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유아 결핵약 對北지원은 善인가 惡인가?

    [한국선진화 포커스 제51호]
    김성욱/객원논설위원, 리버티헤랄드 대표


       민간단체의 결핵약 對北지원이 재개된다. 정부도 적극적이다. 쌀 지원은 안 해도 영·유아나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허용할 것으로 보인다. 막혔던 對北지원의 예외가 생긴 셈이다.

       북한해방과 자유통일을 역설해 온 나로선 난감한 대목이 이 부분이다. 藥, 영·유아 지원은 막기도 어렵고 그렇게 할 명분도 약하다. 북한정권에 돈이나 현금을 주는 것도 아닌 불쌍한 아이들, 병 걸린 주민을 돕자는 것이다. 게다가 결핵은 전염병이다. 軍에 먼저 쓴다 해도 藥이 돌면 평범한 주민도 치료는 받을지 모른다. 영·유아 지원도 그렇다. 당 간부 아이건, 군 장교 아이건 가련한 아이들 아닌가?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다. 藥이나 영·유아 지원조차 한국인의 이기심과 두려움을 덮어주는 도구가 된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해체, 공개처형이나 탈북자 강제송환·영아살해·강제낙태 등 김정일이 저지른 끔찍한 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對北지원으로 ‘전환(轉換)’시킨다.
    악(惡)에 대한 공분(公憤), 북한의 불편한 진실과 본질적 문제를 외면케 만든다. 약간의 돈이면 2400만 동족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도 덜 수 있다. 아이를 살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몰인정한 극우(極右)라는 비난도 면할 수 있다. 그래서 달콤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藥이나 영·유아 지원이 나쁜 건 아니다. 악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핵심은 ‘우선순위(優先順位)’이다. 지금 당장 동족 누이들이 강간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는데 그들을 구하는 대신 지원만 하라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긴급한 미션은 인권(人權)이다. 정치범수용소를 해체하고, 공개처형 중단과 탈북자 강제송환·영아살해·강제낙태 저지를 위해 목청을 높여야 한다. 인권(人權)이 빠진 지원(支援)은 그래서 허망한 말이다. 藥 줘서 살려낸 뒤 다시 버리는 격이다. 마적 떼 같은 김정일 집단에 던지고 공개처형 당하도록 방관하는 일이다.

       평양을 제 집처럼 오가는 이들을 보면서 탄복할(?) 때가 많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으로 對北지원이 막히자 藥이나 영·유아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 어린이 돕기’, ‘왕진가방 보내기’, ‘좋은 약 보내기 운동’ 등 아이템도 다양하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립시다~” 브로셔만 봐도 가슴이 벅차다!? 그리곤 북한의 끔찍한 인권 현실에 대해선 색맹(色盲)이 되어 버린다.

       외국에 가면 더욱 심하다. 몇 주 전 뉴질랜드 강연을 갔을 때도 對北지원에 목숨을 건 ‘거룩한’ 목사를 만났다. 내가 북한의 인권과 해방을 역설하자, 강연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 목사는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굶어죽게 내버려 두자는 말이냐?”며 핏대를 세웠다. 평양에 갔다가 며칠 전 왔다는 이 목사의 궤변에 적지 않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서도 수차례 경험한 일이다. 대다수 대중은 2400만 북한동포를 해방하는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선택 대신 지갑을 열어 몇 달러 헌금하는 쉽고, 존경받고, 뿌듯한(?) 선택에 나섰을 것이다.

       對北지원이 나쁜 것, 악한 일이라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北韓인권이다. 인권이 빠진 지원은 북한의 지옥 불을 끄지 못한다. 서독이 동독을 도울 때 자유를 사오는 프라이카우프(Frei kauf)라는 원칙에 따랐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도 인권 개선을 조건으로 지원해야 북한에 진정한 변화가 온다. ‘무조건’ 지원은, 그것이 영·유아건 藥이건 한국인의 겁에 질린 조공(朝貢)이나 위선(僞善)이 되고 만다.

    당신의 선한 행위가 선한 결과를 낳게 하려면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