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회 땅굴 들락날락....잠수팀 이끈 A씨“익사 시신도 혼자 끌고 나오는데, 땅굴쯤이야”
  •  지난 1998년 2000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에서는 두곳에서 ‘땅굴’이 발견됐다. 98년엔 민간인들이 임진강변에서 지하 40여미터까지 직접 절개했고, 2000년엔 그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500~600m 이동해 시추만으로 땅굴을 발견했다. 두번째 발견한 땅굴엔 물이 차 있어서 잠수부의 도움을 받아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지금 15cm 시추공으로 지하 땅굴 위치를 알아낸 뒤 다시 직경 60cm의 시추공을 뚫어 사람이 들어가 직접 확인하는 일은 잠수전문가 A 씨, Y씨 형제 등 3명이 명이 한 팀을 이뤘고, 카메라를 담당하는 이모씨가 한차례 들어갔다. 잠수팀을 이끈 A 씨로부터 땅굴 이야기를 들어봤다. A씨는 취재에 응하기전, 당시 땅굴 탐사에 고생한 분들이 많다며 나서기를 주저했다.

  • A씨가 땅굴 시추지점 옆 논을 가리키며 90년대 갑자기 바람이 솟아오른 곳이라고 했다.
    ▲ A씨가 땅굴 시추지점 옆 논을 가리키며 90년대 갑자기 바람이 솟아오른 곳이라고 했다.

    -연천 구미리 땅굴 탐사는 임진강변과 마을 두 군데서 이뤄졌는데, 최초 강변 절개탐사에도 참여했나?
    “원래 잠수부였지 땅굴탐사단은 아니었다. 임진강변 탐사 때는 참여 안했다. 절개했기 때문에 잠수가 필요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절개해서 북으로 나가보니 동굴 벽이 시멘트 같은 이질적인 재질로 막혀있었다고 하더라. 땅굴 탐사 주도자중 한사람인 이창근 씨가 다이너마이트 5박스를 폭파시켜도 뚫지 못했다고 하더라.

  • 박찬성, 이창근 씨등이 임진강변을 절개해 지하 40여미터 아래에서 땅굴을 발견했던 현장. 시추 후에 잠수부가 들어가 확인한 이 모씨 집으로부터 남동쪽으로 500~600m남쪽이다. 가운데 철제 구조물은 절개하기전 구멍을 뚫고 승강기를 설치했던 장비이다.
    ▲ 박찬성, 이창근 씨등이 임진강변을 절개해 지하 40여미터 아래에서 땅굴을 발견했던 현장. 시추 후에 잠수부가 들어가 확인한 이 모씨 집으로부터 남동쪽으로 500~600m남쪽이다. 가운데 철제 구조물은 절개하기전 구멍을 뚫고 승강기를 설치했던 장비이다.

    -당시 땅굴 관련 재판도 했다는데?
    땅굴을 절개한 뒤 당국에서 안 믿어주니까 관련자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공사비도 청구했다. 재판이 아니라 조정위원회였다. 10차례정도 조정위원회가 열린 것 같다. 결국 법원은 민간인들이 입회하에 국방부에서 재발굴하라고 했다.
    -그런데 왜 탐사가 계속되지 않았나.
    국방부는 항소했고 민간인은 소송비가 없으니 포기했다. 그래서 국방부가 이긴 셈이 됐다. 재발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구미리 2차 탐사지에는 어떻게 참여했나?

  • A씨가 김진철 목사에게 60cm 대형 시추공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 A씨가 김진철 목사에게 60cm 대형 시추공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최초 강변 절개탐사에서 발견한 땅굴을 인정받지 못하자 민간인들이 500미터 북쪽에 또 파기로 했다. 민가 마당이었다. 구멍을 뚫고 보니 물이 꽉 찼다. 잠수용역을 받고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통상 한번 내려가는데 400만원을 받는다.

