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섭 교수, 이승만·정한경 청원서와 김규식 청원내용 공개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 가운데 1919년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은 일정시점 뒤 완전독립을 상정한 애국적 차원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 ▲ 상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
    ▲ 상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30일 개최한 1차 학술회의에서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연구교수는 파리 강화회의 주도국들에 제출 또는 전달키 위한 위임통치 청원서는 ‘독립운동 무용론’ 내지 ‘외세의존적 허무주의’에 가까운 것이란 좌편향적 시각에 따른 학계일각의 주장을 비판했다.

    우선 오 교수는 “이승만은 3.1운동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상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 의정원의 탄핵으로 물러난 1925년까지 6년간 직무를 수행했다”고 운을 뗐다.

    아울러 오 교수는 “학계는 ‘독립전쟁론’·‘의열투쟁론’에 천착한 나머지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을 폄하해왔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론은 일본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는 와중에 한국의 즉각적인 완전독립이 불가능한 현실을 고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라며 국제정세를 감안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독립구상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키 위한 위임통치 청원서는 1919년 2월25일자 이승만·정한경의 청원서만 알려졌으나, 상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도 유사한 문건을 강화회의에 보냈다며 이 내용의 전부를 공개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오 교수가 공개한 해당문건 역시 이승만·정한경의 청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위임통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일본이 감독국이 아니라는 조건아래 한국은 스스로를 일정한 보호기간동안 국제적 감독에 맡길 것을 바랍니다’는 문구가 눈길을 끌고 있다.

    다만 신한청년단이 파견한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끌레망소 강화회의 의장과 윌슨 미국 대통령,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각국 대표단에 전달된 이 문건은 이승만·정한경 청원서에 비해 국제정세나 국제법에 대한 면밀한 고려가 없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오 교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론은 독립정신·대내외 정세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기반해 한국을 서구형 선진국가로 만들려는 근대적 계몽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오 교수는 또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때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기타 임원들의 검토를 거쳐 승인을 받은 뒤 제출된 만큼 청원서는 미주 한인사회를 양분한 이승만계와 안창호계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어 학계일각에서 “주체적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이란 인식이 팽배한데 대해 식민지 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에 가혹한 평가기준을 들이대고 있다고 비판해 관심을 모았다.

    한편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제도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제도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양자 공히 1·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가인 피식민지 처리방안으로 고안된 제도로 규정될 수 있다.

    실제로 해방이후 한국이 미군정으로부터 3년간 신탁통치를 받은 다음 UN의 감시아래에 총선거를 통한 남한만의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오 교수는 한국은 이 과정을 거쳐 국가의 실력을 길러 세계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