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순 캠프에서 활동 중인 '공안(公安)사건연루자들'

    우상호 대변인·이인영 선대본부장…漸入佳境(점입가경)으로 치닫는 朴캠프

    金泌材


    박원순 汎(범)좌파 서울시장 후보의 캠프 대변인으로 활동 중인 우상호 前민주당 의원과 선대본부장인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전대협’ 출신이자 ‘부여간첩사건’ 연루자들이다.

    ■ ‘부여간첩사건’은 1995년 충남 부여에서 발생한 무장간첩사건으로 이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장진희-나경주 경사가 殉職(순직)했다.

    당시 권총과 독총 등을 소지했던 간첩 김동식·박광남(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은 같은 해 8월 남파간첩을 帶同越北(대동월북)하라는 임무를 띠고 강화도를 경유해 남한에 침투, 국내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포섭을 시도했다.   

    당시 이들의 침투경로를 조사했던 軍警(군경) 합동작전본부는 “김동식·박광남은 8월29일 오후 잠수정으로 안내원 2명과 함께 황해도 해주를 출발, 강화도 건평리 해안에 도착했으며 강화도 온수리고개 부근 야산에 최초 잠입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1995년 10월24일 軍警 수사망에 포착·검거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 박광남은 병원으로 후송 치료 중 사망하고 김동식은 생포됐다. 이와 관련, 안기부(국정원 전신)는 1995년 12월8일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이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당시 안기부는 “김동식은 1990년 5월 처음 남파되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암약하고 있던 최고위급 남파간첩 이선실과 고정간첩 황인오를 대동해 越北(월북)했던 자”라고 설명했다.

    [주: 이선실(북한 권력서열 22위·2000년 사망)은 1980년 3월~1990년 10월까지 10년 이상을 서울·전주·안양 등지에서 숨어 지내면서 남파 공작원 10여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대남공작을 총지휘해온 간첩이다. 제주도 출신으로 이선화, 이옥녀 등의 가명을 사용해온 이선실은 1980년 이전에도 1966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남파됐다. 1978년에는 일본 내 親北단체인 ‘조총련’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입국하기도 한 베테랑 공작원 이선실은 80년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입국한 뒤로는 운동권 일각에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고, 제주 4·3사태 희생자의 유족이며, 아들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실종된 할머니”, “평생 홀로 지내며 삯바느질과 식당 경영으로 모은 재산을 민주화운동에 쓰는 노인네”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동식은 1995년 8월 박광남과 함께 再(재)침투해 이인영(당시 전대협 동우회장), 우상호(당시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허인회(前고려대 총학생회장), 함운경(2004년 열린당 공천 총선 출마) 등을 만나 “함께 통일운동을 하자”면서 포섭을 企圖(기도)했다.
     
    이들은 김동식과 접촉하고도 그 사실을 當局(당국)에 알리지 않아 국보법 상 不告知罪(불고지죄)로 구속됐다.(現박원순 선거캠프 우상호 대변인은 당시 구속적부심사 후 석방) 허인회는 ‘접촉시점이 달라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요지로 김동식과의 접촉을 부인했다.
     
    당시 이인영우상호는 ‘(김동식이) 미친 사람처럼 보여 신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해 처벌을 면했다. 허인회는 혐의가 일부 인정돼 구속됐다.(注: 허인회는 98년 2월27일 대법원 형사2부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음.)

    안기부는 ‘부여간첩사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북한공작조직이 ‘혁명2세대’ 출신들을 엄선하여 철저한 以南化(이남화) 교육을 통해 남한 환경에 익숙한 ‘새 세대 공작원’을 양성·남파했다. 국내 운동권 사이에 ‘주체사상’이 만연해 있는 반면, 국민들의 안보 경각심이 해이해진 현상에 고무되어 포섭대상으로 선정한 운동권 인물들에게 북한 공작원이라고 밝히는 대담하고 과감한 공작전술 구사했다.”

    이인영우상호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92년 대법에서 利敵(이적)단체로 판정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적단체 ‘한총련’의 전신) 출신이다.

    당시 법원은 92도1244, 92도1211, 93도1730 등의 판례를 통해 ‘전대협의 노선을 결정하는 ‘정책위원회’는 북한이 주장해온 민족해방인민민주의혁명(NLPDR)에 따라 우리 사회를 美제국주의식민지로, 우리 정권을 친미(親美)예속파쇼정권을 규정하는 전제 하에 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현정권타도,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 등을 주장하는 이적단체임’을 밝혔다.

    ‘전대협’의 노선을 결정한 ‘정책위원회’는 주체사상(主體思想)에 확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회의 때는 북한의 대남(對南)통일혁명전위기구인 ‘한민전’에 충성할 것을 결의하고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서’ 등을 수행해왔다.

    ‘전대협’ 산하 조직인 ‘반미(反美)청년회’에서 활동했던 강길모 뉴스라이브(前프리존뉴스) 편집인은 2006년 9월20일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세미나’에서 “反美청년회는 고려대 조혁이 총책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역은 바로 본인이었다”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폭로했었다.

    나는 88년 화공약품으로 사제폭탄을 만든 후 구국결사대를 만들어 서울 美문화원에 들여보냈다. 지금은 노무현 정권의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직접 가르쳤다. 우상호·오영식 열린당 의원, 김만수 前청와대 대변인, 이은희 前청와대 제2부속실장, 여택수 前대통령제1부속실 행정관…(중략)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찬양했다. 88년 1월에는 전국 대학운동지도책들을 모아놓고 88년을 ‘조국통일 元年(원년)’으로 삼겠다면서 KAL기 조작사건을 비롯해 ‘조국통일의 모든 장애를 척결하는데 학생대중을 총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내가 내린 명령은 북한의 對南선전매체 ‘한민전’이 내린 지령이었다.”(출처: 2006년 9월21일자 김성욱 프리랜서 기자 보도 인용, 제목: 「어느 주사파의 용기 있는 고백」)

    강 편집인은 11일부터 박원순 선거캠프의 특보를 맡게 된 김기식(참여연대 사무처장 출신)에 대해 “학생운동을 정리하며 가장 애써 키운 친구가 김기식”이라고 밝힌 뒤, “문제는 아직도 같이 운동했던 많은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上同)

    한편, 우상호 박원순 캠프 대변인은 북한의 核실험 직후인 2006년 10월20일 김근태, 천정배, 이미경, 원혜영, 이계안, 이목희 등의 인사들과 함께 개성공단을 방문했었다. 당시 김근태 는 현지에서 가진 오찬 중 북한 접대원들과 소위 ‘춤판’을 벌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김필재(金泌材)/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