    -북한 남침땅굴이라는 확신 근거는 무엇인가.
    들어가보니 분명 땅굴이었다. 천장은 아치형에 가깝고, 아래는 평탄한 형태다. 어떤 부분은 빨래판처럼 갈려 있기도 했다. 한눈에 봐도 땅굴이다. 내가 사는 동네(파주시. 연천구미리는 파주 바로 옆)땅굴이 지나가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무섭지 않았나? 또 용역비는 받았나?
    내가 20년 잠수 경력에 수중구조단으로 시체만 10년 넘게 건져올린 사람이다. 여주 섬강에서 90년대 버스추락사고가 났을때도 민간인 구조단으로 참가했다. 인명구조를 취미로 한 게 아니라 전문적으로 했다. 땅굴이 무서울리가 있겠나.

    오히려 ‘땅굴 우리가 찾아냈다. 너희들(북한군)은 이제 죽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땅굴 찾는다고 민간인들이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탐사하는데 차마 잠수 용역비도 받을 수 없었다. 나라가 심각한데 누구한테 댓가를 바란단 말인가? 돈으로 치면 2억원이상인데 한번도 달라는 말 안했다. 그리고 아예 땅굴 확인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오히려 뼈 묻을 각오로 들어갔다.

    -몇번 들어갔고 무슨 일을 했나?
    잠수팀이 나를 포함해 세명이었다. 줄을 잡고 통제하는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탠더’는 윤 모씨가 맡았고, 형제간인 또 다른 Y모씨와 내가 잠수를 맡았다. 형인 Y씨가 잠수중 장비 사고가 생겨 급히 상승하는 과정에 폐손상이 와 응급상황을 맞았다. 거의 내가 다 들어갔다. 모두 66회 들어갔다. 비디오 촬영 담당자가 촬영을 쉽게 하도록 굴 안에 버럭들을 정리했다.

    한번 잠수할 땐 20분 이상 못한다. 40m수심이라면 5기압이 된다. 내려갈 때 2분, 올라올 때는 질소 농도조절을 위한 안전정지 시간을 포함해 8분은 걸린다. 결국 안에서 작업하는 시간은 10분 남짓이다. 그시간, 동굴을 탐사하고 구멍을 뚫을 때 쏟아져 내린 돌가루를 펌프로 빨아내는 작업도 유도했다.

  • A씨(오른쪽)가 김진철목사와 함께 지하땅굴에서 걸어간 방향을 재연하고 있다.
    ▲ A씨(오른쪽)가 김진철목사와 함께 지하땅굴에서 걸어간 방향을 재연하고 있다.

    -땅굴은 얼마나 길었나.
    시추공에서 북쪽은 막혔다. 남쪽으로 7m쯤 걸어갔다. 버럭을 쌓아놔 더 이상 걸어 들어갈 수 없었다. 수중에서 힘이 가해지는 동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버럭을 치우고 들어갈 수도 없다. 버럭더미 위로 뚫린 공간으로 플래시를 비춰보니 아치형으로 곧게 쫙 뚫려 있었다.  잠수 경험으로 볼때 17m 쯤은 보인 것 같았다.


    -당시 탐사 주도한 사람은?
    지금 북핵저지단체를 이끄는 박찬성씨가 주도했다. 땅굴탐사 업무처리도 잘했다. 민원처리도 무리없이 했다. 구미리 탐사 때는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했다. 오늘 할일 내일 할 일을 정하고, 팀원들과 회의를 통해 의논해서 일처리를 했다.

  • 2000년 시추공을 뚫었던 이 모씨 집 마당.
    ▲ 2000년 시추공을 뚫었던 이 모씨 집 마당.

    -왜 당시 당국에서 인정하지 않았나?
    물론 당국에서 민간인들이 대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공교롭게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땅굴이 있어도 주목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나라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땅굴 발굴은 어떻게 해야하나?
    조심하고 용의주도해야 한다. 무작정 파고 터무니없는 말을 먼저 하게 되면 양치기 소년이 된다. 다우징으로 검사만 하고 ‘10m 아래 땅굴있다.’ ‘12m아래 2m폭으로 있다’ 먼저 말을 하고 ‘파야한다’고 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다우징과 물리탐사 등 다양한 방법을 교차해서 결과를 분석해야 한다.

