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홀어머니 만류에도 형제 자원입대, 전투 중 전사60년 동안 유해도 찾지 못했던 동생, 발굴 후 형 옆에 안장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처럼 어머니의 만류에도 형을 따라 입대했다 결국 전사한, 전쟁영웅이 60년 만에 유해로 발굴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유해발굴단)은 5일 “6․25전쟁 당시 19세 어린 나이에 형님을 뒤따라 입대한 뒤 전사했던 국군 용사가 60년이 지나 형님 곁에 묻히게 되었다”고 밝혔다.

    유해발굴단은 작년 10월 말 육군 21사단과 함께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소재 백석산(해발 1,142m) 남동쪽 3km 지점에서 인식표와 함께 신원미상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다. 이 유해의 DNA검사를 실시, 유가족을 추적한 결과, 국군 7사단 3연대 3대대 소속 故이천우(당시 20세) 이등중사(現병장, 추서진급)로 확인했다.

    유해발굴단이 찾은 기록에 따르면 故이천우 이등중사는 낙동강 전투의 막바지 때인 1950년 9월 홀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윗 형님이 입대한지 한 달 만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故이천우 이등중사는 1년여 동안 다부동 전투를 시작으로 서울 수복 작전, 평양탈환작전, 개천-덕천 전투, 운산 전투, 하진부리 전투 등 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 계속 투입되었다가 1951년 9월 25일 백석산 901고지 능선에서 결국 전사했다.

  • 형제가 1년 동안 전투를 위해 이동한 거리도 3,400km(이천우 이등중사 1,900km, 이만우 하사 1,500km)에 달한다. 또한 형과 동생이 비록 전사한 뒤지만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한다.

    유해발굴단은 “가난한 농촌 집안(경북 청도)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故이천우 이등중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상 비록 학력은 높지 않았으나 총명하고 책임감이 유달리 강했다는 평판과 함께 1954년 2개의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던 사실로 볼 때 참가했던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알아본 결과 맏형과 둘째형, 故이만우 하사와 막내 故이천우 이등중사 사이에 누님 세 분이 있었다. 윗 형님들 나이가 워낙 많아 당시 입대를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故이천우 이등중사의 형 故이만우 하사는 1950년 8월 1사단에 입대하여 낙동강 전투, 평양탈환작전을 거쳐 1951년 5월 경기도 고양, 봉일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故이 하사도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된 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나 가족들은 60년 동안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왔다.

    국방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안타깝게 전사한 두 형제의 사연은 결코 흔치 않은, 귀감이 될 만한 사례”라며 “이들의 사연과 고귀한 희생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故이천우 이등중사의 유해는 기존 방침에 따라 대전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고 장관께 승인을 받은 후 서울현충원에 있는 형 故이만우 하사의 묘 옆에 나란히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국가가 뒤늦게 나마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국방부는 5일 오후, 국방부의 신원확인 통보절차에 따라 육군 53사단장과 유해발굴감식단장이 유가족 자택을 방문해 신원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품 등을 전달한다. 유가족 장조카 이명덕(61세, 부산 거주)씨는 “두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시신마저 찾지 못해 눈물로 지내셨던 할머니의 한숨 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면서, “두 분의 삼촌을 동시에 찾았다는 것에 그동안 맺혔던 집안의 한(恨)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것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해발굴단은 현재 연간 1000여 구의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내고 있다. 하지만 유해를 발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발굴작업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유해발굴단 측은 지금도 전투 지점 등에 대한 제보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