정치판에서는 나라를 건설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발상이 도대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김영삼 정권 때 있었던 소위 역사바로세우기나 사정, 개혁,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은 모두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명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이루어진 司正도 소위 북풍사건이니, 환란사건이니, 또는 휴전선 총격요청설이니 하여 모두 과거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조선조 당쟁의 또 다른 공식은 政敵을 모함할 때 동원하는 죄목이 거의가 역모였다는 점입니다. 역모라고 해야 왕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모함에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고 역모죄로 걸어야 상대방을 철저하게 말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모설에 대해서는 진실을 가리는 조사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쪽에서 정치적 목적을 설정해놓고 고문을 하여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데 증거주의나 법치는 아예 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런 당쟁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등극했을 때는 남인들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숙종6년 남인의 영수 허적이 조부의 시호, 즉 죽은 뒤에 공덕을 기리는 이름을 맞아들이는 잔치를 벌이는 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 즉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을 빌어주도록 시킵니다. 그런데 이 천막이 이미 허적에게 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가 안새는 천막은 군수물자로서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해서는 안되는데 허적은 자신의 권력을 과신한 나머지 이를 남용했다가 숙종의 노여움과 경계심을 촉발하게 됩니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하여 南人들을 대거 숙청하여 귀양보내고 死刑에 처한 다음 西人들을 중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경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경신환국이라고 합니다. 환국이란 왕이 직접 나서서 정계개편을 했다는 뜻입니다.
     
      경신환국 9년 뒤 숙종은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는데 西人계열의 노론측 대신들이 반대합니다. 화가 난 王은 老論의 거두인, 여든살이 넘은 송시열을 유배보낸 뒤 죽이는 등 노론 사람들을 대거 숙청하고 남인들을 등용합니다. 1689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부릅니다.
     
      다시 그 5년 뒤 이번엔 갑술환국이 일어나는데 숙종이 중전이 된 장희빈에게 정이 약해지면서 장희빈과 내통하고 있던 南人들을 숙청하고 다시 서인측의 노론과 소론사람들을 등용한 것입니다. 그 7년 뒤인 1701년 이번에는 강등된 장희빈을 죽이려고 하는 숙종에 대하여 반대론을 편 서인측 소론이 숙청되고 왕을 편든 같은 서인측인 노론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서인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희빈의 아들이 숙종이 죽고나서 왕이 되는데 이가 경종입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측에서는 王의 건강을 문제삼아 왕의 동생인 연잉군, 즉 뒤에 영조가 되는 사람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하고 세자로 하여금 왕을 대리하여 政事를 보도록 하라고 왕을 압박합니다.
     
      이 틈을 타서 그 동안 政界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소론이 음모를 꾸밉니다. 소론은 왕의 편을 드는 것처럼 하면서 세자에 의한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노론의 4대신이 실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노론들을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1722년 남인출신 목호룡이란 사람이 이번엔 노론측 4대신의 아들, 조카들이 과거에 경종을 시해할려고 공모했다는 고발을 해 왔습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어 노론들을 상대로 한 일대 수사선풍이 불게 됩니다. 귀양갔던 노론 4대신은 서울로 불려와서 약사발을 마시고 죽는가 하면 관련자들은 모조리 처단되었습니다. 법에 의하여 사형된 사람은 20여명이고 수사과정에서 맞아죽은 이가 30여명, 친척이란 이유로 죽은 이가 13명, 유배 114명이나 되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은 173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정변으로 노론이 숙청된 이후 정치는 소론이 독점하게 됩니다.
     
      조선조의 당쟁은 이처럼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권력자가 되고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은 역적이 되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는 식으로 아무런 기준도, 원칙도 없는 권력 그 자체의 끝없는 추구와 모함과 죽임과 복수의 연속이었습니다. 권력을 놓는다는 것은 유배나 죽음을 의히하는 이런 정치풍토에서는 합리적인 논쟁이나 토론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런 조선조 당쟁이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약간 바꾸어 우리나라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에서 여러분께서 보시고 읽으시는 정쟁기사나 역사물 드라마에서 보시는 당쟁과 궁중암투는 등장인물의 복장이 달라졌을 뿐 그 속성은 똑 같습니다. 모함하기, 과거들추기, 복수, 자체분렬의 연속, 사소한 것에 목숨걸기, 용서없기.
     