    물리탐사자료도 공개하고 해야 한다. 물리탐사와 다우징조사를 함께 해야한다. 두 결론이 합치됐을 때 주장해도 늦지 않다. 땅굴이 10미터 아래 있다면 근거를 대야한다. 100미터라도 근거를 대야 한다. 그냥 10미터라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없다. 땅굴탐사단 전체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말조심해야 한다.
    땅굴 탐사 작업이 의욕만 앞서 오해받고 미친 사람 소리를 듣는 것도 주먹구구로 일을 처리하고 말이 먼저 앞서 그런 것이다.
     김진철 목사같은 분이 리더가 되고 팀을 구성해야 한다. 시작할 때부터 역할을 나누고 비용조달 계획, 시간, 행정당국과 갈등조정, 군, 경찰 다 동의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신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땅굴 확신이 들고, 땅굴이라는 결론이 났을 때도 철저히 준비해 이슈화 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한다. 품행도 중요하다. 작업현장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있는데 신뢰를 잃는 행동이다.
    또 기금조성을 하고 시작해야 한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중간에 돈이 떨어지면 그냥 멈추게 된다. 자금을 구하려면 스폰서가 이해할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먼저 세워야한다.

    결론나기 전엔 절대로 새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팀원들끼리 따로 놀기도 한다. 치밀한 팀을 구성해서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나서야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땅굴 발견 실패 이유는?
    ‘자금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또  ‘말 실수’  ‘떠벌이기’  ‘지나친 단정’ 등 신뢰를 잃을만한 태도이다.
    예를 들어 탄현땅굴도 언론에서 먼저 알게 됐다. 기사화되게끔 확신에 찬 말을 먼저 했다. 그러다 자금떨어지면 중단된다. 이렇게 말이 앞서면 탐사단 일거수일투족은 북한에서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그게 더 해롭다.

    -보상금 관심없나? 땅굴 발굴현장이 있으면 참여할 것인가?
    보상금은 관심 없다.

    목숨걸고 내눈으로 연천 땅굴을 확인하고도 인정 못 받았으니 오기가 난다. 그래서 자금문제 등으로 지금은 중단된 파주 탄현 땅굴 탐사현장에도 관심을 가졌다. 파주 탄현면의 경우 임진강 남쪽이다. 땅굴이 발각된 뒤 북한군이 땅굴 속 수맥을 터놔도 남쪽으로는 물이 안찰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땅굴은 배수 문제로 1000:3 기울기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면서 완만한 오르막길 구조다. 만일 임진강 북쪽에서 발견했을 때 북한이 임진강 물을 뚫어놓으면 북쪽으로 내리막인 땅굴로 물이 흘러들어가 채워진다.
    임진강 남쪽에서 발견하면 북한이 임진강 수맥을 뚫더라도 점점 오르막인 남쪽으로는 물이 안찬다.

    북한이 남쪽으로 상당히 뚫어놨다면 계속 땅굴을 추적할 수 있다.  파주 탄현면 문지리는 임진강 남쪽이었기 때문에 발견만 되면 확인이 쉬울 것 같았다. 누군가 자금만 대면 참가할 것이다. 친구(연천 땅굴에 잠수팀원인 Y씨)도 마찬가지다.


    -연천 구미리 강가는 절개했는데, 500m북쪽은 왜 시추공만  뚫었나?
    지하 40m깊이를 절개하려면 지표면은 작업 공간이 직경 100m도 넘어야 한다. 파낸 흙을 쌓아둘 곳도 없다. 그러니 땅 주인이 포클레인 작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장비를 댈 비용도 문제였다. 임진강변에 43m를 절개했을 때도 수억원의 경비가 들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시추만 하고 청음을 했었다. 위치를 확인한 뒤 큰 구멍을 뚫고 직접 들어가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대신 아주 위험한 작업이다.

     

    -연천군 아미리에도 땅굴 징후가 있었다는데 어디인가.
    아미리에도 땅굴 징후가 있었다는데 직접 못 봤다. 유력한 곳은 노곡리, 노곡교회 앞이다. 지하 폭음, 균열 현상 시추공의 청음기 파이프가 끊어진 것을 봤을 때 가능성이 매우높다. 구미리 위가 아미리, 구미리 남서쪽이 노곡리다.
    -김포에서도 땅굴이 발견됐다는 말이 있었다. 신빙성있나?
    가능한 일이다. 수십년간 뚫는다면 장거리 땅굴도 가능하다.