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 서재필 박사 서거 60주기 추모제, 고향 전남 보성서 열려미국 시민이 된 후에도 독립운동 전념…대통령 추대도 거부할 만큼 '정직'
  • 이승만 대통령보다 앞서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 서거 60주기 기념식이 8일 전남 보성 서재필 기념공원에서 열린다.

    서재필 선생 서거 추모제는 그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날(1994년 4월 8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번 추모제는 8일 오전 11시 그의 고향인 전남 보성 소재 서재필 기념공원에서 송재 서재필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와 광주일보(사장 유제철) 공동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제는 안중현 광주지방보훈청장, 강춘석 순천보훈지청장, 정종해 보성군수와 광복회원, 유족, 군민, 보성문덕초등학교 학생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게 된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 박사(1863.11.18~1951.1.5)의 미국 이름이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할 때 ‘피제손’이라는 이름을 지은 후 영어로 바꾸었다. 서재필 박사는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14살 때 과거(殿試·전시)에서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장원급제했다. 이후 개화파의 대표주자인 김옥균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자살하고, 그의 형과 동생은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다.

    한편 서재필 박사는 일본의 움직임도 이상해지자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서재필 박사는 고생 끝에 현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大에 입학,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 박사가 됐다. 이후 1894년 7월 갑오경장 추진내각에 의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대한제국 정부 요인들이 그의 귀국을 요청, 현재의 외교부 차관 자리를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1895년 12월 26일 귀국한 서재필 박사는 중추원 고문만 맡았다. 대신 그는 중추원 활동보다 국민계몽활동에 더 관심이 높았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1896년 7월 2일에는 국내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독립문을 세우고 종래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고쳐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898년 3월 10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과 개혁이 무엇인지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다시 미국으로 망명,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하던 서재필 박사는 광복 후 미군정 등의 요청으로 일시 귀국, 美군정청 최고 고문,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에 선임되기도 했으며, 일부 정치세력들은 서재필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서재필 박사는 자신이 미국 시민권자이고, 국론분열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후보직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서재필 박사는 이후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의 운명을 슬퍼하다 필라델피아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6개월 만인 1951년 1월 5일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4월 8일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서재필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을 ‘신문의 날’로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