      그런데 우리 당쟁사를 보면 당파싸움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는 사람은 왕이었습니다. 왕이 아무리 약하더라도 일단은 그 王의 명령에 의하여 누가 죽든지 귀양가고 살아남든지 이기든지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政爭에서 조선조의 王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가 궁금합니다. 조선조에서는 모든 권력의 원천은 임금이었듯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민입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선택하므로 이론상으로는 국민이 왕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상적인 국가정책에 대한 최종결정권자는 아닙니다.
     
      일상적인 업무에서 조선조의 왕과 같은 대권을 쥔 사람은 대통령과 국회입니다.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국회를 지배한다면 대통령이 왕이라고 비교해볼 만합니다. 즉, 조선조의 왕이 했던 역할을 지금은 국민, 대통령, 국회가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민주시대의 왕인 우리 국민들이 지난 50년간 발휘해왔던 정권창출과 교체의 기능은 대강 이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이름을 가진 대왕은 1948년엔 이승만파에게 정권을 주었습니다. 이승만파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파가 그러나 너무 오만해지고 무능, 무력해지자 대왕은 1960년에 화를 한번 벌컥 내어 이승만을 추방하여 태평양상의 한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장면을 영의정으로 하는 민주당파에게 정권을 맡겼습니다. 민주당이란 이름 그대로 민주주의를 한번 잘 해보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면 총리를 배출한 민주당이 노론과 소론처럼 싸우다가 분열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사회가 불안해지고 좌익세력이 등장하고 군대가 공산화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이러니까 군대가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국민들은 대체로 쿠데타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박정희의 집권을 허용했습니다.
     
      국민들은 박정희란 팔팔한 머슴을 잘 부려먹었습니다. 부지런한 이 머슴은 조국근대화란 목표를 걸고 집안을 일으키고 돈을 모아 집안이 부유해지고 식구들이 먹고살게 된 정도가 아니라 공부도 하고 여가도 즐길 수 있을 만한 여유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머슴일을 하다가보니까 자신이 집안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오만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화를 내고 이를 알아차린 그의 부하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 뒤 모든 정치인들에게 판을 제공하여 한번 민주주의를 해보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른바 1980년 봄의 이야기입니다. 자유가 주어지니까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학생, 노동자, 정치인들이 자제할 줄 모르고 민주화, 임금인상, 그리고 정권교체를 일시에 요구하니 사회가 불안해지고 이 틈을 타서 정치장교들이 뭉쳐서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때 국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나 사회안정을 약속한 신군부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국민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 힘이 센 쪽으로 나라가 기울게 됩니다. 그리하여 全斗煥 정권이 들어섰던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때의 중화학과잉투자를 조정하고 물가를 잡아 1980년대를 경제적 태평성대로 만들고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여 사회 선진화의 한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빵문제가 해결되면 정신적 자유를 욕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욕망은 민주화 요구로 나타났습니다. 1985년 2.12총선에서 국민들은 어용야당을 외면하고 선명야당을 지지함으로써 민주화를 우리 사회의 대세로 만들었습니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는 정권이 혁명이나 쿠데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조선조의 왕과 같은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선거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조선조의 黨爭과 요사이의 政爭이 다소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만 많은 부분에서는 닮아 있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당쟁이나 요사이의 정쟁에는 外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오랑캐나 북한정권만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대주의에 정신이 찌든 때문이고 자주국방을 포기한 때문입니다. 당쟁시대에는 중국이 국방을 대신해주었고 지금은 미국이 북한을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방을 大國한테 맡겨두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하여 자리다툼만 벌이는 것 이상의 윤리적 타락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어떤 물질적 부패보다도 더한 정신적 부패인 것입니다. 자주국방을 잊어버린 지도자들은 누가 우리의 진정한 적이며 누가 우리의 선의의 경쟁자인지를 분간할 줄을 모릅니다.
     
      자주국방을 포기함으로써 외부에서 적을 발견못하니까 내부에서 적을 발견한다는 것이 선의의 경쟁자여야 할 상대 정치세력을 적처럼 대하고 말살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누가 적이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경쟁자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은 국익을 기준하여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政爭만 있고 國政은 없고 私益만 있고 國益은 없는 그런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